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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다함 Mar 01. 2021

소녀 사랑

하나님 사랑이 소녀 사랑이 된 것은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였다. 기독 학생반과 찬양선교단 멤버로서 1학년 초부터 알고는 지냈지만, 소녀를 향해 심장이 뛰기 시작한 것은, 내가 기독 학생반 부회장이 되었고, 소녀가 기독 학생반의 회장이 되었던,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다. 그렇게 소녀를 향한 짝사랑이었던 첫사랑이 시작되었다.


소녀는 평범하기보다 비범했다. 못 생긴 것은 아닌데, 예쁘지도 않았고, 특징은 키가 작았다. 눈에 뭐가 씌면 키 작은 게 귀여워 보인다. 소녀를 공부를 못 한 것도 아니었지만, 그다지 잘한 것도 아니었다. 나랑 비슷한 점이기도 했는데, 공부를 안 한 것도 못한 것도 아니었지만, 공부에 큰 관심이 없고 다른데 관심이 있었다. 소녀는 내가 공부를 못했던 것으로 생각했었던 것 같지만, 공부는 소녀보다 내가 조금 잘했다. 결과적으로 둘 다 재수를 했고, 나는 지거국(지방 거점 국립대) 중 꼴찌 학교에 갔고, 소녀는 인 서울(서울 소재 대학교) 하위권 대학에 갔다. 우리 학교는 지방 거점 국립대라서 학비가 싸고 강원도에서는 알아준다는 것 빼고 그다지 자랑스러운 학교는 아니었지만, 전공 학과 영어교육과는 자랑스러웠다. 우리는 누가 물으면 강원대 다닌다고 하지 않았고, 영어교육과 다닌다고 했다. 영어교육과라고 하면, 주위에서는 꼭 영어영문학과로 기억했는데, 우리는 영어영문학과라고 부르면 엄청 싫어했다. 서울의 상위권 명문대에서는 영어영문학과와 영어교육과는 큰 차이가 없지만, 지방으로 갈수록 영어교육과가 입시 커트라인으로 영어영문학과보다 한참 위이다. 춘천교대가 강원대 영어교육과보다 커트라인은 셌지만, 강원대 영어교육과에는 춘천교대 충분히 갈 수 있는데도 우리 과에 온 학생들도 많이 있었다. 초등 임용고시가 중등 임용고시만큼 경쟁이 심하지 않아 일반적으로 영어교육과보다 교대를 선호하지만, 초등학교 선생님보다는 중고등학교 선생님이 되고 싶은 학생들도 상당히 있기 때문이다. 사범대 모든 학과 중에서 영어교육과를 가장 선호했고, 의대 빼고는 우리 과 영어교육과가 제일 좋았다. 자신의 적성과 맞으면 되었지 전공에 좋고 나쁨이 있으랴 만은, 강원대 다닌다고 하면 그렇구나 하는 반응이었는데, 영어교육과 다닌다고 하면 다들 좋은 과 다닌다고 했다. 만약에 내가 전공을 보지 않고 학교를 보았다면, 인서울의 상위권 학교에는 가지 못했겠지만, 소녀의 학교보다는 커트라인이 조금 더 높은 인서울 대학교에 갈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소녀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 마음을 내려놓았어야 했다. 그게 안 되면 마음을 드러내지 말고 소녀와 좋은 친구로 지내며 좋은 친구로 곁에 있기만 했으면 되었다. 나 자신을 멋지고 능력 있는 남자로 업그레이드시키며, 소녀가 남자 친구와 깨질 언젠가 을 기다리면 되었다. 잊지 못할 운명의 사랑이었다면 말이다. 결국 결혼까지 할 것만 같던 그 남자 친구와 깨졌고, 내가 멋진 남자가 되어 여전히 소녀에게 좋은 친구로 곁에 있었더라면, 소녀의 심장이 나를 향해 뛰기 시작했을지도 모른다. 다만 그때야 비로소 내 심장이 소녀를 향해 더 이상 뛰지 않았을 것이다. 더 예쁘고 착한 여자가 내 눈에 들어왔을 것이다. 왜 날 사랑하지 않는 그다지 예쁘지도 착하지도 않은 여자 때문에 이렇게 가슴앓이를 했나 하는 후회와 자괴감도 비로소 들었을 것이다오빠 하며 콧소리를 내며 내 팔짱을 끼는 예쁘고 착한 다른 여자와 다른 길을 갔을 것이다. 그게 인간이다.




