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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다함 Oct 16. 2020

어느 사랑꾼의 사랑 에세이

10대 사랑지상주의자 소년은 40대 사랑꾼 아저씨가 되었다

약혼식 날 반지를 교환하며 ⓒ 최다함


사랑지상주의자는

사랑꾼이 되었다


아내 에미마와 사랑으로 행복하게 살고 있는 이야기와
에미마를 만나기 전 사랑이란 무지개를 찾아 떠났던 인생여행 이야기를
글과 책과 여러가지 양식의 콘텐츠로 나누고 싶다.


나는 자타가 공인하는 사랑꾼이다. 처음부터 사랑꾼은 아니었다. 부모님과 주변 환경의 DNA 대로 설계되어, 착하고 순수했던 10대 소년 시절과, 상사병과 조울증으로 방황했던 2030 청년시절에, 나는 사랑지상주의자였다. '이다'가 아니라 '였다'라는 것은, 과거에는 그랬으나 지금은 아니라는 것이다. 성장한 것일 수도 있고, 닳고 닳아 노회한 것일 수도 있고, 둘 다일 수도 있다. 어찌되었든 자타공인 사랑꾼으로 나의 아내 에미마와 사랑 가운데 행복하게 살고 있다.


작년 시월의 어느 날에, 연합뉴스 TV 작가로부터 연락이 왔다. 아내와 행복하게 사는 내 블로그를 재미있게 보았다며, 행복한 다문화 가정의 모습을 다루는 프로그램에 우리 부부를 촬영하고 싶다고 했다. 나는 네팔 아내 에미마와 국제결혼을 했다. 둘째 고모의 지인의 소개로 알게 되어 카카오톡으로 연애를 하다가, 2018년 12월 네팔 카트만두에서 결혼식을 했다. 그 후 아내의 비자 수속과 대학원 논문 통과를 하기 위해 네팔에서 신혼생활을 하다가 작년 5월 함께 한국에 왔다. 네팔 장인어른 장모님을 한국에 초대하여, 한국의 지인들을 모시고 수원에서 6월에 결혼식을 한번 더 했다. 장인어른과 장모님 한국 여행시켜 드리고 보내 드린 후에, 우리는 주말에는 수원에서 쉬고 주중에는 논산의 시골집에서 아버지 어머니와 함께 왕대추 농사를 지었다. 아내와 함께 왕대추 농사를 지으며 한가할 때, 그동안 몇 번이나 시도했다가 갈아엎고 잠수 타다가 다시 시작하기를 반복하던 블로그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시작했다.




네팔에서 아내와 신혼생활을 할 때 ⓒ 최다함


다함스토리


다함스토리 DAHAM STORY는
나의 삶이 작은 역사가 되기를 바라며 만든
나의 퍼스널 브랜드이다.


온라인에서 내가 쓰는 거의 모든 계정의 아이디는 dahamstory이다. 나의 블로그 이름은 <DAHAM STORY>이다. 내 꿈은 글을 써서 책을 내고 유튜브 영상을 제작하는 직업으로서의 작가로 사는 것이다. 첫 번째 책의 이름으로 지어 놓은 것 또한 《다함스토리》이다. 작가로서 살기 위해 1인 출판사를 만들어, 사장을 해야하나 까지 신중히 고민을 했었다. 그 회사의 이름으로 정해둔 것 또한 다함스토리이다. 


처음 나의 유튜브 이름이 <DAHAM STORY>였는데, 아내도 함께 하게 되면서 <JEMIMAH & DAHAM>로 유튜브 이름을 바꾸었다. 아내와 저의 유튜브를 분리하기보다는, 아내와 나의 커플 유튜브는 <JEMIMAH & DAHAM>으로 계속 가고, 1인 출판사 또는 작가 최다함의 유튜브로서 <DAHAM STORY>라는 이름으로 새 채널 하나를 더 만들어 놓았다. <DAHAM STORY 다함스토리>는 나의 개인 브랜드이다.


