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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다함 Mar 01. 2021

나의 마음에 어느 고을엔

서시

자작시 <나의 마음에 어느 고을엔>을 가사로 만든 자작곡

서시  나의 마음에 어느 고을엔


나의 마음에 어느 고을엔
작은 우물 하나 있어
물 대신 사랑 흐르고
물고기 대신 희망 노닐고

나의 마음에 어느 숲에는
푸른 소나무 한 그루
향내 나는 솔잎 위에는
솔벌레 한 마리 꿈틀꿈틀

해님 아파 눕고
달님 눈물 흘려
그 어느 따스한 숨결
찾아 느낄 수 없던 날들

그 얼음바람의 다스림에도
나의 마음에 어느 하늘엔
반짝이는 별 하나 있었으니
나 그 별님 하나를 사랑했네


프롤로그


2020년 2월. 충주의 명상치유센터 깊은산속옹달샘에서 열린 3박 4일 자서전 쓰기 워크숍에 다녀왔다. 옹달샘은 고도원의아침편지 고도원 작가님께서 운영하시는 명상센터이다.  


"지금 네 나이가 자서전 쓸 나이인가?"


45만원의 참가비를 내고 자서전 워크숍에 신청했을 때 아버지께서 하신 말씀이다. 보통 자서전이라고 하면 인생 다 사신 어르신께서 인생을 정리하시며 쓰거나, 자수성가한 셀럽이 자신의 성공을 세상에 널리 알리기 위해 쓰는 장르이다. 나는 그 둘 중 하나는 아니었다. 다만, 사랑에세이 인생에세이 한 권의 책을 내기 위한 글을 쓰고 있었다. 좁은 의미의 자서전은 아니었지만, 넓은 의미로 자서전이었다.


옹달샘 자서전 워크숍은 명상센터 옹달샘의 자체 기획 프로그램은 아니다. 출판사 꿈틀과 명상센터 옹달샘의 콜라보 프로그램이다. 몸풀기 마음풀기 명상 프로그램은 옹달샘 스태프인 아침지기가 진행하고, 자서전 쓰기 프로그램은 꿈틀 박범준 편집장이 진행한다. 옹달샘 자서전 워크숍은 '모든 삶은 기록할 가치가 있습니다."를  모토로, 평범한 사람의 삶의 기억을 한 권의 자서전으로 기록하는 데 인사이트를 주는 워크숍이었다.


워크숍의 주제와 기획의도를 모르고 간 것은 아니었지만, 나의 목적은 사랑에세이 인상에세이 책 한 권을 써서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에세이 작가가 되는 것이었다. 세계적인 작가여서 세계적인 베스트셀러를 쓰는 게 아니라, 세계 각국의 언어로 번역하여 글로벌 도서시장에서 팔아 날개돋친 듯 팔리면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는 것이다. 쓰고 있는 에세이를 어떻게 베스트셀러로 기획출판할 수 있을까 하는 꿀팁을 얻고 싶었다.


첫 번째 책으로 출간할 에세이의 주제를 정하여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어떻게 나의 책을 세상에 내어 놓아 대한민국과 글로벌 독자들에게 소개할 수 있을까 하는데 힌트를 얻고 싶었다. 옹달샘 자서전 워크숍은 유익하고 즐거운 시간이었지만 큰 도움은 되지 않았다. 강사이신 꿈틀 출판사 편집장님의 비기는 대부분 이미 다 알고 해왔던 내용들이었다. 첫 번째 에세이를 출간하기 위해서 잘하고 있구나 하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을 뿐이었다. 한 가지 내게 필요한 깨달음은 따로 있었다. 베스트셀러는 어쩌다 운 좋게 터진 것이나, 작가의 능력만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상당수의 베스트셀러는 애초에 출판사와 편집자와 작가가 베스트셀러를 만들 목적으로 기획 출판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베스트셀러는 작가 혼자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니다. 작가와 출판사와 에디터가 함께 만들어 가는 것이다. 최근 여기에 하나의 주체가 더 생겼다. 플랫폼이다. 브런치를 말하는 것이다. 베스트셀러는 작가 출판사 플랫폼이 함께 만든다.


