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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다함 Feb 05. 2021

대학 졸업을 13년 반 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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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빠른 80년 생이다. 초중고등학교는 98학번들과 같이 다녔고, 1년 재수를 하여 99학번이 되었다. 재수하여 1살이라도 더 많은 동기에게 형 오빠라고 불러주기도 했는데, 빠른 80년생인지라 재수를 했어도 나이가 같아 그런 대우를 받지는 못했다. 99학번으로 입학하여 2012년 여름이 되어서야 13년 반 만에 강원대학교 영어교육과를 졸업하였다.


사실 2009년 1학기 때 이미 마지막 졸업 학기였다. 교양과목 하나 봉사활동 하나 이수하고 교생실습만 다녀오면 끝났다. 어머니께서는 큰아들이 마침내 대학 졸업을 고 교생실습을 간다고 정장을 사주셨다. 불행하게도 2009년은 내 인생 가운데 조울증이 가장 심각했던 한 해였다. 깊은 산속 끝없는 계곡을 혼자서 하루 종일 걸었고, 가진 돈을 다 쓰고 대형마트 시식코너에서 허기를 채우고 공원에서 노숙을 했다. 길에서 객사할 뻔했던 순간이 여럿 있었던 아찔했던 한 해였다. 그런 상태에서 집에서 가족들의 돌봄 가운데 있었던 것이 아니라, 객지에서 혼자 하숙을 하고 있었다.


2009년 3월 학교를 자퇴하고, 등록금을 빼서 그 돈을 썼다. 조울증의 주요 증상 중 하나가 과도하게 돈을 쓰는 것이다. 사치를 훌쩍 넘어 자신의 모든 재산과 한 발 더 나가면 가산까지 탕진한다. 자기 돈을 다 쓰면 사채를 쓰고, 어디서 귀신 같이 돈을 끌어와 쓰기도 한다. 나도 많은 돈을 썼지만, 조증 상태에서 차후에 감당할 수 없는 돈을 쓴 경우도 있다. 내 증세가 그들보다 약했다기보다 그만큼 쓸 돈 자체가 없었다. 가산탕진까지는 아니었지만 내 개인  전부를 뿌리고 다녔다. 빚을 지지는 않았다. 조증 상태에서 모든 돈을 다 쓰고, 계속하여 쓸 돈이 필요했고, 사채라도 쓰고 싶었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빌려주는 고리의 사채도 담보를 고 빌려준다. 아무것도 없는 개털이었던 나는 사채라도 끌어 쓸 신용 자체가 되지 않았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저 내 통장의 내 돈을 물 쓰듯 탕진하는 수준에서 멈추었다.


약을 끊으면 처음 얼마 간은 증세가 좋아 보인다. 좋은 징조가 아니다. 최악의 상황으로 가는 과정이다. 약을 먹지 않은 채 방치해 두면 기분이 떠서 심각한 조증 상태가 되어 정신병원에 강제입원을 당할 수 밖에 없는 파국맞이한다.


나는 약을 먹으면 기분이 정상 범위로 조절이 되고, 약을 먹지 않고 시간이 지나면 반드시 조울증이 재발하여 심란해진다. 약을 잘 먹는다고 재발이 안 되는 것은 아니다. 스트레스나 계절의 변화로 조울증이 재발하기도 하지만, 약을 꾸준히 먹고 있는 상태에서 재발할 경우, 입원하지 않고 외래로 약을 증량함으로써 조절이 가능하고, 입원을 하게 된다 하여도 증세가 심각하지 않아 입원기간이 짧다.


