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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다함 May 25. 2021

꿈과 꿈너머꿈이 현실이 되는 날까지 나는 오늘을 버틴다

브런치에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은 2020년 10월 5일 브런치 작가 승인 메일을 받고부터였다. 첫 브런치 작가 탈락 이메일을 받은 날짜가 12월 3일이니, 그 이전부터 브런치 작가가 되기를 소망하며 준비하고 있었을 것이다. 브런치 작가 신청을 한 후, 브런치에서 "브런치 작가 신청 결과 안내드립니다."라는 제목의 이메일이 오면 Bad News이고, "브런치 작가가 되신 것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라는 제목의 이메일이 오면 Good News이다.


브런치에 글을 쓰기 전에는 네이버 블로그에 글을 써 왔다. 그 전에도 수도 없이 블로그에 글을 쓰고 지웠지만, 현재 내 블로그의 최초의 글은 2019년 8월 23일로 되어 있다. 그 시점부터 지금 나의 글쓰기가 시작된 것이다. 2019년 8월부터 시작된 블로그 글쓰기와 2020년 10월부터 시작된 브런치 글쓰기는 나의 글쓰기 인생에서 연장 선상에 있는 글쓰기이다. 취미나 내 자아표현을 위한 글쓰기는 아니었다. 글 쓰고 책 내고 유튜브 하고 강연 다니고 TV 방송 출연하고 직업으로서의 작가가 되기 위한 목적의 글쓰기를 실제로 실행에 옮긴 글쓰기였다.


직업으로서 작가의 꿈을 가지게 된 것은 그보다 더 오래전 일이다.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로서의 꿈을 품고 끊임없이 글쓰기를 시도해 보았지만, 실제로 꾸준하게 지속적으로 글쓰기를 실행에 옮긴 것은 2019년 8월에 시작된 블로그 글쓰기였고, 브런치 작가 승인을 받은 2020년 10월부터는 브런치 글쓰기로 이어졌다. 지금도 브런치와 함께 블로그에도 글을 쓰지만, 블로그 글쓰기의 주제와 목적 빈도가 달라졌다.


2015년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의 꿈을 꾸게 된 인생의 전환점 터닝포인트 점 하나가 있었다. 그렇다고 그때 시작된 꿈을 이루기 위한 실천적인 글쓰기를 2019년 8월 어느 날 갑자기 시작한 것은 아니다.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기 위한 글쓰기 방법론으로 수많은 고민이 있었다. 일단 어떤 방식으로든 글쓰기를 시작하면 되는데, 나는 어떤 방식으로 글쓰기를 하겠다는 청사진이 보이지 않으면 글을 쓰지 못하는 스타일이었다. 글을 쓰기 시작하면 그 방법론을 저절로 열리는 것인데 말이다.


내가 선택한 방법은 이러이러하다. 원고지나 워드 문서에 원고를 쓰는 게 아니다. 디지털 플랫폼에 글을 쓰는 것이다. 내가 글쓰기 책 쓰기를 위해 선택한 디지털 플랫폼은 블로그와 브런치다. 블로그는 글쓰기를 위한 디지털 플랫폼이고, 브런치는 책 쓰기를 위한 디지털 플랫폼이다. 블로그 브런치 등 디지털 글쓰기 플랫폼에 글을 쓰고, 이를 가공하여 책을 내고 유튜브를 하고 강연 다니고 TV 출연하여,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고 싶었다.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고 싶은 것은 작가로서의 나를 과대평가하는 것은 아니다. 아주 현실적이고 경제적인 이유이다. 도서시장의 침체로 국내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기도 어려울뿐더러, 되어도 작가 활동을 직업으로 평생 살아가기 힘들다. 세계 각국의 언어로 번역이 되어 세계 도서시장에 팔리는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품을 써서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는 것이 아니라, 세계 각국의 언어로 번역이 되어 글로벌 도서시장에 팔리고, 세계인에게 사랑받는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고 싶었다. 세계적인 베스트셀러로 기획된 책이 국내 시장을 목표로 기획된 책 보다 기획 단계부터 돈과 전문인력이 달라붙어 훨씬 더 문학성이 있고 작품성이 있는 책이 될 테니 말이다. 작가로서의 나의 부족함을 보완할 기획 편집 디자인 마케팅의 힘이 붙으려면 시장과 기획의 판을 키워야 한다.