소녀는 교회와 기독 학생반과 찬양선교단 활동만 한 것이 아니었다. 안양 과천 지역 전체의 청소년 찬양 선교단체에서 활동하였다. 놀던 무대와 스케일 자체가 우리 보통 학생들과는 달랐다. 소녀는 교회음악 CCM과 교회 율동에 능했고, 크리스천 뮤지션 CCM 가수를 꿈꾸었다. 간단한 율동을 익혀 따라한 정도가 아니라, 본인이 직접 안무를 만들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필요한 곳에 안무를 전수해 주기도 했다.


꿈이 CCM 가수여서 레슨도 받았는데, 집에서 부모님들이 반대하셨던 것 같다. 학교에서 야간 자율학습을 하면서 쉬는 시간에 도시락을 미리 까먹고, 저녁식사 시간에 음악실을 빌려 연습을 했다. 어떤 날은 내가 교무실에 가서 음악실 열쇠를 받아다가 문을 열어 주고 잠가 주기도 했다. 음악실 뒤에 앉아서 말없이 기도해 주고 돌아가기도 했었다.


소나기가 오면 청소시간 땡땡이치고, 학교 앞 집에 달려가 우산을 가져다, 소녀의 여자 반 앞에 찾아가서 주고 돌아왔다.


작은 수첩 하나를 사서, 하루의 한 개씩 매일매일 1년 동안 소녀에게 편지 글을 썼다. 일기도 쓰고, 자작시도 쓰고, 그림도 그리고, 자작 소설도 썼다. 한 페이지에 작은 동화 하나를 썼는데 아직도 그 내용이 생생하다. 마귀할멈 왕비가 거울에게 세상에서 가장 예쁜 여자가 누구냐고 물었더니, 거울이 너무 순진해서 거짓말을 하지 못하고 세상에서 가장 예쁜 소녀이름과 신상을 대서, 마귀할멈이 화가 나서 거울이 다 깨졌다는 내용이었다. 볼펜뿐 아니라 색연필과 파스텔 등을 사용하여 매일매일 예쁜 편지 한 페이지 씩 적어 일 년 동안 한 권의 노트를 가득 채웠다. 생일날 주려고 1년에 걸쳐 쓴 노트는 결국 전달하지 못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학교에서 서울랜드 야영장으로 야영을 갔다. 텐트를 치고 캠핑을 했다. 5월이었지만 산이라 새벽에는 한 겨울처럼 추웠다. 학교에서는 매년 같은 곳으로 야영을 갔기 때문에 상황을 아시는 선생님께서는, 따뜻한 침낭이나 겨울 파카를 준비하라고 충고를 해 주셨지만, 대부분의 학생들은 선생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았다. 나를 위한 침낭 하나와, 소녀에게 빌려 주기 위한 두꺼운 겨울 파카 하나를 준비했다. 밤이 되어서 여자 텐트 중 소녀의 텐트로 빨갛고 두터운 겨울 파카를 가져다주었다. 소녀가 고맙다고 환한 미소를 지었지만, 소녀의 텐트 안에서는 다른 남자애들이 와서 놀고 있었다. 빨갛고 두터운 파카를 전해주고 돌아오는 길에, 왠지 모를 쓸쓸함이 밤하늘을 스쳐갔다. 다음 날 아침 소녀가 밤새 따뜻하게 입고 잤다며 고맙다고 빨간 겨울 파카를 돌려주었다. 소녀의 체온이 닿은 파카가 기분이 좋았다. 아침 식사할 때 여자 아이들과 친하게 지내는 인기 있는 남자아이들의 텐트에는 여자 아이들이 음식을 해서 가져다주었다. 맛있는 음식 냄새가 내게는 살짝 씁쓸하게 느껴졌다.