옹달샘 자서전 워크숍의 마지막 날 마지막 프로그램은 출판기념회였다. 출판기념회에서 워크숍 기간 동안 각자 썼던 글을 책으로 만들어 한 권씩 나누어 주었다. 참가자 전원이 소감 한 마디씩 나누었다. A4 4장에 좌우 앞뒤로 프린트하여 가운데 호치케스 박아 만든 16페이지 작은 자서전을 기념으로 선물해 주었다. 워크숍의 마지막 순서이기도 했지만, 3박 4일 일정 동안 함께 하며 친해진 동기들끼리 작은 파티요 축제이기도 했다. 흥이 있는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장기자랑도 하고 노래도 불렀다. 나는 혹시나 즐거운 시간을 위해 필요하지 않을까 싶어 워크숍에 통기타를 가지고 왔었다. 워크숍 일정 막바지에 친해진 누님께서 회원 모두와 함께 부르고 싶은 노래가 있는데 기타 반주를 해달라고 했다. 일단 내가 모르는 노래였고, 인터넷에 음원만 있지 떠다니는 악보가 없었기 때문에, 사전에 여러 번 들어보고 코드를 직접 따야 했다. 내 순서가 왔을 때 자작시로 만든 자작곡 『나의 마음에 어느 고을엔』을 불렀다.




명상치유센터 깊은산속옹달샘과의 인연은 그때가 처음이 아니었다. 2015년 꽃 피는 봄으로 소급하여 올라간다. 2014년 가을 조울증이 재발했었다. 조울증은 2000년 봄에 나를 찾아왔다. 나와 부모님과 가까운 지인들은 나의 조울증이 시작된 원인이 짝사랑이었던 첫사랑을 향한 상사병과 군대에서의 정신적인 집단 괴롭힘이었다고 추측한다. 2000년 2009년 2014년은 조울증으로 인한 내 인생의 최대 위기의 순간이었다. 옹달샘과 인연이 된 2015년은 내 인생 3대 위기 중 한 순간이었던 직전 해의 다음 연도였다.


2014년 삶을 스스로 끝내려는 극단적인 시도를 했다. 그 시절 내가 가장 바라는 이상적인 죽음의 형태는 비명횡사였다. 나도 모르게 덤프트럭이 나를 키스해 세상을 떠나는지도 인식하지 못한 채 나의 존재가 소멸이 되는 것이었다. 지금도 여전히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아내 에미마를 만난 이후 나의 생각의 코페르니쿠스 대전환이 있었고, 지금은 끝까지 살고 싶다. 극단적인 시도를 했고, 비정규직이었지만 나에게 좋았던 직장을 그만두었다. 조울증 약을 끊었고 조울증이 재발하였다.


내가 조울증이 발병하거나 재발했을 때는 그 원인이 딱 두 가지 중 하나였다.


하나는 조울증 예방 약을 끊었을 때이다. 나뿐만 아니라 꾸준히 약을 먹어야 하는 정도의 조울증 환자들이 대부분 그렇다. 약 먹으면 멀쩡하고, 약 안 먹으면 처음 얼마 동안은 더 좋아 보이기도 하는데, 시간이 지나면 완전히 망가져 사람 구실 못한다. 조울증은 정기적으로 병원에 가서 주치의 선생님과 상담하고, 매일 자기 전 비타민처럼 약 몇 알씩 먹고, 학교나 직장 성실하게 잘 다니면 괜찮은 병이다. 대부분의 정신질환이 필요하다. 조절이 되지 않아 본인과 사회와 갈등을 일으킬 때는, 병원에 입원하여 격리되어야 할 때도 있다. 나도 그랬다. 그렇지만, 정기적으로 주치의 선생님과 상담하고, 약 잘 먹고, 공부 열심히 하고 회사 잘 다니면, 괜찮다. 나 스스로 내 삶을 끝내고 싶은 극단적인 사고를 한 적은 수도 없이 많지만, 그 사고를 실행에 옮긴 것은 그때가 처음이요 마지막이었다. 손목을 그어야지 하는 생각과 손목을 그은 행동까지의 갭은 엄청난 것이다. 약을 털어 먹어야지 하는 생각과 약을 털어 먹은 행동까지의 간극은 엄청난 것이다. 생각은 누구나 하지만, 행동은 아무나 하지 않는다. 행동에 까지 옮긴 대부분에 사람은 어디가 병들어 치료가 필요하다. 그렇다고 정신과적 질병에 대한 편견을 가질 필요는 없다. 누구나 어떤 상황을 맞으면 누구나 감기에 걸리는 것처럼 정신질환에 걸리고, 병증에 대한 치료를 받으면 괜찮아진다.


