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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다함 Oct 13. 2020

첫사랑 그 이후

하나의 사랑이 지나 가면, 또 다른 사랑이 찾아온다

부모님이 귀농하셔 왕대추농장을 하시는 논산 시골집에서 ⓒ 최다함


첫사랑 7년 동안

여자 사람 친구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내가 사랑했던 여자들은 나를 사랑하지 않았지만
그 사이 절친하게 지냈던 여자 사람 친구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소녀를 향한 7년 간의 짝사랑이었던 첫사랑은 끝이 났다. 그 사이 다른 여자들에게 아무 관심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소녀를 향한 지독한 첫사랑을 하고 있는 중이었지만, 사귀지 못한 짝사랑이었고, 특정 대상이 아닌 누구라도 사랑할 단 한 명의 여자가 필요했었다.


같은 학과 같은 학번 동기 중에 7년 연상의 엄마 같은 누나가 있었다. 어떤 사연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교대를 다니다가인지 졸업하고인지 우리 과에 들어왔다. 보통 사범대 다니다가 교대를 가는 케이스는 있는데, 그 반대의 케이스를 본 것은 누나 한 명이었다. 나만 엄마처럼 큰 누나처럼 생각했던 것은 아니고, 다른 과 동기 모두 그렇게 생각했었다. 조울증 증상이 심할 때 대표적으로 보이는 증상이 이성에 대한 지나친 관심과 애정을 느끼게 되는 것인데, 그래서였는지 누나가 여자로 느껴져다. 잠깐 누나를 여자로 대했고, 누나는 그로 인해 잠시 힘들어했었다. 과 동기 선후배를 막론하고 전부 그 누나를 엄마처럼 좋아했는데, 내가 군대 가서 입학한 잘 모르던 후배 중 하나가 원망하고 미워했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나중에 누나에게 정중하게 사과하고, 예전처럼은 아니지만 가끔 안부를 주고받으며 누나 동생으로 지냈다. 누나는 강원도 어느 학교에서 영어교사를 하다가 지리산의 명상하는 절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마지막으로 들었는데, 지금은 어느 곳에서 무엇하며 지내는지 전혀 알 수가 없다. 방황으로 오랜 시간이 지난 후 대학교를 졸업할 즈음 까지도, 가끔 이메일을 보내면 답장이 오고 그렇게 안부를 주고받았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더 이상 이메일을 주고받지 않은지가 이미 오래되었다.


사귀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썸 타는 사이도 아니었지만, 자주 만나서 밥도 먹고 이야기도 하는 여자 사람 친구도 있었다. 그 친구는 79년 생이었고 나는 빠른 80년 생이었다. 1년 재수하고 입학해서 그 친구가 나보다 한 학번 위였다. 그 친구가 예수전도단이었는데, 나에게 전도를 하려다가 알게 되었는지 그 이후로 친구가 되었다. 그 친구는 간호학과 생이었는데, 목사님 딸이었고 정신과적으로 아픈 동생이 있어서, 목사님 아들이면서 조울증이었던 내게 연민과 돌봄의 마음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여자 친구 애인도 아니면서, 우리 어머니도 나 없이 만나 어머니와 좋은 시간도 보내고 했던 친구였다. 어머니는 그 친구를 며느리 감으로 마음에 들었었던 것 같다. 나를 그 친구에다가 가져다 대기에는 내가 나사가 몇 개 빠져 있던 시기였기는 했다. 내가 고등학교까지 독실한 기독교 환경에서 자라났기 때문에, 기독교 동아리에 들어가 뿌리를 박았어야 했고, CCC 말고 예수전도단에 들어갔어야 했다. 1학년 때는 기독교 선교단체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고 영자신문사와 테니스부에서 잠깐 활동했었다. 조울증으로 기 전역 후에 복학해서 2학년일 때는, 아버지께서 대학교 때 활동하셨던 CCC에 찾아가 대표간사님을 만나 나를 부탁하셔서 CCC 기숙사에서 살게 되었다. 선교단체 기숙사 생으로서 참여해야 했던 필수적인 모임 외에는, 내 생각에 빠져 있었지 열심히 CCC 활동을 하는 C 맨은 아니었다. 그 친구는 나에게 누나로 관계 설정을 하기를 원했고, 나는 그 친구와 야자 하기를 원해서, 기싸움 아닌 기싸움을 하기도 했다. 하루 이틀 정도인가 아주 잠깐 그 친구에게 설렘을 느낀 적이 있었는데, 그 친구에게는 결혼을 생각하는 남자 친구가 있었고, 우리가 절친이었고 형제자매 같은 가까운 사이였지만 남자 여자는 아니었다. 남자는 여자 사람 친구를 여자로 느낄 수 있지만, 여자는 한 번 남자 사람 친구이면 특별한 사건과 계기가 있지 않는 이상 계속 남자 사람 친구이기가 쉽다. 그 친구의 결혼식 날 가기로 그날 아침까지 생각을 했는데, 갑자기 가고 싶은 생각이 사라져서 가지 않았다. 그 이후 폰을 바꾸면서 연락처를 잃어버리고 더 이상 선이 닿지 않아, 지금은 어떻게 살고 있는지 모른다. 목사님이 된 남편과 아프리카 어느 나라로 선교사로 갔었고, 아이가 생겼다는 소식을 들은 지 오래다. 