작가의 꿈을 위한 글쓰기를 실천에 옮긴 것은 2019년 8월이었지만, 작가의 꿈을 꾸게 된 것은 3월 꽃 피는 봄이었다. 그 이전에 시와 소설을 쓰고 싶어서 문예창작 수업도 들었지만, 아직 작가가 되고 싶거나 될 수 있다고 생각했기보다, 순수하게 시나 소설을 쓰고 싶었다. 나름 문학청년일 때이다. 


더 이전에 짝사랑에게 편지를 썼는데, 연애편지가 내 인생의 글쓰기의 실질적인 시작이고 중요한 점이다. 작가가 되려고 글을 쓴 것은 아니었다. 짝사랑의 마음을 얻기 위한 실용적이고 도구적인 목적이었다.


그보다 더 이전에는 그림일기로 시작해 일기를 썼는데, 자발적으로 썼다기보다 선생님과 어머니의 숙제였다.


2014년 영어회화 전문강사로 근무하던 초등학교의 1학년 여선생이 예쁘고 착했다. TV 모델을 해야 할 미인이 학교에 있는 것은 완전 반칙이었다. 우즈베키스탄에서는 김태희가 소를 몰고 밭을 갈고 감자를 캔다는데, 나에겐 예쁘고 착한 1학년 여선생이 딱 그랬다. 고백 날짜를 정해 놓고 그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고백할 기회도 타이밍도 오지 않았다. 내 마음을 아는데 부담스러워한다고 들었다.


고백도 하지 못한 채 마음을 접었다. 내일 출근해서 수업을 해야 하는데 수업 준비는 되어있지 않았다. 학교 책상에는 밀린 업무가 쌓여 있었다. 나에겐 손 까딱할 힘마저 없었다. 나중에 돌아보니 우울증이었다.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그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수도 없이 스스로 세상을 떠나고 싶은 마음이 날 찾아왔었는데 실제로 실행에 옮긴 것은 그때가 처음이요 마지막이었다. 생각과 실행 사이에는 큰 간극이 있어서 완전히 다른 차원이다. 방구 뀌다 똥 싼다지만, 방구와 똥 사이에는 큰 간극이 있다. 대부분의 방구는 방구에서 끝나지 결말이 똥으로 끝나는 것은 극히 소수다. 치료와 치유가 필요한 타이밍이었다. 그렇게 해서 1년 단위로 재계약하는 비정규직이지만, 나에게 근무환경이 좋은 직장이었던 학교를 떠나게 되었다.

 

뇌의 병이라 정신과 병원에 갔어야 했는데, 마음과 영혼의 문제라 생각하여 동두천의 기독교 수도원 금식 기도회에 갔다. 금식하며 방언기도 하고 떼굴떼굴 구르는 그런 일반적인 금식기도는 아니었고, 금식하면서 설교 듣고 스트레칭하고 독서 토론하고 조용한 자리를 찾아가서 묵상 기도하고 수도원 뒷산 산행하는, 단식 프로그램의 기독교 버전이었다. 정신과 약에 의지하지 않고 금식 기도 믿음의 힘으로 조울증을 치료해 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직장 그만두고 집에서 쉬고 있던 차에, 마지막으로 다른 방법으로 조울증 약을 끊어보는 것을 도전해 보기로 했다.


1달 동안은 내가 보기에도 남이 보기에도 더 좋아 보였다. 조증이 약간 떴을 때는 환자를 잘 아는 주치의 외에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좋아 보일 수 있다. 문제는 약을 먹어야 하는 조울증 환자가 약을 끊으면, 가벼운 조증에서 멈추지 않고 계속 떠서 인생이 심란해진다는 것이다. 서울에서 대전 찍고 서울로 돌아와 학교와 회사에 다녀야 하는데, 서울 대전 대구 부산 광주 목포 제주로 네버엔딩 끝도 없이 찍고 다니면 답이 없어지는 것이다.


조울증은 마음과 영혼의 병 이전에 뇌의 병이라서 수도원 명상센터 한의원 가기 전에 정신과 병원에 먼저 들려 상담을 하고 약을 먹어 기분을 조절해야 한다. 뇌의 병은 마음과 영혼의 스트레스와 병이 지속되어 발생하기도 하지만, 일단 마음과 영혼의 아픔이 뇌의 병이 되면 뇌의 호르몬 이상으로 이상행동을 보이는 것이기 때문에, 혈중 약물농도를 적절하게 유지시켜 기분을 평소처럼 유지시켜 사람답게 살게 해주는 것이다.