내가 조울증이 발병하고 재발했을 때의 두 번째 원인은 누군가를 짝사랑할 때였다. 한 여자가 내 눈에 들어오면, 그 여자는 나의 여신이 되었다. 여신은 날 사랑할 리가 없었다. 아니, 날 사랑하지 않은 여신을 사랑했었다. 중고등학교 시절 최다함은 괜찮은 소년이었다. 모든 여자들에게 호감을 주는 그런 소년은 아니었지만, 어떤 여자들에게는 호감을 줄 수 있는 그런 소년이었다. 나의 실수는 날 사랑하지 않은 소녀를 사랑한 것이었다. 내가 사랑하는 소녀가 날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 사랑을 쟁취하기 위해서라도, 그 사랑을 잠시 접고 먼저 누구나 사랑에 빠질 매력적인 능력 있는 남자로 나를 성장시켜 나아갔어야 했다. 그러다 보면 다른 남자와 사귀던 소녀가 언젠가 남자 친구가 깨질 날에 나에게로 올 수도 있었다. 그때가 되면 성장한 내 곁에 소녀가 아닌 더 예쁘고 착한 다른 여자가 '오빠' 하고 내 팔짱을 꼈을지도 모른다. 나의 눈의 이상형도 바뀌었을 것이다. 짝사랑이었던 첫사랑이 삐끗하여 단추를 잘못 끼우면서, 도미노처럼 내 인생과 그 이후의 수많은 사랑들도 넘어졌다. 끊임없이 누군가 사랑할 대상을 찾아 헤매었지만, 짝사랑으로 병들어 상사병과 조울증이 걸려 인생 쪽박난 나에게 연민은 가질 망정, 그런 나를 사랑해 주고 일으켜 준 여자는 나의 아내 에미마 한 명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조울증이 재발했을 때는, 어김없이 내 주위에 누군가가 치명적으로 예뻤을 때였다. 2014년 내 인생 3대 위기 중 하나가 나를 찾아왔을 때도, 내가 영어회화 전문강사로 근무하던 학교의 1학년 여선생님이 치명적으로 예뻤다. 그 예뻐서 착하고 착해서 예쁜 것은 완전히 반칙이었다. 모델을 해야 할 사람이 학교에서 선생님을 하고 있었다. 옷도 잘 입어서 모델처럼 예쁜 옷을 입고 말이다. 능력 있고 일도 잘했다. 그런 예쁘고 착하고 옷도 잘 입는 모델보다 모델 같은 어린 정규직 여선생님이 나이 차이가 있는 비정규직인 날 사랑 할리가 없었다. 그런 여선생이 날 사랑하기 위해서는, 내가 날 여선생에 맞게 성장을 시켰어야 했고, 서로 친해져 나에 대해서 상대가 알고 애틋한 마음이 들 때까지 충분한 시간이 필요했다. 여선생을 사랑하는 일방적인 마음으로 에너지를 손실할 것이 아니라, 수업 준비 잘해서 학교에서 실력으로 소문난 영어 교사가 되어 그 학교에서 계약을 매년 연장해 가면서, 임용고시를 준비하여 경기도 중등학교 임용고시에 패스하여 중학교 고등학교 정규직 선생님이 되었어야 했다. 시간을 두고 친해지면서 말이다. 누군가 내 마음을 대충 눈치채더라도, 절대로 내 입으로 그 마음을 표현하지 말고 말이다. 말이 아닌 행동으로 예뻐서 착한 착해서 예쁜 모델 보다 모델 같은 그 여선생에게 마음을 전해야 했다. 아주 오랜 시간을 두고 말이다. 여선생도 그 학교에 발령한 지 첫 해여서 4년은 같은 학교에 있을 것이었고, 1년 단위로 4년까지는 무전형으로 학교장의 평가로 재계약을 연장할 수 있고, 4년 이후에도 같은 학교에 영어회화 전문강사 경쟁 선발에 지원할 수 있었다. 구관이 명관이라고 동료 선생님들과 학생들과 교장 선생님께 인정받으면 계속 가는 것이다. 1년 단위 연장 후 4년이 되어, 그 학교에 경쟁 공모해 다시 원서를 내도, 스펙이 좋은 사람이 와도, 학교 구성원에 인정을 받으면 나로 가는 것이다. 4년 동안 좋은 영어교사로 나를 성장시켰더라면, 그 누가 오더라도 나를 뛰어넘을 스펙을 가질 사람도 없을 것이고 말이다. 여선생이 예뻐서 착했고 착해서 예뻤다. 완전 반칙이었다. 1학년 여선생이 내 마음을 알았지만, 부담스러워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극단적인 선택을 했고, 직장을 그만두었다. 약물 농도를 유지하여 기분을 조절하는 조울증 재발 예방약을 끊었다. 얼마 동안은 더 좋아지는 듯했으나, 일정 시간이 흐른 후 사태는 심각해졌고, 여러 가지 사고를 쳤다. 사회의 무리를 일으킨 것은 아니었다. 집 나가서 내가 그동안 피땀 흘려 모은 모든 돈을 며칠 만에 다 쓰고 다녔다. 분노 조절이 되지 않을 때는 부모님과 심각한 갈등이 있었다. 조울증 환자만 힘든 것은 아니다. 조울증이 조절되기 까지 그 가족도 힘들다. 다만, 조울증 환자의 입장에서 그러고 싶어서 그러는 것도 아니다. 조울증을 조절할 방법이 없어서 그런 것 또한 아니다. 방법을 몰라서 또는 그 방법을 병증이 심할 때는 거부하기 마련이어서 그렇다. 나 스스로는 조울증이 심각한지 인지하지 못했지만 인생 최대의 위기까지 몰리게 되었고 입원을 하게 되었다. 병원에서 3개월 입원하고 나오니, 조증의 병증은 잡혔는데, 매일 집에서 TV 보고 인터넷 하고 잠이나 자고, 입원해 있는 동안 좁은 공간에서 움직임 없이 지내다 보니 몸무게가 5킬로 이상 증가하여 매력과 빛을 잃었다. 눈의 총기도 사라졌다. 한창 청년에 때에 그런 내가 안타까웠던 어머니는 큰 고모의 소개로 고도원 작가님의 명상센터 깊은 산속 옹달샘에서 하는『녹색뇌 프로젝트』라는 건강치유 프로그램에 2주 동안 보내 주셨다.