장인 장모님께서 한국 결혼식 참여 차 한국에 방문하셨을 때 에버랜드에서 ⓒ 최다함


사랑이라는 이름의

무지개를 찾아 떠났던 인생여행


사랑은 결혼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지만
사랑에 끝이 있을 것이라는 상상을 할 수도 없었다.


나의 청춘은 사랑이라는 이름의 무지개를 찾아 떠난 인생여행이었다. 7년의 사랑이 끝나고 난 후에도 끊임없이 누군가를 사랑하고 좋아했다. 호감 가는 모든 여자가 운명 같은 사랑은 아니었다.  사랑을 찾아 떠난 여행 중 지나갔던 모든 마을들에 나의 심장을 훔쳐 갈 만한 여신들이 살았던 것은 아니었다. 수많은 여자들에게 한 번에 한 명씩 끊임없이 설렘을 느꼈지만, 아내 에미마를 제외하고 운명적인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었는 여자들은, 고 1 때 15살 때부터 아내를 만나기 전까지 23년 동안 5명이었다. 짝사랑이었지만 마지막 사랑 아내를 만나기 전, 운명적이었던 사랑의 숫자가 5명 정도가 된 다는 것은, 많다고 하면 많고 적다고 하면 적은 숫자이다. 나의 청춘 시절 누군가 사랑할 대상을 찾아, 끊임없이 누군가를 사랑했었다는 것을 가정하면, 마흔 즈음돼서야 아내를 만나기 전에 운명적으로 느껴졌던 이성이 5명 정도 있었다는 것은 많은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2018년 6월 아내와 카카오톡으로 사귀기 시작하여, 그해 9월 네팔 카트만두에서 처음 만나 약혼식을 하고, 그해 12월 다시 네팔에 가서 결혼식을 했다. 콩 볶는 속도로 우리의 사랑은 진행되었다. 아마 첫사랑이 잘 되었다면, 첫사랑이 마지막 사랑이 되었을 것이고, 두 번째 사랑이 잘 되었더라면 두 번째 사랑이 마지막 사랑이 되었을 것이다. 나는 사랑은 곧 결혼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아니지만, 누군가를 사랑하던 그 순간에는 그 사랑에 끝이라는 개념을 상상할 수 없었다. 사랑은 결혼이라는 주의도 아니었지만, 나의 사랑은 영원할 것만 같아 결혼이란 점을 찍고 둘 중 한 사람이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끝까지 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동생 부부와 함께 한 제주여행에서 ⓒ 최다함


아리따운꽃


서태지 매니아였던 아리따운꽃에게 서태지를 만나게 해주고 싶었다.


두 번째 짝사랑은 춘천 교대생이었다. 첫사랑이 끝이 나고 제정신을 차리고 잘 사고 있을 때 교회를 옮겼다. 춘천교대에 뒤에 쪽문이 있었는데, 그 뒤에 위치한 교회를 찾아갔다. 춘천교대생을 주 타깃으로 하여 사역을 한다고 소문난 교회에 갔다. 믿음으로 간 것이 아니라, 교대생 여자를 만나러 갔다. 그 교회에 가서 청년부 예배였던가 자기소개를 했는데, 여자 하나가 먼저 다가와 먼저 와서 나에게 인사를 하면서 "이름이 특별하시네요" 하는 것이었다. 내 눈에 예뻤다. 당시 내 눈에 주관적으로 예뻤다는 것이지, 지금 와서 객관적으로 회상해보면 못 생기지도 예쁘지도 않은 그냥 그런 비주얼이었다. 두 번째 사랑까지는 외모를 보지 않았고, 내면의 아름다움만 보았다. 