약을 끊고 금식기도를 하고 한 달은 좋았다. 아니 좋아 보였을 뿐이다. 서울에서 평택 천안 찍고 대전 대구 부산 광주 목포 제주로 가고 있었다. 집을 나와 강남역 럭셔리 고시텔을 얻었다. 가격이 쎈 대신 사람다운 삶이 가능한 고시텔이었다. 약을 끊고 시간이 지나니 극단적인 조증 상태에서 나의 지킬 박사는 봉인되고 내 안에 잠자던 하이드가 등장하여 활동을 했다. 과대망상 가운데서 얼마 되지 않은 기간 동안 그동안 애써 모아 둔 나의 모든 돈을 탕진했다. 의미 있는데 돈을 쓴다고 생각했지만 말초적인 욕구를 해소하는데 나의 모든 돈을 탕진했다. 조증의 대표적인 증상이다. 극단적인 과대망상이 나타나고, 돈을 물처럼 쓰고 다니고, 분노와 욕구가 제어되지 않는다. 사람이 그럴 때도 잊지 않나 하겠지만 문제는 그 정도이다. 그 정도가 일반적 선을 훌쩍 뛰어넘는다. 직접 체험해보거나 곁에서 지켜보지 못한 사람은 모른다. 강남역으로 찾아오신 부모님과 작은 아버지 내외 분에 의해 강제입원을 당했다.


3개월 정신병원에 입원하고 퇴원했다. 약물치료로 기분은 조절이 되었는데, 눈에 빛과 총기를 잃었다. 밥과 간식을 먹으며 움직임 없이 3개월을 TV 보면서 지내면 몸무게가 5Kg 늘어나고 몸의 라인이 사라지고 둔해진다. 조증 증상은 잡혔는데 인간적 매력은 사라지고 폐인이 되었다. 방 밖에 나오지 않고, TV 보고 인터넷 하면서 은둔형 외톨이 히키코모리로 지냈다. 한창 청년의 때에 그러고 있으니 어머니께서 가슴이 타셨다. 치료는 되었지만 치유가 필요하다 생각하신 어머니께서는, 고도원의 아침편지 고도원 작가님께서 충주에서 운영하시는 명상센터 《깊은산속옹달샘》의 2주 코스 건강치유 프로그램 '녹색뇌 프로젝트'에 150만 원을 내고 보내주셨다.


약물로 기분은 정상범위로 조절이 되었지만, 혼이 빠져 있었고 꿈을 잃어버렸다. 정신적으로 아프고 쇠약했던 나에게 옹달샘 녹색뇌 프로그램이 나쁘지는 않았지만 so so 그냥 그랬다. 프로그램 자체보다 오래 오래간만에 사람들과 어울리는 게 좋았다. 프로그램 사이 쉬는 시간과 식사 후 여유시간에 명상센터 옹달샘 뒷산에 같은 프로그램 참가자들과 산행을 다니는 게 즐거웠다. 주로 형님들이었고, 같은 나이 친구가 한 명 있었다.


"다함 씨, 시 하나 외우는 것 있소? 있으면 한 번 읊어보오."

"형님, 다른 사람 시 외우는 것은 없고, 제가 지은 시와 그 시에 멜로디를 붙여 자작곡도 만든 게 있는데 그거 읊어봐도 될까요?"

"더 좋지. 시도 읊고 자작곡 노래도 불러봐요."


https://brunch.co.kr/@dahamstory/174


위 링크의 시 《나의 마음에 어느 고을엔》을 읊고, 첨부된 유튜브 영상의 자작곡 노래를 불렀다.


"브라보"


그날 저녁에는 고도원 작가님을 중심으로 둥그렇게 둘러앉아 프로그램을 참여하며 느낀 감동과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속마음을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내 순서가 왔을 때 내 시와 노래를 들은 산행 멤버들이 내 시와 노래가 좋다고 한 번 들어보자고 무대 앞으로 나를 밀었다. 고도원 작가님께서도 흔쾌히 한 번 들어보자고 돗자리를 깔아주셨다.