역사의 영어단어는 history이니다. 어느 목사님의 설교예화에서 역사를 뜻하는 영어단어 history의 어원이 his와 story의 합성어로서, 그의 이야기 곧 예수님의 이야기라는 말씀하신 것을 들은 적이 있다. 기독교인으로서 은혜로운 설교예화이기는 하나, 어원적으로 학문적으로 근거 없는 이야기이다. history는 두 어근의 합성어가 아니다. '조사, 탐구, 관찰' 등의 뜻을 가지는 그리스어 historia에서 온 단일어이다. 내가 살아가는 동안에 <DAHAM STORY>라는 역사를 쓰고 싶었다. 역사에 흔적을 남기는 삶을 살고 싶었다. <DAHAM STORY>라는 아이디를 만들 때 그런 생각을 했었다. 내 이름이 좋아서 내 이름을 개인 브랜드화하고 싶었는데, 최다함이란 동명이인들이 의외로 몇 명 있었다. choidaham이나 daham으로 되어 있는 계정들은 이미 선점이 되어 있다. 다함이란 이름을 쓰는 회사들도 다함컴퍼니 다함텍 다함넷 카페다함 등등 여럿 있다. dahamstory는 아직까지는 오직 나 혼자만이 쓰는 브랜드이다.




왕대추농장 비닐하우스 만들 기 전 땅을 비옥하게 만들기 위해 비료를 주는 중 ⓒ 최다함


최다함 인생사


어제 슬펐던 삶이 오늘과 내일도 슬픈 것은 아니다. 
버티고 버티고 버티면 좋은 날이 오기도 한다.


나의 이름은 최다함이다. 다윗과 아브라함, 최선을 다하라, 네 마음과 정성을 다하라여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라, 라는 3가지 뜻으로 어머니 아버지께서 지어 주셨다. 고등학교 때 교회에서는 주일학교 중고등부 회장을 했고, 학교에서는 기독교 동아리 부회장을 했다. 담임 선생님과 친구들은 내가 장래에 목사가 될 줄 알았다. 당시 나의 꿈은 목사님이 되는 것은 아니었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었다. 그 방법적 측면에서 목사님이 될 수도, 선생님이 될 수도, 사업가가 될 수도, 정치가가 될 수도 있었다고 생각했다. 꿈이라고 하기는 그렇지만 간절한 소망이 있었다면, 하나님의 대학이라고 불리던 포항의 한동대학교에 가고 싶었다. 한동대는 입학 때 전공을 정하지 않고, 문이과만 나누어 입학한 후에 1학년을 마친 후에 과를 정했는데, 일단 한동대에 간 후에 구체적인 꿈을 정하기로 했다.


나는 재수를 하고 강원대 영어교육과에 갔다. 고3 때 한동대에 떨어지고 총신대 영어교육과에 합격했었는데 안 갔다. 그때 총신대에 갔었더라면, 아마도 영어교육과 졸업하고 같은 대학 신학대학원에 가서 중고등학교 때 다니던 안양 호계동의 중대형 교회에서 전도사와 부목사를 했었을지도 모르고, 같은 학과나 교회 대학부에서 인연을 만나 옛사랑을 잊고 새로운 사랑을 시작해 일찍 결혼을 했을지도 모르고, 기독교 사립학교에서 영어교사를 하면서 교목을 했을 수도 있을지도 모르고, 외국으로 유학을 가서 기독교교육학이나 기독교상담학으로 신학박사가 되어 신학과 교수를 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만약 그랬더라면, 나의 사랑 나의 아내 에미마를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강원대 영어교육과를 졸업하고, 초등학교에서 영어 선생님을 했. 아파서 쉬게 되었고 경력이 단절되었다. 그 이후 동생 실용음악연습실 사업장 일을 도와주었다. 초등학교에서 교장 선생님으로 정년퇴직하신 아버지와 함께 400시간 이상 귀농교육을 받으러 다녔고, 아버지와 논산 시골집에서 왕대추 농장을 했다.




연합뉴스 TV ⓒ 최다함


에미마를 만나

사랑과 행복을 얻었다


에미마를 만나 사랑 가운데 행복하다.
그러나 아직까지 직업 같은 특별한 직업이 없으니 많이 아주 많이 불편하다.
우리에게는 사랑과 행복 뿐 아니라 직업도 필요하다.


어느 날 내 인생에서 사랑을 내려놓았다. 꼭 사랑해야 하나, 꼭 결혼해야 하나 생각했다. 사랑지상주의자였던 나는 사랑에 대한 환상을 버렸다. 인생 뭐 있어 하루하루 밥 먹고 숨 쉬며 사는 거지 하고 생각했었다. 예수께서 인간을 사랑하셔서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 사랑으로 내가 사랑했던 여자들을 사랑하고 싶었다. 내가 사랑하는 여자들은 나를 사랑하지 않았다. 이현세 만화 공포의 외인구단에서 까치 오혜성이 자신의 인생이 파멸하기까지 엄지를 사랑하는 그러한 사랑으로 내가 사랑했던 여자들을 사랑하고 싶었다. 내가 사랑했던 여자들은 나를 사랑하지 않았다.


