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 보자!
지금 나는 QCY T5 블루투스 이어폰을 끼고, 네이버 VIBE 앱으로 장범준의 <흔들리는 꽃들 속에서 네 샴푸 향이 느껴진 거야>를 들으며, 삼성 노트북 갤럭시북 FLEX 앞에 앉아, 네이버 웨일 브라우저를 열어서, 카카오 브런치에 오늘 내가 목표한 분량의 글쓰기를 하고 있다.
사랑스러운 아내 에미마는 왜 자기가 같이 곁에 있는데 블루투스 이어폰을 끼고 음악을 듣느냐고 투정을 부린다. 나는 K-POP을 듣는데, 아내 에미마는 크리스천 뮤직 CCM을 듣는다. 내가 K-POP을 들으면, 아내와 어머니는 크리스천 뮤직 워십송 CCM을 듣자고 한다. 나 또한 대학 입학하기 전 청소년 시절 까지만 해도, 크리스천 교회음악과 클래식 음악과 동요만 들었다. 어머니께서 그렇게 교육을 시키신 것도 있지만, 독실한 크리스천 집안에서 나는 자동적으로 경건하게 복음주의적으로 코딩이 되었던 것이다. 내가 청소년 시기까지 스스로 노력해서 믿음이 좋았던 것이 아니라, 특수한 가정환경에서 그렇게 프로그래밍되었던 것이다. 거의 대다수의 많은 경우에, 기독교 가정에서 자라난 사람은 크리스천이 되고, 이슬람교 가정에서 자라난 사람은 이슬람교도가 되고, 불교 가정에서 태어난 사람은 불자가 된다.
내가 크리스천 뮤직 교회음악 CCM 대신 K-POP 대중가요를 듣기 시작한 것은 대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이다. 빠른 80년인 나는 1년 재수를 하고 춘천의 강원대학교 영어교육과에 입학했는데, 그때는 부부교사셨고 경제적 여유도 있고 연세도 한창이셨을 나이였다. 내가 추가 입학을 했기 때문에 기숙사에는 들어가지 못했고, 부모님께서 직접 춘천 학과 앞에 햇살이 잘 들어오는 신축 빌라를 전세로 얻어주셨다. 지금 새로 짓는 원룸들은 대부분 풀옵션이지만, 그때만 해도 풀옵션은 아니었지만 그 당시 신축빌라였던 그 원룸은 거의 최고의 학생 자취용 주거시설이었다. 아직 조울증이 발병하기 전이었지만, 나는 학업이나 학과 생활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겉돌았다. 내 전공학과 공부보다, 컴퓨터학과 교양수업을 수강 신청하여, 홈페이지 만드는데 미쳐 있었다. 물론, 교양수업이라 깊이가 없어서, 프로페셔널한 웹디자인이나 웹 프로그래밍을 배운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그냥, HTML과 나모 웹에디터를 사용하여 조잡하게 취미 삼아 홈페이지 만드는 정도였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그 당시에는 학교 전산실에서 교육 실습 목적으로 모든 교직원과 학생 등 학교 구성원에서 학교 서버의 공간을 할당해 주었다. 학교 서버 리눅스에 접속해서 까만 화면에 흰 글씨의 옛날 도스 화면 같은 창에 직접 명령어를 쳐서 작업을 했다. 서버의 내 공간에 제로보드나 이지보드 같은 게시판 프로그램을 깔고, 그것을 이용하여 웹페이지를 구성하였다. 그 실력 가지고 홈페이지를 만들 수 없었다. 어머니에게 학원비 타서 학원에 가서 웹디자인을 공부했는데, 아직 조울증이 발생하지는 않았지만 그 당시 이미 인생의 방황을 시작했었을 때라서, 얼마 못 다니고 그만두었다. 1학년 때 학교 수업보다 홈페이지 만들기에 미쳐 있었던 것은, IT 분야에 관심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단지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짝사랑했던 소녀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홈페이지를 만들어 군대 가기 전 크리스마스에 크리스마스 선물로 주려고 홈페이지 제작 공부를 했다. 내가 군대에 한 박자 일찍 자원입대한 것은 순전히 내가 군대 간다고 하면 나의 첫사랑인 소녀가 나를 만나 주어 커피 한잔 같이 마실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고등학교 졸업 이후에 단 한 번도 만나지 못했고, 한두 차례 전화통화만 했었던 나는, 미치도록 소녀가 보고 싶었다. 그래서 군대 간다고 하면 소녀와 카페에서 차나 한잔 마실 수 있을까 하고, 병무청에 자원입대 신청을 했다.