2009년 3월에 자퇴를 했지만, 부모님께서 사태를 빨리 파악하셔서, 그해 8월에 바로 재입학과 휴학 처리를 해놓았다. 보통의 다른 학생보다 많은 학기를 다니며 많은 등록금을 내고, 자퇴와 재입학으로 입학금도 한 번 더 내고, 13년 반 만에  졸업학점을 이수하고 2012년 8월 마침내 강원대 영어교육과를 졸업했다. 13년 반이 걸렸지만 말이다. 국립대라서 학비가 절반이었지만 오랜 기간 많은 학기 학비를 내고, 객지인 춘천에서 생활했기 때문에, 모르긴 몰라도 부모님께서 많은 돈을 쓰셨을 것이다. 남들 미국 박사까지 하는 돈과 시간을 썼는지도 모른다. 나 또한 어쩔 수 없었다. 그러고 싶어서 그랬던 것도 아니다. 주치의 선생님과 정기적으로 상담하며 약을 꾸준히 먹었으면 괜찮았을 것이다. 조울증에 대해 나도 부모님도 잘 몰랐다. 정신과 전문의는 정신과 약이 부작용이 없다고 하지만, 환자가 느끼는 부작용은 있다. 물론, 지금 나는 매일 약을 먹고, 별다른 부작용은 없다. 부작용 때문에 단약 하는 것만은 아니다. 약 먹는 자체가 나를 정신병자로 규정하는 것 같고, 약에 의지하는 것이 나약한 것 같고, 약이 나를 조종하는 것 같고, 조증 상태에서 창의적이고 즐거운 기분이 제한되는 것 같아서 약을 먹지 않는 경우가 있다. 정신과 환자는 자신이 환자인 것을 인정하지 않거나 부분적으로만 인정하기 때문에 약을 안 먹어 비극이 시작된다. 모든 치료는 내가 아픈 것을 아는데서 시작한다. 아픈 것은 부끄러운 게 아니라 치료와 조절의 대상일 뿐이다.


정신과 선생님은 정신과 약은 부작용이 없다 하시지만, 환자들은 여러 가지 부작용을 호소한다. 실제 부작용이 있다 하더라도 조울증 증상으로 겪어야 하는 인생 참사보다는 작은 부작용을 감수하는 게 낫다. 20년 전에 조울증이 시작되어 이제는 조울증을 조절하고 극복한 경험자로서의 깨달음이다. 오해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그 어떤 약의 도움 없는 완치가 조울증의 극복이 아니다. 그런 것은 현시점의 정신의학에 없다. 매일 자기 전 비타민처럼 약 몇 알 먹으면서 보통 사람들처럼 자신의 삶을 잘 살아가는 게 조울증 극복이다. 조울증 극복은 완치가 아니라 조절이다. 모든 조울증 환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일부 조울증 환자는 천재라 불리기도 한다. 천재가 조울증에 취약하기도 하고, 생각의 병이기도 한 조울증과 장기간 살아가다 보면 생각의 논리와 신경과 재능이 생겨 천재성이 발현되기도 한다. 어떤 자폐증 환자는 한쪽으로 발달하기도 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부작용은 주치의 선생님과 상의해서 다른 약으로 바꾸고, 자기 관리로 극복할 수밖에 없다. 작은 부작용은 감수하고, 치명적인 조증을 조절하고 관리하는 게 현명하다.


2009년은 가장 위태로왔던 한 해였다. 인생의 촛불이 완전히 꺼질 뻔했다. 자퇴하고 등록금 빼서 며칠 동안 전국을 돌아다니며 가진 돈 다 써버리고 공원에서 노숙을 하고 대형마트 시식코너에서 허기를 해결했다. 모든 돈을 다 써버리고 경찰서에 가서 도움을 구하니, 마음씨 좋으신 경찰관이 개인 돈인지 그런데 쓰는 돈이 있는지 집에 가라고 만원을 주셨다. 그 돈 가지고 근처 찜질방에 들어가 쓰러졌다. 그 후 기억은 없다. 부모님께서 집으로 데려가셨는지 의식을 깨어보니 집이었다. 바로 병원에 입원해할 상태였는데, 많은 사람들이 정신질환에 대해서 잘 모른다. 지금 나도 조울증에 대해 환자로서 나 자신의 조울증을 아는 것뿐이다. 보통 사람보다도 체험적으로 조금 더 아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전문의의 도움이 필요하다. 조울증의 원인으로 강력하게 추측되 바는 몇 가지 있으나, 정확하게 밝혀진 원인은 아직 없다. 조울증 치료에 완치의 개념없으나, 매일 약을 먹어 혈중 약물농도를 유지하면 기분이 정상 수준에서 조절 가능한 정도까지 현대 정신의학 수준이 발달되었다. 약 먹으면  문제없이 살 수 있다. 조울증이 조절되면 자신의 재능을 발휘하여 성공한 인생을 살 수 있다.