첫 번째 사랑의 코드네임이 소녀였다면, 두 번째 사랑의 코드네임은 아리따운꽃이었다. 다른 사람 앞에서 그렇게 불렀다는 것은 아니고, 내 마음속으로 혼자서 그렇게 불렀다는 것이다. 아리따운꽃은 대한민국의 오지 중 오지 출신이었다. 지자체에 횡단보도가 읍내에 딱 하나가 있었고, 롯데리아가 단 한 개도 없는, 그런 지자체 중에서도 읍내에서 한참 들어가야 있는 산골 마을 출신이다. 아리따운꽃의 아버지는 고추 농사를 지으셨던 것으로 알고 있다. 아리따운꽃은 딸 딸 딸 딸 아들 딸 딸의 6녀 1남 가운데, 다섯째인 오빠와 막내 여동생 사이에 여섯째로 태어난 우리 시대에 보기 드문 케이스였다. 초등학교 때 내일이 중간고사인데, 밭에서 소에게 풀을 먹여야 해서 서글퍼서 울었던 우리 아버지 세대나 가지고 있었던 경험을 한 친구다. 미술 음악 등 다방면에 관심과 재능이 많았다. 


특이사항 중 하나가 있었다면 서태지 매니아였다. 올해 암으로 세상을 떠나신 나의 큰 이모부의 절친의 아들이 서태지이다. 내 동생이 서태지 콘서트 초대권을 이모부를 통해 얻어서 다녀온 적도 있었다. 서태지 아버지가 나의 사촌 형인 큰 이모부의 아들 결혼식에 다녀 가실 만큼 가까운 큰 이모부의 절친이셨다. 아리따운꽃이 서태지의 매니아라서 서태지를 이성으로 만나고 싶어 한다면, 서태지와 아리따운꽃을 만나게 해주고 싶었다. 서태지가 톱 탤런트도 아닌 교대생에게 호감을 가질 리도 없고, 아리따운꽃이 서태지 매니아로서 서태지를 좋아하는 것이지 남자로 만나고 싶은 마음을 품었을 리도 없었을 텐데 말이다. 큰 이모부가 서태지 아버지의 절친이라고 내가 서태지와 호형호제하는 사이도 아니어서, 서태지를 만나서 아리따운꽃을 소개해 줄 위치도 아니고 말이다. 모든 것을 다 떠나서 그토록 사랑하는 여자가 서태지 매니아라고, 그녀에게 서태지를 만나게 해 준다는 발상 자체가 전형적인 바보 쪼다의 사고 구조이다. 


사랑하면 꽁무니 쫓아다니지 말고 옆에서 멋진 모습만 보여 주어 매력을 발산하여 상대로 하여금 사랑을 느끼게 하여 사귀던지, 왜 다른 남자를 만나게 해 줄 생각을 했는지 모른다. 너무 순수하고 낭만적인 나머지 현실성을 상실한 나의 당시 뇌구조도 문제였지만, 로맨스 영화와 문학들이 사랑의 대한 관념을 왜곡시킨 것도 없지는 않다. 영화나 드라마에서나 낭만적인 사랑을 현실에 그대로 대입을 하면 엉뚱한 결과값이 나오기도 한다.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사랑하지 않으면 나에게 사랑에 빠지도록 매력적인 모습을 보여주어 연인이 되던지, 나를 사랑할 마음이 있는 다른 사랄을 찾으면 된다. 모범답안은 사랑에 목매지 말고, 지신의 꿈을 쫒아 열심히 경주하며, 실력과 인성을 갖추면, 사랑은 자연히 따라온다.

 

아내 에미마를 만나기 전 나의 이상형 한효주 ⓒ 최다함


한효주


착하고 예쁜 미인들의 애로사항은
그녀들의 가슴을 콩닥콩닥 뛰게 하는 세상의 훈남들만
그녀들에게 사랑에 빠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거지 같은 세상의 모든 잡스러운 남자들도
그녀들에게 연정을 느껴 온갖 추파를 던지는 것이다. 