뭔 말을 하려고 이렇게 주제와 상관없는 불필요한 사족들을 장황하게 썼는가 하면, 이런 이런 이유로 수업도 안 가고 자취 방과 거리에서 내 생각에 빠져 있었다는 것이다. 자취방에서 나는 교회음악 CCM 대신에 K-POP 대중음악을 듣기 시작했다. 김광석, 유재하, 이문세, 토이(유희열), 이소라, 김광민(피아니스트), 노영심(피아니스트), 이승철, 신승훈, 봄 여름 가을 겨울, 빛과 소금, 시인과 촌장, 윤도현 밴드 등의 음악을 들었다. 서태지 조용필은 그분들의 음악성은 인정했지만, 내 취향에 맞지 않아서 그다지 관심을 갖지는 않았다. 김태희 전지현 수지 등이 한국을 대표하는 미인이지만, 아주 예쁜 미인이지만 앞에 그들보다는 조금 미인이 아닌 한효주가 내 이상형이고 내 개인 취향이었던 것처럼 말이다. 나는 그런 음악을 좋아했다.
학과 생활을 잘하지 못하고 겉돌았던 나이여서, 학과 동기들과 많은 시간을 함께 하지는 못했지만, 우리 과가 워낙 작은 과라서, 휴학을 하거나 자퇴하여 재수 준비를 하거나 하지 않는 이상, 과 동기들끼리 함께 모여 술 마시고 안주 먹으면서 노는 시간이 자주 있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춘천 자취집에서 열심히 공부하고 신앙생활 열심히 하라고 전셋집을 얻어 주신 것인데, 그런 자취방에 과 동기들이 때때로 찾아와 음악도 같이 듣고, 술도 마시고, 놀고 그랬다. 내가 방황하지 않고, 상사병과 군대에서의 스트레스로 군대에서 조울증에 걸리지 않았더라면, 그 시절이 내 인생에서 가장 즐겁고 찬란한 시기가 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동기들은 대부분 기숙사에 들어가서 살았기 때문에, 또한 내 자취방이 영어교육과 건물 코 앞이라 제일 가깝고, 또 원룸 안에 화장실이 들어 있고, 세탁기와 소형 냉장고와 침대와 책상까지 가져다 놓은 중산층이 살 수 있을만한 나름 럭셔리 룸이라서 동기들이 집에 가끔 놀러 왔다. 지금 돌아보면 대학교 입학해서 고2 때 첫사랑 짝사랑을 잊어버리고 떨쳐 버리고, 과에서 동기나 선배 중에서 예쁘고 착한 여자 중에 나를 사랑하는 여자를 찍어 사귀었어야 한다. 자취 방도 있겠다 자취방에서 애인과 청춘을 함께 했어야 했다. 연인과 함께 미래를 향해 서로를 격려하며 함께 도서관 다니며, 같은 수업 듣고, 함께 열심히 공부했어야 했다.