고3 수능을 마치고 졸업하기 전 생일 때, 소녀의 집 앞으로 선물을 가지고 갔다. 소녀의 삐삐로 집 앞에서 늦더라도 좋으니 기다리겠다고 했다. 소녀는 아마도 안양지역 찬양선교단 모임으로 외출했었던 것 같다. 나는 계속 기다렸고 소녀는 내가 기다리다 집에 갔겠지 하고 다른 길로 집으로 돌아갔다. 한 겨울 가운데서도 특별히 추운 날이었다. 반나절을 밖에서 기다리다가 다시 삐삐로 연락을 남겼다. 소녀가 집에서 내려와서 지금까지 기다릴 줄 몰랐다고 했다. 나는 선물만 주고 바로 집으로 돌아왔다. 카페에서  한 잔 같이 마실까, 분식점에서 떡볶이나 같이 먹을까, 하는 그런 주변머리도 없었다. 그냥 괜찮아하고 선물만 주고 돌아왔다. 아마 그때가 아마도 직접 만난 것은 거의 마지막이었을 것이다. 그 후에도 오래도록 소녀가 나의 마음에서 떠나지 않았고, 어쩌다 한 번씩 그리움을 견딜 수 없을 때 대답 없는 연락을 취한 적은 몇 번 있었다.




소녀는 평촌 학원가에서 재수를 했고, 나는 노량진 입시학원 일타강사 출신 목사님께서 운영하시는 기숙학원에 들어가 재수를 했다. 소녀를 마음에서 내려놓고 입시에 집중해야 했다. 그게 안 되면 학원에서 연애 금지였지만, 학원 여학생들 중 예쁘고 착하고 나를 좋아하는 여학생과 학원 선생님들 몰래 뒤에서 가볍게 사귀면서 재미나게 공부를 했어야 했다. 지금이라면 그게 될 텐데, 그때는 그게 안 되었다. 어느 순간 내 심장이 소녀를 향해 뛰게 된 것이지, 소녀의 이런 이런 점이 괜찮아하고 조건을 계산해 사랑에 빠지게 된 것은 아니었다. 세상의 모든 사랑이 그러한 것은 아니지만, 어떤 사람의 사랑은 그러하다. 어느 날 나도 모르게 소녀를 사랑했고, 날 사랑하지 않는 소녀에 대한 나의 마음을 어떻게 멈출 수 있는지 그 방법을 몰랐을 뿐이다. 어느 날 갑자기 내 안에서 사랑이 시작된 것이지, 내가 사랑의 시작을 결정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짝사랑을 어떻게 끝내는지 그 방법에 대해서도 몰랐다.


부모님 반대로 소녀가 본인이 간절히 하고 싶었던 CCM 가수의 꿈이 어려워졌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레슨비나 학원비라도 모아 주려고, 어머니께서 용돈 쓰라고 보내주신 크지 않은 돈을 모아 두었다가, 놋쇠 저금통에 하루에 몇 백 원에서 몇 천 원까지 넣었다. 쇠 저금통에 동전과 함께 작은 포스트잇에 매일매일 편지를 써서 집어넣었다. 그렇게 1년을 모아봤자 10만 원이 조금 넘는 작은 돈이었다. 한 달 레슨비도 안 되는 돈이었다. 재수를 하여 두 번째 수능이 끝난 후에 편지를 써서 그 당시 최신 CCM 앨범 카세트테이프 하나와 저금통과 함께 소녀 집 앞에 놓고 왔다. 소녀가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는 기억에 남지 않는다.


