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다함 Oct 11. 2020

다함스토리

사랑지상주의자였던 어느 사랑꾼의 사랑 에세이

나 최다함과 동생 최바다의 핵귀요미 시절


나의 이름 최다함,

그 이름값은 비쌌다


49번, 최다함. 이름이 참 좋네요. 무슨 뜻이에요? 누가 지어주셨어요?


49번이 정확한 번호는 아니다. 이제 마흔한 살이니 중고등학교 때 몇 번이었는지가 기억에 남을리가 없다. 상징적인 의미로 기억에 기록한 번호가 중학교 때 3번 고등학교 때 49번이다. 키 순서로 번호를 정했던 중학교 시절 키 순서가 반에서 3번 정도 되는 땅꼬마 중 하나였다. 성씨의 가나다 순으로 번호를 정하던 고등학교 시절 학급당 학생수가 최 씨인 내가 49번이 될 정도였다. 내 번호를 49번으로 기억할 때, 학급당 학생수가 53명 정도로 되는 콩나물시루였다는 의미이다. 졸업 후 언제부터인지 무슨 이유 때문인지 급격히 학생수가 줄어들기 시작하여, 지금은 한 반에 서른 명 안짝이다. 내가 3번과 49번이었다는 것도 왜곡된 기억일 수도 있다. 내 기억엔 얼마 지나지 않은 때였던 것 같은데, 아주 오래전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내 이름은 최다함이다. 동생의 이름은 최바다인데, 어린 시절 친구들이 피바다라고 놀려서 이름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었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가지고 놀리고,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콤플렉스를 가지는 그런 시절이 있다. 나는 내 이름 최다함에 대해 프라이드를 가지고 살아왔다. 지금은 본명 최다함을 필명, 아이디, 닉네임, 퍼스널 브랜드 등으로 사용하고 있다.


내 동생 이름은 태어난 후 출생신고를 앞두고 서둘러 지으셨는데, 내 이름 최다함은 어머니 아버지께서 내가 태어나기 이미 오래전부터 3가지의 중의적인 뜻을 담아 미리 지어놓으셨다. '윗과 아브라함', '선을 다하라.',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라.'라는 뜻이다.


이름 때문에 놀림을 받은 경험은 없는데, 매 학기가 시작될 때 새로운 선생님과 친구들을 만날 때마다, 과도한 관심을 받았다. 역사적 사명이 담긴 의미심장한 이름 때문에 그 이름 값을 감당하지 못해서 그 동안 인생이 꼬였나 하는 생각도 가끔 해 본다. 나는 미래의 아내 에미마와 나 사이의 아이가 생기면, 부르고 듣기에 예쁜 이름에 지극히 평범한 이름을 지어 주고 싶다. 본인의 삶의 스케일은 본인이 살아가면서 정하면 되지, 이름으로 그 범위를 한정해 주고 싶지는 않다. 평범한 이름 가운데도, 민수 · 영수 · 철수 · 동수 · 영희 이런 이름은 제외하고 말이다. 최영하, 최 데이비드, 최 그레이스, 최사랑 이런 정도의 이름을 어떨까 생각헤 본다.




내가 어릴 때, 지금은 할머니가 되신 어머니께서도 청춘이셨다


나의 어린 시절


어린 시절과 10대 소년 시절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던 나는
20대에는 나일롱 선데이 크리스천이
30대에는 무신론자가 되었다.


아주 어렸을 때, 내 삶 가운데 가장 최초의 기억 중 하나가 있다. 크리스마스 때였다. 어머니께서 산타할아버지에게 어떤 선물을 받고 싶은지 물어보셨다. 어머니 머리맡에서 듣던 성경 동화 고대 이스라엘 솔로몬 왕 이야기가 떠올랐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다윗왕의 아들 솔로몬 왕에게 찾아와 '소원을 말해봐'하고 말씀하셨다. 램프의 요정 지니처럼 말이다. 우리 시대에는 램프의 요정 지니 대신 소녀시대가 나타나 '소원을 말해봐'라고 우리에게 노래를 불러주지만 말이다. 솔로몬 왕은 금은보화 대신 오직 지혜를 달라고 기도했다. 솔로몬 왕은 훗날에 당대에 세계에서 가장 지혜로운 왕이 되었다. 꼬마 시절 나는 솔로몬 왕처럼 크리스마스 선물로 지혜를 달라고 대답했다. 그 응답인지 가족과 주변 이웃으로부터 지혜롭다는 소리를 종종 들었다. 아내 에미마는 내가 종종 꾀를 부릴 때, 내게 'Very Very Clever Man'이라고 한다. 순수했던 내가 오랜 방황을 거치고 사람들의 착한 말 뒤에 숨겨진 이면들을 경험하면서 나의 세계관도 꼬인 부분이 있어서 , 지혜가 'Clever 영라한'의 의미로 변형된 측면도 있다.