나는 사랑을 포기했는데, 어머니 아버지는 나의 결혼을 포기하지 않으셨다. 신앙이 좋고 사랑이 많은 여자를 만나면 내가 건강해지고 행복해질 것이라고 믿으셨다. 언젠가부터 어머니 아버지는 한국 여자들은 콧대가 높아 좋지 않다고 생각하셨고, 네팔 여자를 놓고 기도 하셨다. 네팔에서 비지니스와 봉사활동을 하시는 둘째 고모의 친구 분을 통해서 네팔 아내 에미마를 소개받게 되었다. 에미마는 둘째 고모의 친구 분을 17살 때부터 친어머니처럼 생각하고 지냈다. 에미마는 그분을  auntie 이모라 부른다. 그렇게 하여 우리는 카카오톡으로 연애를 하기 시작했고, 2018년 9월 처음 만나 양가 부모님을 모시고 약혼식을 하고 2박 3일로 히말라야 안나푸르나가 있는 포카라로 약혼여행을 다녀오고, 그해 12월 네팔에서 결혼을 했고 이듬해 6월 수원에서 지인들을 모시고 한국 결혼식을 한번 더 했다.


우리는 주중에 부모님과 논산의 왕대추 농장에서 농사를 짓고, 주말에는 수원 집에서 지냈다. 농사를 지으면서 우리가 사랑하며 사는 모습을 매일매일 블로그에 쓰기 시작했. 작년 2019년 8월부터 새롭게 블로그를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했는데, 2개월 만에 연합뉴스 TV 작가에게서 연락이 왔다. 다문화 가정이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방송하는 연중기획 하모니라는 프로그램이 있는데 우리 부부를 촬영하고 싶다고 했다. 그렇게 해서 방송 출연을 하게 되었고, 나름 유명인사가 되었다. 연합뉴스 TV 토요일 아침 프로그램을 누가 보나 싶었는데, 우리가 카카오톡으로 유튜브 링크를 보내드린 분 말고도, 우리가 미리 알려 드리지 않았는데도 방송을 통하여 우리를 보고 연락을 주신 분들이 있었다.




전주 한옥마을에서 ⓒ 최다함


국비지원 직업훈련을

받게 된 이유


처음 국비지원 직업훈련을 받은 이유는, 취업을 하고 싶어서는 아니었다.
글과 책을 쓸 시간과 여유를 확보하여, 직업으로서 작가가 되고 싶었다. 
직업훈련을 받으면서, 작가로서 살기 위해서 취업하여 직장인이 되고 싶었다. 
직업훈련 후 구직활동을 하면서, 취업불가의 현실을 깨달았고, 
1인 출판사 창업을 검토하면서, 창업불가라는 현실을 깨달았다.
취업불가와 창업불가의 현실을 깨달았을 때,
나는 글과 책을 쓰며 사진과 영상을 찍고 편집하고 있었다.
지금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직업으로서 작가가 되기 위해 모든 힘을 다하고 있다.


2020년이 되면서 아버지 따라서 논산의 왕대추 농장 다니는 것을 그만두고, 수원고용센터에서 취업성공 패키지 구직활동을 시작하였다. 왕대추 농장을 하면서 글도 쓰고 하는 생활에는 크게 불만이 없었다. 그런데 아버지께서 제 미래를 위해서 농장을 확장시키시려는 꿈을 꾸시고 구상을 하시는 것이었다. 나는 반귀촌 반귀농으로서, 농사지으면서 요양을 하는 것이지, 그것을 직업으로서 감당할 마음과 능력이 되지 않았다. 아버지께서는 나를 위해서 농장을 시작하신 것이지만, 나는 은퇴하신 아버지 말벗이 되어 드리며 농장 일 도와 드리며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이 좋았을 뿐이었다. 


처음 수원고용센터를 찾고, 취업성공 패키지에 참여하게 된 동기는, 취업에 성공해 보려는 의도가 아니었고, 일단 최대 1년 정도 고용센터를 통해 구직활동을 하고 있으면서, 글과 책을 쓰며 유튜브를 해서 직업으로서의 작가가 될 수 있는 시간을 벌려는 의도였다도움이 될 만한 직업교육과정을 찾았다. 그렇게 해서 출판 편집디자이너 (전자출판&e-book) 양성과정에 참여하게 되었다. 내가 배운 기술을 가지고 1인 출판사를 만들어서 내 책과 다른 사람들의 책을 만드는 일들을 해볼까 생각을 해보았다. 출판사 사장이 되고 싶어서가 아니라, 평생 작가로서 살고 싶어서, 내 책을 찍어내는 1인 출판사를 만든 김에, 다른 사람들의 책도 찍어 주자는 생각에 이르게 된 것이었다. 먼저 출판편집 회사에 직원으로 취업을 해서, 3년 정도 출판편집 필드에서 일을 배울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그게 여의치 않아서, 바로 1인 출판사를 창업까지 생각을 했었다. 1인 출판사 창업의 여부를 떠나서, 첫 번째 책은 제8회 브런치북 출판 프로젝트를 통하여 출간하기로 오래 전부터 생각해 왔었다.