학원장 목사님은 일타강사 출신이었다고 하는데, 원장 목사님이 한창때 얼마나 유명했고 강사였는지는 모른다. 원장 목사님 절친이 유명한 학원 강사셨다. 서한샘이라고 '밑줄 짝'으로 유명했던 국어강사이자 학원장이셨던 분이 우리 원장 목사님 절친이셨다. 학원 행사 때마다 꼭 참석하셔서 축사를 해주셨다. 실제로 강의를 하시는 선생님 가운데 실력 있는 강사가 있던 학원은 아니었다. 매일 예배를 드리고 찬양과 기도와 말씀으로 마음을 정돈하고 하루의 공부를 시작하는 학원이었기 때문에, 독실한 기독교인 부모님이 재수하거나 학교를 중퇴한 학자녀들은 신앙생활하면서 열심히 공부하라고 보낸 학원이었다. 일단 재수학원에 입소한 것을 중간에 나오지 말고 수능 볼 때까지 거기서 있었어야 했다. 반년 공부하고 무단이탈하여 뛰쳐나와 기차 타고 멀리 여행을 갔다. 일종의 가출이었다. 부모님과 학원에 대한 불만에서 뛰쳐나온 것은 아니었다. 소녀에 대한 그리움을 이길 수 없었다. 학원을 뛰쳐나온 다고 소녀를 향한 특별한 길이 없는 것은 마찬가지였는데 말이다. 노량진 정진학원에 종합반을 한두 달 다니다가, 평촌 학원가의 독서실에서 혼자 공부했다. 순간순간 소녀 생각을 했지만, 공부를 놓지는 않았다. 소녀 생각에 영혼은 가출해 있었지만, 엉덩이를 의자에서 떼지 않았다.


재수를 하면서 소녀는 예체능 계열에서 인문 계열로 바꾸어 다른 전공으로 대학에 진학했다. 집안의 반대로 꿈을 접었는지, 아니면 꿈이 바뀌었는지는 모른다. 소녀는 같은 대학 같은 과에서 스트레이트로 학사-석사-박사를 하여 국내 박사가 되어 지금은 대학교수를 하고 있다. 더 이상 소녀의 소식이 들려올 만한데도 없고 관심도 없지만, 네이버에 짝사랑이었던 첫사랑의 이름과 그 친구가 교수로 근무하는 대학교의 이름을 연관검색어로 넣으면, 철 지난 근황이지만 검색이 된다.  




나는 재수를 하고 강원도 춘천 강원대학교 영어교육과에 입학했다. 대학교에 입학한 99년 3월에 소녀에게 전화를 했다. 부담스러워하는 것 같아서 연락은 하지 않겠지만, 널 사랑하고 있는 나의 마음을 기억해 달라고 말했다. 다음에 혹시 상황이 바뀌어 나에게 기회가 생기면 연락을 달라고 했고 알았다고 했다. 그 후 나는 과 생활과 학과 공부를 열심히 하기보다는, 우리 과와 상관없는 컴퓨터 학과 수업을 열심히 들었다. 주로 홈페이지를 만드는 수업에 열중했다. 어머니에게 컴퓨터 디자인을 공부하고 싶다고 돈을 타서, 디자인 학원에 가서 어도비 포토샵 일러스트레이터 등 컴퓨터 디자인 툴을 배웠지만, 실무가 가능할 정도의 웹디자인 실력에 이르지 못했다. 학교에서 타과의 교양으로 개설된 홈페이지 만드는 수업도 조잡한 홈페이지 하나 만들어 보는 수준이었지, 실제 회사나 공공기관의 웹 개발과 웹디자인을 할 수 있도록 설계된 실용적인 수업은 아니었다.


1년 동안 공부해서 내 마음을 고백하는 홈페이지를 만들어 크리스마스 때 홈페이지 주소와 패스워드를 보내 주었다. 홈페이지에는 어디에서 가져온 아낌없이 주는 나무와 어린 왕자의 일러스트 이미지를 올렸다. 소녀를 위한 아낌없이 주는 나무와 어린 왕자가 되고 싶다는 내용의 이야기를 썼다. 나는 소녀에게 언제까지나 너를 기다릴 것이니 나를 기억해 달라고 했었지만, 소녀는 내가 자신을 좋아했던 것도 잊은 채 잘 살고 있었다.


군입대를 앞두고 있었다. 군대 간다고 하면 소녀와 커피 한 잔 함께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커피를 마시며 딱 한 시간만 이야기를 나누면, 소녀에 대한 내 안에 그리움과 갈증이 해갈되어, 한동안은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 이유로 병무청에 자원입대를 신청하였다. 어찌 보면 소녀가 나를 만나주지 못하는 것은 당연했다.