2009년은 위태로왔던 시기였지만, 돌아보면 은총이었던 날들이었다. 길에서 객사하지 않았다.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는 대형사고를 치지도 않았다. 착하고 순수했던 영혼이 선을 넘어 내 멋대로 살기도 했지만, 부모님을 제외하고는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입히지는 않았다. 기억하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다. 약을 꾸준히 먹기 시고 좋은 아내를 만나면서 조울증에서 회복되어 다시 일어섰지만, 부모님의 사랑으로 인생의 불꽃이 꺼지지 않고 오랜 아픔과 방황 속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었다. 부모님의 사랑으로도 내 병을 컨트롤하지는 못했지만, 그 사랑 때문에 삶의 불꽃을 꺼트리지 않고 버틸 수 있었다.




2009년에서 2010년을 넘어가면서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10대 때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독실한 크리스천이었고, 20대 때는 선데이 크리스천이었지만 여전히 교회 곁을 맴돌았다. 2009년에서 2010년을 넘어가며 서른 살이 되면서 무신론자가 되었다. 교회와 교인에 실망하고 하나님을 원망해서 무신론자가 된 것은 아니다. 그저 세상에 하나님이란 초월적 신의 존재가 없구나 하는 결론에 이르렀다. 신을 믿지 못했다기보다 신의 존재를 말하는 선지자를 더 이상 신뢰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초월적 존재 신이 무능하고 거짓말쟁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아니었다. 신의 존재를 파는 선지자를 더 이상 믿지 않게 되었던 것이다. 그 시점에 진화 과학자이자 전투적 무신론자인 리처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이란 책을 읽었다. 책 페이지가 길어서 일독을 하지는 못했고 눈이 가는 부분만 훑어 읽고 덮었다. 도킨스의 제자는 아니었다. 도킨스의 논리의 허점도 느꼈다. 도킨스를 극복하여 나중에 부모님 세상 떠나시면 대한민국의 도킨스가 되고 싶었다. 리처드 도킨스처럼 전투적 무신론자가 되겠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종교를 박멸하겠다는 의미도 아니었다. 종교와 종교인의 자유를 존중하되, 종교를 믿고 싶지 않은 사람들의 자유를 쟁취하고 싶었다. 종교로부터 종교를 믿지 않는 생각에 대한 태클을 받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부모가 교인이면 어려서 본인이 스스로 각성하기 까지는 부모님이 자녀의 믿음을 결정할 수 있다 하더라도, 본인이 더 이상 종교에서 깨달으면 종교를 강요당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 정도의 종교로부터 인간의 해방을 꿈꾸었다. 종교의 박멸이 아니라 종교를 믿지 않을 자유를 꿈꾸었다. 사후에 천국은 존재하지 않고,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나기 때문에, 내세보다 현실을 즐기며 사는 게 좋다고 믿었지만, 사후에 대한 믿음이 본인의 삶을 행복하게 한다면, 어리석다 말할 수도 없고 본인의 자유라고 생각했다. 신앙의 자유로 인해 불신앙의 자유가 침해당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 신앙의 자유는, 믿을 자유뿐 아니라 믿지 않을 자유도 포함한다고 생각했었다. 어찌 보면 합리적인 생각이었지만,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목사님 아들로서, 그런 세계관을 가지고 산다는 것이, 부모님께서 말씀은 안 하셨지만 어려움이 있었다. 조울증으로 아파서 부모님과 가족의 도움을 받아서 살면서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게 어떤 측면에서 배신이었다.