나의 시와 노래에 열화와 같은 뜨거운 반응이 쏟아졌다. 시와 노래를 들은 청중보다 무대에 선 나의 마음이 먼저 열렸다. 그 자리에서 내가 거기에 오게 된 사연, 아팠던 사연 등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았다. 감동의 바다였다. 청중보다 무대 앞에 선 내 마음이 더 타올랐다.


코로나로 인해 아마 사라졌을 명상센터 옹달샘 만의 문화가 있었다.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를 말하며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함께 프로그램에 함께하는 사람들을 꼭 안아주는 것이다. '사감 포옹'이라고 한다.


마음속 깊은 곳의 감동과 이야기를 나누는 저녁 프로그램을 사감 포옹으로 마쳤다. 코로나 이전 옹달샘의 프로그램은 사감 포옹으로 시작해서 사감 포옹으로 끝났다. 정부 방역지침 준수와 비대면 명상 프로그램으로의 전환으로 코로나 이후 옹달샘의 문화도 달라졌을 것이다.


옹달샘의 스태프를 아침지기라 불렀다. 아침지기 한 분이 "다함 님!"하고 다가와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사감 포옹으로 꼭 안아주었다. 그 아침지기는 이미 우리가 참여했던 '녹색뇌 프로젝트'의 여러 프로그램을 진행했는데, 마음이 닫혀 있던 나에 눈에는 전혀 들어오지 않았었다. 마음이 열리고 알게 된 사실은 나에게 다가와 사감 포옹을 해주었던 그 아침지기가 옹달샘의 여신 중 여신 아프로디테였다. 지금은 그분도 인연을 만나 결혼을 했고 엄마가 되었지만 그때는 미혼이었다. 나의 심장은 다시 두근두근 대기 시작했다.


2주 간의 명상 프로그램과 에로스의 힘이 나의 몸과 마음을 일으켜 세웠다. 그 힘의 탄력을 받아 다른 시와 자작곡을 발표하고 나의 이야기를 사람들과 나누었다. 체계적으로 음악과 작곡을 배워 자작곡을 만들었었던 것은 아니었고, 멜로디와 가사에 기타 코드를 잡아 입혔다. 나는 옹달샘 시인과 옹달샘 스타가 되었다.


'녹색뇌 프로젝트'가 끝나기 전 마지막 밤, 명상치유 프로그램을 통해 되찾은 꿈과 꿈너머꿈을 나누는 시간이 있었다. 2주 간의 프로그램을 통하여 잃어버린 빛을 되찾았지만, 이미 완전히 무너져 내린 나는 다시 돌아갈 곳이 없었다. 나는 사랑으로 아파 모든 것을 잃어버렸던 내 아팠던 이야기를 글로 써, 마음이 아픈 사람을 위로하는 작가가 되겠다는 꿈을 발표했다. 글로 아픈 사람을 위로하는 글을 쓰겠다는 마음보다, 아픈 사랑의 이야기로 마음이 아픈 사람들을 위로하는 글을 써서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어 글 쓰고 책 내는 것을 업으로 먹고살겠다는 꿈을 꾸게 되었다. 마지막 밤 작가로서의 꿈이 용트림하기 전, 고도원 작가님께서는 내 시와 노래 그리고 이야기를 듣고, 내가 미래에 세계적인 작가가 될 것이라는 '예언' 같은 이야기를 해주셨다. 물론 바로 되는 것은 아니고 몇 고개의 태산 같은 역경을 넘어섰을 때란 전제 하에 말이다. '꿈'과 '꿈너머꿈'의 전도사인 작가님이 아무나에게는 아니지만 어떤 이들에게 비슷한 '예언'을 던지고 다니실 것이다. 나뿐만은 아닐 것이라는 것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지만 나는 그 꿈을 붙잡았다.


그때 바로 그 꿈을 잡고 시립 도서관이 문 열 때 출근하고 문 닫을 때 퇴근하여 책 한 권 써서 고도원 작가님과 깊은산속옹달샘 후광을 받아 출간했어야 했다. 그때는 내 안에 스스로 작가가 될 힘이 없었다. 글의 재능과 소재가 없었다기보다, 글을 지속적으로 꾸준히 써 나갈 내면의 힘이 없었다. 때가 아니었기도 하고, 때를 스스로 만들지 않은 것이기도 하다. 운칠기삼이라지만 운은 이기적이어서 자신이 얕보는 약자를 피해 가고, 자신이 우러러보는 강자에 붙는다. 약자가 운을 붙잡으려면 운이 따르는 곳으로 찾아다녀야 한다. 운도 자신의 시야에 떠나지 않는 약자에게 어쩌다 한 번 '옜따, 이거 먹고 떨어져라.'하고 붙어 주어 영웅 전설의 조연 역할을 하기도 한다.