조울증이 발병 이후 조울증이 조절될 때까지는, 때로는 원하지 않는 연락을 할 때도 있었고, 지나친 표현을 할 때도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계속 그런 것도 아니고, 내 관점에서는 쌓이고 싸였다가 터진 날 며칠 그러고 말았던 것인데, 그것이 상대방 입장에서는 곤란했을 수도 있다. 소녀에 대한 마음은 7년이 지나서야 다 정리가 되고 완전히 털어 버렸다. 만약에 조울증에 걸리지 않았더라면, 소녀를 향한 그리움도 그렇게 오래가지 않았을 것이다. 정상적인 상황이었더라면, 군대 다녀와서 이루어질 수 없는 이미 지나간 짝사랑을 잊고 새 삶을 살았을 것이다. 조울증이 감정을 지나치게 증폭시킨 측면이 있다고 생각한다. 




남자들은 평생 첫사랑을 잊지 못한다고 한다. 모든 것이 그렇지만 이 또한 케이스 바이 케이스이다. 7년 가까이 첫사랑이었던 소녀를 지독히 사랑했지만, 사귄 적도 없고 혼자 한 짝사랑이어서 그런지도 모른다. 내 마음속에서 타서 재가 될 때까지 그리워했기에 더 이상 한 터럭의 감정도 남아있지 않은지도 모른다. 여자 보는 눈과 이상형이 달라진 것인지도 모른다. 추억 속 첫사랑이자 짝사랑이었던 옛 소녀는 더 이상 내 이상형도 아니고, 소녀를 향하여 뛰던 심장도 오래전 멈추었다.


소녀를 향한 그리움이 떠나간 이후에도, 한동안은 소녀가 꿈에 가끔 한 번씩 찾아왔다. 무의식 깊숙이 남아 있어서 그랬었던 것 같다. 꿈속에서도 여전히 나는 소녀를 바라보고 있었으며, 소녀는 등을 돌리고 다른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미 미련은 떠나간 지 오래였던 때인데, 무의식 속 아주 깊은 곳에 남아 있었던 것 같다. 지금은 더 이상 첫사랑 소녀가 내 꿈에 나타나지 않은지 이미 오래다. 다른 여자도 내 꿈에 나타나지 않는다. 아내 에미마를 만나고 함께 사랑하고 살아가면서, 내 무의식 세계의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던 어두움들도 떠나가 버렸다. 첫사랑은 사랑을 처음 알게 된 그때 그 시절의 사랑일 뿐이다. 항상 지금 여기에 나와 함께하는 사랑이 끝사랑이고 가장 소중한 사랑이다. 지금 여기에 내 곁에 있는 사랑을 소중하게 가꾸며 살아가기를 원한다.


무의식이 의식을 지배한다고 하는 이론도 있던데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무의식은 내 의식 밑으로 가라앉아서 내 의식 속에서 사라져 가는 과거의 의식일 뿐이다. 현재 심리의 밑바닥에 가라앉은 과거의 의식인 무의식의 연장 선상에서 현재 의식이 시작되었을 테니 당연히 영향을 주었겠지만, 무의식은 과거의 의식이고 잊혀 가는 과거이다. 현재의 의식이 의식의 수면 밑으로 가라앉는 무의식을 덮어간다.


첫사랑 소녀의 이름과 교수로 있는 소속 대학을 네이버 녹색 창에 넣으면 최근의 근황을 알 수 있다. 어쩌다 옛 추억이 생각이 날 때면 그때 그 친구는 뭐하고 사나 검색을 해본다. 다시 만나고 싶거나, 스치고 싶은 것은 아니다. 여전히 자기 위치에서 빛나며 잘 살아가고 있는 것 같다. 내 눈이 높아서 멋진 여자니까 사랑했을 것이다. 과거의 엇갈렸던 인연을 미래에 어디에선가 우연히라도 다시 만나고 싶지는 않다. 단지 옛 친구가 어디에선가 잘 살아가기를 바란다.


소녀는 내 기억 속에서만 소녀이지, 더 이상 옛 소녀는 소녀가 아니요, 어디에선가 전혀 다른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다. 내 기억 속에서 내 추억 속에서 소녀인 것이다.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했던 나는, 소녀를 사랑하게 되었고, 상사병과 군대에서의 정신적 스트레스는 조울증이 되었고, 2030 청춘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사랑으로 모든 것을 잃었을 때, 사랑의 끝에서 마지막 사랑 아내 에미마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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