아리따운꽃을 향한 짝사랑은 그 유효기한이 3년이었다. 아리따운꽃도 딱 1년만 같은 교회 생활을 하였을뿐더러, 교회 예배를 드리는 주말에만 볼 수 있었고, 나머지 2년은 아리따운꽃이 졸업을 하여 집으로 돌아갔기 때문에 아예 볼 수가 없었다. 두 번째 사랑이었던 아리따운꽃을 향한 사랑이 채 끝나기 전에 세 번째 사랑이 겹쳐서 시작되었다. 세 번째 사랑은 올려다볼 수도 생각해 볼 수도 없는 그런 존재였다. 세 번째 사랑은 배우 한효주였다. 그때는 신인으로서 지금 정도 위상의 배우는 아니었지만, 그때도 내가 쳐다볼 수 있는 여자가 아니었다. 당시 내 사회적 위치가 한효주와 스타벅스에서 아메리카노 한 잔 하고 CGV에서 영화 한 편 함께 볼 수 있는 위치였다면 다리를 놓았을 것이다. 그렇게 사랑을 시작했을 것이다. 


나를 사랑하는 아내 에미마를 만나기 전, 나의 이상형은 배우 한효주였다. 에미마와 만난 후에는 한효주도 더 이상 내 눈에 보이지 않는다. 이제 내 인생에 유일한 여자는 에미마이다. 내가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작가가 되어 한효주가 내 책에 사인을 받고 싶어 내 사인회에 찾아온다면, 오빠 동생으로 지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잠깐 해 본 적이 있다. 에미마가 86년 생이고 한효주가 87년 생이라 같은 또래이니, 둘이 친구 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런 공상에 잠깐 빠져본 적이 있는데, 아내가 가장 친한 친구이자, 유일한 나의 여자 친구인데, 다른 친구가 필요할까?


세월이 지나감에 따라 친구들이 더 많아지지 않았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예전에 교류하던 친구들이 이런저런 이유로 다 떨어져 나가서 외로워졌다. 그래서 세월이 지나감에 따라, 새로운 인간관계들을 만들어 가고, 새로운 죽마고우들을 만들어 갈 수 있다면 인생이 더 풍요로워 질 것이라고 생각해 보기도 했다. 일리가 없는 논리는 아니다. 가장 친한 친구 아내 에미마가 생겼는데, 다른 친구들을 인위적으로 만들 필요가 있을까? 열심히 살다 보니 자연스럽게 다윗과 요나단과 같은 평생의 친구요 동지를 만나게 될 것이다. 인생에서 사랑은 가장 소중한 가치 가운데 하나이지만, 내 인생 멋지게 살다 보면 자연스럽게 따라온다. 멋지게 살아온 인생의 결과로 따라오는 그런 사랑을 해야지, 사랑을 쫒다 보면 그 사랑이 잘 풀리면 인생이 풀리고, 그 사랑이 꼬이면 인생 자체가 꼬일 수 있다.


공휴일이 껴서 우체국 택배를 보내지 못해 직접 왕대추를 논산에서 수원까지 배달하던 날 ⓒ 최다함


모든 사랑이 실패한 후

최고의 사랑 에미마를 만났다


수많은 사랑 중 하나에 성공했었더라면
사랑을 쫒다 꼬인 인생이 좀 더 일찍 풀렸겠지만
최고의 사랑 나의 아내 에미마를 만날 수 있었을까?


상사병과 조울증으로 방황을 하다가, 13년 반 만에 강원대학교 영어교육과를 졸업하였다. 이후 초등학교에서 영어회화 전문강사로 일하였다. 역사에는 가정이 없다 하지만, 개인의 역사도 마찬가지이지만, 굳이 가정을 해 본다면, 방황을 하지 않았고, 조기 전역한 대신 공부를 열심히 하여 일찍 졸업을 하고, 어학연수나 워킹홀리데이나 유학을 다녀왔더라면, 지금 나의 사랑 나의 아내 에미마를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누군가 다른 인연을 만나서 행복하게 살고 있을 수도 있겠지만, 지금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을 것이며, 에미마를 만나지는 못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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