'세계적인 작가'가 되어 나도 끗발 나게 살아봐야겠다는 야망이 꿈틀대기 시작했던 것은 2015년 꽃피는 봄이었다. 유의미한 글쓰기를 실행하기 시작한 것은 2019년 8월부터였지만 말이다. 아내 에미마를 만나 사랑으로 행복을 찾고, 사랑의 힘으로 조울증을 극복하고 나서부터라고 확신한다.


조울증을 극복했다고 하면 가끔 큰 오해를 하시는 분이 있는데, 약을 완전히 끊고 완치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정기적으로 병원에 가서 주치의를 만나 상담을 하며 나의 상태를 체크하고, 약을 타서 꾸준히 먹고 나의 몸과 마음과 영혼을 관리하면서, 정상기분과 정상생활을 유지한다는 의미이다. 주치의 선생님께서도 인정하는 것은 조울증 약 이상으로 아내 에미마의 사랑이 나의 약이었다는 것이다.


아내를 만나 결혼까지 이르게 된 것도, 아내 에미마가 나의 모든 사연을 알고도, 본인이 나를 사랑하면 하나님께서 나를 치료하시리라는 아내의 믿음 때문이었지만, 내가 병원 잘 다니고 약 꾸준히 먹으면서 내 정신을 붙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약을 꾸준히 먹는다고 조증이 오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약을 지속적으로 먹으면서 병원 다니면 약간 떴을 때 약물농도를 조절하여, 입원하지 않고 외래로 사회생활 지장 없이 조절이 가능하다.


2015년에 시작된 작가로서의 꿈과 야망을 위해, 실질적으로 글쓰기를 시작한 것은 2019년 8월 네이버 블로그였다. 내가 책을 쓰기 위한 공간으로 선택한 브런치의 작가가 되기 위해 2019년 12월부터 도전했고, 12번 떨어지고 13번째 이듬해 2020년 10월 10개월 만에 드디어 브런치  작가가 되었다.


브런치 작가가 된 지 8개월이 되어 가는데, 84명의 구독자가 있고, 171개의 글을 썼다. 꾸준히 내 글을 읽어 주시는 구독자가 있고, 빠른 속도는 아니지만 꾸준히 구독자 수가 늘다 최근의 그 증가 속도가 빨라졌다.


무엇보다도 많은 구독자를 거느린 훌륭한 작가님들이 내 글을 읽어 주시고 사랑해 주시고 있고, 이제는 나만의 글쓰기 루틴 방정식 공식을 찾았다.


언제 출간 작가가 될지, 언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될지, 언제 세계적인 작가가 될지, 언제 다른 생활의 멍에를 벗어 버리고, 작가로서 자유롭게 아내와 9월에 태어날 아가 태명 사랑이와 사랑하며, 그 사랑 에세이를 글로 써서 살아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


가난하지만 자유로운 작가로 글 쓰며 살기로 다짐했을 때, 그동안 그렇게 원할 때는 부르는 데가 없었던, 생활전선에 타의에 의해 끌려 들어왔다. 가난했지만 자유로웠던 나는, 나름 여유를 찾았지만 자유를 잃었다. 한 편의 자유를 잃은 대가로, 돈의 힘이 주는 다른 한 편의 자유를 얻었기에, 이 멍에를 수도 없이 벗어던지고 싶지만, 한동안은 버티고 매고 가려한다. 딱 3년 정도만 매고 벗어던지리라 다짐한다.


구속의 멍에가 구속의 대가로 자유를 주기 때문에, 타의에 의해 매게 된 멍에를 자의로 벗어던지지 않고 견디고 있는 것이다.


언젠가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며, 그냥 내 삶을 살아가는 것으로, 먹고사니즘을 해결하고 이를 넘어 경제적 정치적 자유를 얻을 수 있을까?


내게도 그런 날이 오리라, 나는 확실히 믿어 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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