부모님과 가족 외에는 타인들에게 피해를 주는 사고까지는 치지 않았다. 물론 조울증 이후에 잠깐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기도 했겠지만, 법적 테두리를 넘어가지는 않았다. 조울증 이전에는 예의 바르고 착한 사람이었지만, 조울증 이후에는 나 자신을 조절하지 못할 때가 있었다. 지금 와서 일일이 기억하고 사과할 수는 없다. 부모님과 아내의 사랑으로 조울증을 극복하며 살고 있는 나는 성공하고 싶다. 내가 조울증으로 아플 때, 나로 인해 상처를 받았던 사람이 있었더라면, 예전에 나와 인연을 아름다웠던 추억으로 간직하고 싶은 훌륭한 인물이 되는 것으로 갚기를 원한다.




집에서 지내며 어머니께서 운영하시던 카페에서 일했다. 어머니께서는 초등학교 선생님으로 20년 정도 근무하시다가 명예퇴직을 하셨다. 명예퇴직하시고 퇴직금을 일부는 연금으로 받으시고, 일부는 현금으로 받으셔서 수원에 카페 공간을 사서 운영하셨다. 카페를 로 돈을 벌려고 시작하셨기 보다도 다목적의 이유가 있었다. 나는 20대 30대를 조울증으로 방황을 했다면, 동생은 10대 때 나쁜 친구들과 어울려 방황을 했다. 그 나쁜 친구들의 부모님께는 동생이 나쁜 친구였는지도 모른다. 동생은 고등학교 입학하자마자 바로 학교를 그만두었다. 부모님께서는 동생을 친구들과 방황하는 환경으로부터 떼어 놓으려고, 평촌 아파트를 팔고 수원 아파트를 사서 이사하셨다. 수원 아파트 근처 상가를 사서 카페를 운영하셨다. 어머니께서 크리스천 카페를 운영하고 싶으셨던 낭만적인 꿈도 있으셨지만, 그 공간을 통하여 동생의 방황을 끝내주기 싶던 일도 있으셨다. 아버지께서 그즈음에 초등학교에서 선생님으로 근무하시며, 퇴근 후 야간 신학대학원에 다니시며 목회를 시작하셨다. 아버지께서는 전도사님이셨을 때인데,  우리 카페에서 다른 두 분의 전도사님과 공동 목회로 개척교회를 시작하셨다. 시간이 지나고 각기 다른 길로 가셨다. 어머니께서 카페를 여신 이유가 아버지께서 개척하신 예사랑교회의 초창기 예배 장소로도 복합적으로 사용하시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동생 방황을 끝내 주고자, 아버지 개척교회를 하시고자, 어머니께서 은퇴하신 후 낭만적인 크리스천 문화공간으로 만들고자, 다목적으로 카페를 시작하셨다. 조울증이 재발한 나는 카페에서 매니저로 일을 하였다. 내가 카페에서 일할 때는 카페 손님이 없을 때였다. 어머니께서도 카페를 지키며 운영을 하실 의지가 없을 때였다. 적자가 나도 그렇게 중요하지는 않았다. 전월세가 아닌 우리 소유의 건물이었고,  주일에는 카페에서 아버지께서 개척하신 교회 예배를 드렸고, 아팠던 내가 손님 없을 때는 커피 내려 마시고 음악 들으며 쉬는 공간이었다. 마이너스가 나도 큰 상관은 없었다. 그렇다고 마이너스 나도 좋다는 마음으로 운영한 것은 아니었다. 부모님께서는 내가 대학교 졸업을 못할 경우 카페가 미래의 터전이 되었으면 하셨다. 세 얻어서 하는 카페가 아니라 우리 소유의 카페였고, 다목적으로 사용하는 공간이었고, 아픈 아들 놀지 않고 일을 하며 요양하는 공간이었기 때문에, 부모님께서는 손해 본다고 생각하지 않으셨다. 적절한 시기에 카페를 팔아서 손해 보았던 것을 청산했다.


카페에서 소일하면서 다시 회복이 되었고, 학교로 돌아가서 한 학기 다니며 얼마 남지 않은 학점을 이수했다. 강원대학교 영어교육과를 13년 반 만에 마무리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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