 

오전 10시부터 저녁 6시 50분까지 하루 8시간 동안 강남역 학원에서 출판 편집디자인을 공부했다. 아침에 7시에 일어나서 갈 때 2시간 올 때 2시간 정도 전철을 타고 학원에 다녔다. 학원을 오가는 길에는 주로 블로그를 하거나, 유튜브를 편집하고, e-book으로 제가 배우는 것들에 대하여 모자란 부분에 대하여 공부하였다. 밤 9시 즈음되서야 집에 돌아왔는데, 늦게 밥을 먹고 나서는 유튜브 촬영과 편집을 했다.


아내 에미마와 결혼한 나는, 이제 내가 가진 기술과 능력을 가지고, 제대로 된 직업을 가지고 살고 싶었다. 작은 1인 출판사를 만들어, 디자이너 에디터 등은 나 혼자 하고, 앱 개발자 한 명 두고, 차와 밥과 간식을 먹으며 일 할 수 있는 북카페를 만들어 사무실로 쓰면서, 아내 에미마가 북카페를 운영하면 어떠할까도 생각해 보았다. 카페를 유튜브 방송을 하기 적합한 스튜디오 겸 공유 오피스 겸 카페로 인테리어 해서, 그 공간에서 내 책과 다른 사람들의 책을 만들어 주는 것은 어떨까 하고 말이다. 일단 집에 1인 출판사 사업자등록을 해놓고, 노트북 하나 가지고 내 책과 다른 가까운 사람들의 책을 내주는 것부터 시작하자는 생각을 했다.


브런치 블로그 유튜브를 기반으로 작가로 살기 위해, 디자이너로 취업하거나 프리랜서 디자이너가 되어야 하나, 1인 출판사를 설립해야 하나도  검토해 보았다. 어도비 포토샵, 일러스트레이터, 인디자인, 프리미어를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도록 실력을 키워서, 이를 프리랜서로 하면서 작가 활동을 해야 하나도 생각해 보았다. 브런치와 블로그로 글과 책으로 발행하고, 유튜브를 하는, 작가로서 살아가기 위해서, 취업이나 프리랜서나 창업을 생각해 보았다. 작가로서 살기 위해 현실적인 평생직장을 가질 수 있다면 좋은데, 디테일하게 고민하고 실제로 도전을 해 보인, 디자이너로 취업을 하거나 프리랜서로 일하거나, 1인 출판사를 하는 것이, 적어도 나에게 불가능한 한실이었다. 이력서와 포트폴리오를 뿌려도 1차 면접 보라고 오는데가 없고, 나에게 디자인으로 프리랜서로 맡길 고객도 없고, 내 집에 사업자등록 하여 1인 출판사를 무자본 무범포로 창업한다 해도, 책 한 권 찍어 내서 유통하고 마케팅하고 판매할 돈이 없는 것이다. 다른 창업비용에 비교할 때 소자본 중 소자본이라고 말할 수도 있으나, 나는 그만한 자본도 없는 무자본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불가능 하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내가 무엇인가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하고 있는 것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글과 책을 쓰고 있었고, 사진과 영상을 찍어서 콘텐츠를 제작하고 있었다. 어차피 조울증 때문에 평생 백수였다면, 내가 아무리 노력을 해도 어차피 당분간 백수탈출이 어렵다면, 동생과 부모님의 일을 도우면서 생산적인 일을 하더라도 어차피 용돈 타서 쓰는 상황은 마찬가지라면, 직업으로서의 작가의 길을 가기로 했다. 글을 써서 책으로 출간하고 시진을 찍고 유튜브 영상을 제작하여, 그 책과 콘텐츠를 들고 이런저런 활동을 하는, 직업으로서 작가로 살기로 최종 결정했다.


다함스토리는 계속 진행되고 있다. 지난 삶 동안 자갈길만 걸었던 나의 앞길은 꽃길만 걸었으면 좋겠다. 앞으로의 나의 작가로서의 행보가, 나와 에미마와 다른 이웃들에게 빛이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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