꿈도 희망도 없을 때였다. 처음에는 다른 참석자들처럼 옹달샘 치유 프로그램이 피부에 와 닿지는 않았다. 오래 오래간만에 좋은 사람들이랑 같이 다니고 움직이고 맛있는 밥 먹고 이야기도 하고 그런 것이 좋았을 뿐이다. 명상과 치유 프로그램이 딱히 않았지만, 간만에 활동적인 프로그램을 하는 것은 좋았다. 개인적으로 와 닿지 않았고 처음부터 마음이 열리지 않았다는 것이지, 프로그램 자체는 좋았고 재미있었다. 프로그램 참석하는 것보다, 프로그램 사이사이 쉬는 시간에, 좋은 사람들과 몰려다니며 옹달샘 뒷산을 산책하는 것이 즐거웠다. 쉬는 시간에 뒷산을 산책하는데, 형님 한 분이 "다함 씨, 시 하나 기억하는 것 있으면 읊어봐요." 하시는 것이었다. 기억하는 시는 예나 지금이나 없다. 대신에 내가 지은 자작시 『나의 마음에 어느 고을엔』을 읊었다. 그리고 자작시로 만든 자작곡 『나의 마음에 어느 고을엔』을 불렀다. 뜨거운 반응이었다. 저녁 시간 이후 고도원 작가님을 중심으로 둘러앉아 몇 마디씩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 있었다. 내 순서가 다가왔을 때 내 시와 노래를 들은 형님들과 친구가 내 시와 노래가 좋다고 한 번 시켜 보자고 했다. 그렇게 해서 그 자리에서 내 시를 읊고, 노래를 불렀고, 여기까지 오게 된 나의 사연에 대해서 솔직하게 고백하고 털어놓게 되었다. 뜨거운 반응이었다. 고도원 작가님께서도 매우 좋아하셨다. 고도원 작가님께서는 앞으로 몇 고비 넘어야 할 산이 앞에 있겠지만, 그 산을 넘으면 최다함이 세계적인 시인이 될 것이라고 예언 같은 예측과 격려를 해 주셨다. 세상의 모든 예언은 조건부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그 진리를 따르면 하나님의 선한 예언이 성취가 되는 것이다. 누가 나에게 세계적인 작가가 될 것이라고 예언한다고 할지라도, 내가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품이 나올 때까지 글을 쓰고 책을 내야지 예언이 성취되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예언은 미래에 대한 조건부 예측이다.


