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다문화가족지원센터에서 나눔장터를 했다. 작년에도 참가했던 적이 있는 연중행사인데 기억이 희미하다. 우리가 다니는 수원외국인복지센터와는 다른 기관이다. 아내 에미마는 외국인보다는 다문화인데, 외국인센터에 다녔다. 다문화센터는 천주교에서 외국인센터는 교회에서 운영한다. 종교 자체 때문에 우리가 외국인센터를 다니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찾아갔던 수원의 네팔어 예배를 드리는 교회에서 하는 센터였고, 네팔어 예배의 전도사님이 센터의 직원이다. 목적성보다 인맥이 앞서기 마련이어서 우리는 외국인센터와 얽혔다. 그럼에도 한국에서의 법적 지위가 외국인이기보다 다문화인 아내는 다문화센터가 필요할 때가 있다.
마침 나도 출근하지 않는 휴무일이었다. 요한이를 어린이집에 보내고, 약 타러 가는 날이라 병원부터 다녀왔다. 점심을 먹고 아내와 다문화센터에 갔다. 나 말고도 외국인 아내와 동행한 남편들이 있었다. 외국인 남자도 보이는 것으로 보아, 다문화 하면 여성을 생각했던 것이 나의 편견이었을지도 모른다.
조사지 작성을 먼저 했다. 스마트폰으로 QR을 찍어 다문화 서비스 요구도 조사지를 작성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쿠폰 몇 장을 받아 나눔장터에 참여했다. 행사 이름이 장터이지만, 바자회는 아니고, 받은 쿠폰으로 물품 몇 개를 골라 받아가는 행사였다. 행사를 마치고 돌아오다 생각해 보니 쿠폰 전부를 수납함으로 교환해 올걸하는 후회가 들었다. 집에 굴러다니는 요한이 장난감을 깨끗히 정리할 수 있었는데.
2018년 12월 네팔 카트만두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2019년 5월 한국에 왔다. 결혼한 지도 7년이 넘었고, 아내가 한국에 온 지도 7년이 되어 간다. 우리의 경우는 업체를 통한 일반적인 국제결혼은 아니었다. 둘째고모와 네팔 선교사님이 절친이었고, 아내와 네팔 선교사님이 딸과 어머니 같은 사이였다. 소개를 받고, 카톡으로 연애하고, 네팔에 가서 2주 동안 머무르며 약혼식 하고, 다시 와서 결혼을 했다.
우리 같은 경우는 뭐가 있어서 결혼한 것은 아니다. 아무것도 없이 결혼했다. 아무것도 없었다고 할 수도 없기는 하다. 부모님께서 보증이 되어 주셨다. 그때는 조울증으로 내가 독립적으로 생활이 어려웠을 때였다. 동생은 스스로 알아서 잘 살았고, 교장 선생님으로 정년퇴직하신 아버지와 교직 20년 하시고 IMF 때 명예퇴직하신 어머니는 연금으로 노후생활을 하시며, 나와 아내와 요한이 우리 세 식구가 독립적으로 설 수 있을 때까지 도움이 밀어주셨다.
스무 살에 조울증에 걸리고, 이만큼 사람답게 살아가는 것도, 어떤 면에서 성공이다. 같은 또래의 성취와 비교할 때 나는 뭔가 싶은 것이지, 난 같은 또래의 삶과 전혀 다른 궤의 삶을 살아왔고, 또 이 나이가 되면 잘 나가는 사람들도 바닥으로 떨어지고 그렇다.
한 달 월급만 따지고 보면 가난하지만, 돈의 액수가 아니라 삶의 질과 규모를 보면, 사실 가난한 삶은 아니다. 그게 다 내가 잘나서가 아니라 다 누군가의 은혜와 덕이지만 말이다. 사랑에 실패하고, 스무 살 군대에서 조울증에 걸려, 이십 년을 방황하다, 있는 모습 그대로 날 사랑해 주는 아내 에미마를 만나 결혼을 하고, 아들 요한이랑 살아가는 것, 사실 그 자체로 어떤 면에서 인간승리다. 인간의 욕심이 끝이 없어서, 그것으로 만족이 안 되니 아직 완전에 가까운 행복에 닿지는 못했지만, 절반의 행복까지는 왔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