동기들이 우리 집에 놀러 온 어느 날, 우리는 카세트테이프로 음악을 들었다. 그때는 CD나 음원을 사용하기 이전이어서, 카세트테이프로 음악을 듣던 시절이었다. 아직도 기억에 남는 하루가 있는데, 그때 나는 류시원 명세빈 주연의 KBS 드라마 <종이학>의 OST 카세트테이프를 사서, 테이프가 늘어질 때까지 들었다. 테이프가 늘어질 때까지 같은 노래에 심취해 있으니 동기들이 나를 징하다고 생각했었을지도 모른다. 뭐 하나 꽂히면 계속 그것만 한다. 의지는 없지만 어떤 것에 대하여 중독성을 가지고 있다. 모든 중독이 나쁜 것 또한 아니다. 좋은 것에 중도 되면 좋은 것이다. 또한 어떤 중독이든 그 중독으로 인하여 이웃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면서, 돈을 벌거나 생산적인 역할을 하면 그것은 좋은 중독인 것이다.
오늘도 오전에 왕대추를 따서, 오후에 분류하여 박스에 포장하여, 우체국 택배로 오늘의 물량을 배송하였다. 얼마 전까지는 아내와 어머니가 부탁을 해도, 청소기와 걸레질을 하는 것을 안 했다. 설거지와 음식물 쓰레기 버리는 것은 기꺼이 하겠는데, 청소기와 걸레질까지는 싫어했다. 그러나 오늘은 아내의 행복과 복지를 위해서, 말하지 않아도 내가 척척 청소기를 돌리고, 막대 걸레질을 했다. 내가 아내에게 잘하면 아내는 나를 자상한 남편이라고 부르고, 자상한 남편보다 더 잘하면, 최고 남편이라고 부른다. 요즘 나는 아내 에미마에게 최고 남편이다. 우리는 이렇게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면 살고 있다. 지금은 사랑 하나로만 살고 있지만, 나는 돈과 명예와 소셜 파워를 얻을 것이다. 사랑이 충만하고 행복한 착한 사람에서, 위대하고 훌륭하고 강한 남자로 진화하고 있는 중이다.
우체국 택배를 발송하고, 오늘은 집에서 차로 가까운 거리의 중국집에서 외식을 했다. 나와 아버지는 백짬뽕을 먹고, 어머니께서는 짜장면을 드시고, 한국 사람보다 더 매운 것을 좋아하고 잘 먹는 에미마는 해물 짬뽕을 먹었다. 가까운 강경에서 젓갈축제가 있어 갈까 하다가, 코로나 때문에 온라인으로 한다고 하여, 아쉬움이 남았다. 오늘로서 왕대추 수확 일은 마쳤다. 내일 전주 한옥마을로 가족여행을 갔다가, 수원 집으로 올라간다. 아내는 어머니 아버지 힘들다고 수확이 끝날 때까지 논산에 있자고 하지만, 이제 부모님 두 분이서 따도 충분할 만큼 이미 땄고, 아버지도 며칠 전에 먼저 이제 어느 정도 수확이 끝나면 올라가 우리 일을 해도 된다고 언질을 주셨고, 내가 수원에 가서 앞으로의 내 인생을 살아야 하기 때문에 올라가야 한다고 아내를 설득했다. 내 일도 일이지만, 내 일을 잠시 미룬다고 하더라도, 아내를 쉬게 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일이 정리가 된 지금 수원으로 귀환할 때가 되었다.
내일 토요일은 아버지 어머니와 함께 전주 한옥마을에 간다. 다음 주 월요일에는 아내와 서울역에서 KTX를 타고 강릉에 가서, 안목 해면 강릉 카페거리에 위치한 로스팅 카페에서 창문 밖에 동해 바닷가를 보며, 커피 한잔씩을 마시고 돌아오고 싶다. 다음 주 수요일에는 아내와 내가 13년 반 동안 다니던 강원대학교가 있는 춘천에 가서, 졸업 후 춘천에서 살고 있는 동균이와 닭갈비를 먹기로 했다. 월요일과 수요일 사이 화요일에는 일을 하고 싶어 하는 아내 에미마를 데리고 수원고용센터에 가서, 취업성공 패키지 국비지원 직업교육을 할 수 있는지 상담해보기로 했다. 내일부터 다음 주 수요일까지는 휴식의 시간을 가지고, 그 후에 나의 첫 번째 책을 쓰는데 총력을 다하여 반드시 베스트셀러를 만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