2015년 옹달샘 명상치유 프로그램에서 나의 자작시 『나의 마음에 어느 고을엔』을 발표하고 호평을 받으면서,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로서 꿈을 꾸게 되었다. 직업으로써의 작가를 꿈꾸게 되었다. 2015년 나는 그렇게 인생 시 한 편 발표하고 옹달샘 시인이 되었다.




지난 삶을 반추해 보면, 작가로서의 꿈이 그때 시작된 것은 아니었다. 대학교 다닐 때, 복수전공이나 부전공을 한 것도 아니면서, 필수 전공 외에 우리 과 심화전공을 듣는 대신, 국어국문과 문학수업을 들었다. 소설 창작 수업과 시 창작 수업을 들었다. 소설 창작 수업은 소설가이면서 강원대 국어국문과 교수로서 재직하셨던 전상국 작가님께서 강의를 하셨다. 강의를 듣기 전까지는 그분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했고, 그렇게 유명한 작가이신지도 몰랐다. 춘천의 김유정문학촌 촌장으로써도 혼을 다하여 일하셨는데, 문학촌 촌장 하실 때 문학촌 행사 때마다 찾아가 인사드리고는 했는데, 정작 전상국 작가님의 소설은 읽어 보지 않았다. 소설 창작 강의를 듣다가, 교재 가운데 그분의 작품의 일부 문장은 접했을지 모르나 기억에 없다. 매 수업마다 창작 과제와 토론이 있었다. 출석 과제 토론 참여만 잘하면 A0를 받았다. 그것만 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여기에 단편소설 한 편을 내면 A+를 받았다. 단편소설 한 편을 제출하는 것은 의무가 아닌 선택이었지만, 단편소설을 제출하느냐 마느냐에 따라 학점이 바뀌었다. 소설 입문 강좌에서 단편소설의 문학성을 평가했던 것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단편소설로서의 최소한의 구성을 갖추었는지에 대해서만 평가했다고 생각한다. 신춘문예나 문학잡지를 통해 등단할 수 있는 작품은 아니더라도, 읽어 보았을 때 제대로 된 소설 같은 느낌은 들어야 하는 것이다. 일기 같은 에세이 같은 소설은 가능하지만, 소설 창작 과제로 일기와 에세이를 내면 가산점을 줄 수 없는 것이다. 출석 과제 수업 참여는 성실하게 했으나, 단편소설 마감일을 지나 제출했고, 소설로써 함량 미달인 작품을 제출했고, A0를 받았다.


시 창작 수업의 교수님께서도 등단한 시인이셨다. 이름난 시인은 아니셨던 것 같다. 문인이셨다기보다는 국문과 교수님이셨다. 시의 기본에 대한 아주 기본적인 개념 강의를 한 이후에, 학생들이 돌아가며 작품 하나 씩을 발표했다. 자기 발표 날에 반 학생 수만큼 자작시를 카피해서 나누어 주고, 학생들끼리 비평하며 토론을 하는 시간을 가졌다. 학생들의 자아비판 이후에는 교수님께서 어떤 부분은 잘 되었고, 어떤 부분은 문제가 있는지, 일종의 첨삭을 해 주셨다. 새로 시를 쓰자니 귀찮고 어려워서, 나의 인생 시 『나의 마음에 어느 고을엔』의 그 당시 버전을 다듬어서 제출했다. 그때 버전에는 완성된 시로서 약간의 결핍이 있었기 때문에, 가벼운 지적을 받았지만, 대체로 호평을 받았다. 최고의 평가를 받은 학생 가운데 하나였다. 정확한 워딩이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교수님께서 내 시를 보시며 윤동주 시인인지 서정주 시인인지 아무튼 교과서에 나오는 모든 국민이 아는 유명한 시인의 시와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는 평가를 받았다. 박수갈채를 받았고, A+를 받았다. 물론 모든 시인들이 내 시를 높게 평가했던 것은 아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이 시를 들려주었는데, 그 가운데서도 시인도 계셨다. 좋게 평가해 주신 분들도 많았지만, 등단한 시인 중 몇 분은 듣기는 좋은데 그것은 시가 아니다고 평가하신 분도 있었다. 아무리 좋은 시를 써도 모든 사람들의 호평을 받을 수 없고, 일부 전문가들의 비난을 받을 수도 있다. 인생사 모든 부분이 그렇다.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이 많아도, 나의 생각을 지지해주고 응원해 주는 목소리가 더 많이 들리면 비난은 흘려버리고 내 갈 길 가는 것이다. 지금 모든 이의 비판을 받는 아이디어가, 세월이 지난 이후 모든 이들의 박수를 받는 아이디어가 될 수도 있다. 나의 인생 시『나의 마음에 어느 고을엔』로 시 창작 수업에서 A+을 받았다.


시 창작 입문 수업 외에도, 그전에 전 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교양필수 글쓰기 수업 가운데 수업 수강생만을 대상으로 교수님이 사비로 상품 걸고 하는 작은 백일장에도 이 시를 냈다. 여기저기 같은 시를 냈지만 불법은 아니다. 공식적 백일장이나 공모전이나 신춘문예나 출판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같은 시로 이 수업 저 수업의 과제로 제출하는 것이 법적으로도 도의적으로도 아무 문제가 없기 때문이다. 다만, 인생 시『나의 마음에 어느 고을엔』외에는 시 다운 다른 시가 없기 때문이다. 그 이후에도 통기타로 코드 잡고 멜로디를 입히고 가사를 붙여 자작곡을 여럿 만들었는데, 그 가사는 노래 가사로서는 주변의 환호를 받았지만, 시라고 하기에는 1% 모잘랐다.


스무 살 즈음에 인생 시『나의 마음에 어느 고을엔』가 나를 찾아와서, 수업 시간에 과제로 문학작품을 제출해야 할 때뿐만 아니더라도, 살면서 장기자랑을 하거나 사람들 앞에서 나를 PR 해야 할 상황이 되면, 인생 시『나의 마음에 어느 고을엔』를 읊고, 그 시를 가사 삼아 만든 자작곡을 불렀다. 통기타가 있을 때는 기타 반주를 하며 불렀다. 곰탕 같이 20년을 푹 고아 우려먹고 또 우려먹었다. 평생 계속 글을 쓰고, 시와 가사도 쓸 것이지만, 앞으로도 평생 나의 인생 자작시와 자작곡 『나의 마음에 어느 고을엔』을 곰탕 우려먹듯이 읊고 부를 것이다. 내 작품 가운데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보편적으로 사랑받는 시와 노래가 『나의 마음에 어느 고을엔』이다.




누구나 일평생 사는 동안에 한 편의 시가 찾아오고 한 번은 시인이 된다. 마흔두 살 내 인생에도 그런 순간이 있었다. 시를 써야지 하고 지은 것은 아니었다. 어느 날 갑자기 내 마음에 편의 시가 고였다. 나는 다만 내 마음속 우물에 고인 시 한 편을 길어 올렸을 뿐이다.


처음 시가 찾아왔을  나는 스무 살 즈음이었다. 창작의 고통 없이 한 번에 이 시의 첫 버전이 내 안에서 떠올라 흘러나왔다. 시어 하나하나를 다듬어 완성에 이르기까지는 이십 년 가까운 시간이 걸렸다. 의도를 가지고 내 인생을 시 한 수에 압축적으로 담은 것은 아니었지만, 시어 하나하나에 인생의 순간순간이 비유와 상징으로 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나의 마음에도 사랑이란 물이 흐르고, 그 물 안에는 희망이라는 물고기가 노닐 때가 있었다. 나의 마음의 숲 속에 푸른 소나무가 있었고, 그 솔잎 위에는 솔향기가 가득했을 때가 있었다. 솔향기가 불러온 솔벌레 한 마리가 꿈틀거리기 시작하였다. 소나무와 솔잎을 갉아먹기 시작하였다. 해님과 달님은 아파 눕고 눈물 흘렸다. 그 어느 따스한 숨결을 찾고 찾아도 느낄 수 없었다. 그 얼음바람이 다스리던 날에도, 나의 하늘에는 언제나 반짝이는 별 하나가 있었다. 사랑이라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무지개를 쫓아 떠난 인생여행으로 2030 청춘을 잃어버렸다. 그 대신, 시 한 수가 나를 찾아왔다. 사랑의 끝에서 마지막 사랑 아내 에미마를 만났다. 아내 에미마와의 사랑의 열매로 아내의 뱃속에서는 태명이 '사랑'인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우리의 아가가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일평생 살아가는 동안 한 편의 시가 찾아오고, 한 번은 시인이 된다. 같은 차원으로 살아가는 동안 베스트셀러 인생 에세이 한 권의 이야기가 찾아온다. 이 책이 나에게 그러한 책이다. 모든 사람의 인생은 세계인과 공감할 만한 보편성을 가지고 있다. 세상에 나와 같은 이는 나 하나뿐이기 때문에 모든 사람은 세상에 단 하나뿐인 특수성을 가지고 있다.

 

가능한 세계 모든 언어로 이 책이 번역되기를 기도한다. 글로벌 도서시장에서 나의 책과 작가인 내가 사랑받아, 글로벌 작가가 되기를 기도한다. 글로벌 독자들에게 사랑받는 글로벌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고 싶다. 세계인이 공감할 수 있는 보편성과 세상에 하나뿐인 특수성이 있는 이야기로 나의 인생여행 사랑여행을 나누고 싶다. 뜻이 맞고 역량 있는 플랫폼과 출판사와 에디터를 만나 협력하여 기획출판을 하여, 글로벌 베스트셀러 에세이 한 편을 만들어 냈으면 좋겠다. 어떤 대형 베스트셀러 작가는 일 년에 책 한 권씩 내서 본인과 출판사가 일 년을 먹고 산다는데, 나는 이 책 한 권이 국내 시장과 글로벌 시장에서 대박이 나서, 책 한 권으로서 평생 먹고살 수 있으면 좋겠다. 꿈은 야무지다.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는 것이 내 인생의 꿈과 목적지는 아니다.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지 않아도 상관은 없다. 다만, 내 인생의 버킷리스트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내 인생의 꿈과 꿈너머꿈을 향한 과정과 경유지일 뿐이다. 꿈과 꿈너머꿈의 성취와는 상관없이, 네버엔딩으로 평생 글을 쓸 것이고, 평생 책은 출간할 것이다. 한때는 작가로서의 삶이 나의 메인 잡이 되기를 바랐지만, 지금은 그것은 아니라는 것뿐이다. 내 평생에 하고 싶은 일은 따로 있고, 언젠가는 그 일을 직업으로 하고 싶다. 내 일을 하면서 글은 계속 쓸 것이고, 글을 모아 책은 계속 낼 것이다.


어느 날 내게 찾아온 한 편의 인생 시「나의 마음에 어느 고을엔」처럼, 나의 첫 번째 책 「다함스토리」가 그런 의미의 인생 에세이 한 권이 되기를 바란다. 끝이 보이지 않던 어두운 터널을 벗어나, 자갈길이 끝나고 꽃길이 시작된 나의 인생 에세이가, 누군가의 삶에 위로와 이정표가 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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