3대째 예수를 섬기는 독실한 크리스천 집안과 환경에서 태어나고 자라났다. 20대 때는 선데이 크리스천 나일롱 신자가 되었고, 30대 때는 하나님을 떠나 무신론자가 되었지만, 10대 때 나의 꿈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었다. 친구들과 선생님은 내가 목사님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목사님이 되는 것도 하나의 옵션으로 생각하기는 했지만, 목사님이 되는 것이 꿈은 아니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그 자체가 꿈이었다. 특별한 장래희망은 없었다. 꿈이라고 하기는 그렇고 목표가 하나 있었다면, 그 시절 독실한 기독교인 학생들과 학부모들이 하나님의 대학이라고 생각했던, 포항의 한동대학교에 가는 것이었다. 한동대는 인문계와 자연계만 구분하여 무전공으로 입학한 후에, 1학년 다녀보고 전공을 선택하기 때문에, 일단 한동대에 합격한 후에 학교 다니면서 전공을 선택하면 되지 생각했었다.




"난 네가 기뻐하는 일이라면 뭐든지 해." ⓒ 이현세, 공포의 외인구단


짝사랑이었던 첫사랑은

상사병이 되어 조울증이 되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했던 나는
소녀를 사랑하게 되었지만
소녀는 나를 사랑하지 않았다.


하나님사랑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소녀사랑이 되었다. 예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공포의 외인구단》의 엄지를 사랑했던 것처럼, 그렇게 소녀를 사랑하고 싶었다. 소녀에게 나는 예수님도 까치 오혜성도 아니었고, 소녀 또한 엄지가 아니었다. 소녀를 사랑했지만, 소녀는 나를 사랑하지 않았다. 소녀를 사랑하게 되고 1년이 지난 후에 처음 고백했을 때, 나와 같은 나이였던 소녀에게 결혼까지 생각하며 만나는 남자친구가 있었다. 소녀는 훗날 그 남자친구와 결국은 헤어졌다. 어떤 사랑은 내 의지와 상관 없이 내 심장이 갑자기 뛰면서 시작되는 것이기에, 소녀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을 알았지만, 이미 시작된 심장 박동과 사랑을 멈추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 지금은 결혼은 했는지 잘 모르지만, 소녀도 늦은 나이까지 결혼을 하지 않았다.


재수를 하고 강원대 영어교육과에 입학했다. 졸업 이후 더 이상 소녀를 만나지도 연락하지도 못했지만, 365일 24시간 순간순간 소녀를 생각하며 그리워 했다. 대학 동기들이 군대에 가는 일반적인 시기보다 1년 앞서, 병무청에 가서 자원입대를 신청했다. 군대 간다고 하면 소녀가 카페에서 아메리카노 한 잔 함께 마셔줄 줄 알았고, 소녀와 아메리카노 딱 한 잔만 함께 하면 소녀를 향한 그리움과 갈증이 해갈되어 군생활 2년은 버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토록 소녀가 보고 싶고 또 보고 싶었다. 그런 얼빠진 상태에서 군대에 갔고,  고문관 관심병사가 되었고, 소녀에 대한 상사병과 군대에서의 정신적 괴롭힘으로 스물한 살에 조울증이 찾아왔다. 입대 후 6개월도 되지 않아 조기 전역을 하였다. 소녀의 대한 첫사랑이 시작하여 완전히 끝나기까지 7년의 세월이 지나갔다.


소녀에 대한 사랑이 끝난 후에도 끊임없이 누군가를 사랑했다. 평생에 사랑할 단 한 여자가 나에게는 필요했다. 내가 사랑한 여자들은 나를 사랑하지 않았다. 고등학교 시절 모두에게는 아니었지만 어떤 이들에게 나는 대단히 매력적인 괜찮은 소년이었다. 나를 사랑지 않는 소녀를 첫사랑으로 내 인생의 사랑의 첫 단추를 잘못 끼웠던 것으로 내 인생의 스텝이 꼬였다. 어떤 여자도 첫사랑을 향한 상사병으로 조울증에 걸려 나사가 하나 빠진 남자에게 연민을 느낄지언정 사랑에 빠질 리가 없었다. 나 같은 스타일의 남자를 좋아하지 않는 여자들만 골라 사랑을 했었던 것 같기도 하다. 내 처지는 모르고 눈만 높았었던 것 같기도 하다.


조울증에 걸려 긴 세월 방황하다가 13년 반 만에 영어교육과를 졸업했다. 초등학교에서 영어회화 전문강사로 일했다. 좋은 영어교사가 되기 위해 최선을 다했어야 할 타이밍에, 예쁘고 착한 여자들이 내 눈에 보였다. 예쁘고 착한 여자들이 첫사랑에 목을 매다 인생이 너덜너덜해진 나에게 심장이 녹을 리가 없었다. 살면서 지나간 대부분의 사랑들이 나를 슬프게 했던 것은 아니지만, 어떤 사랑은 나를 아프고 병들게 했다. 치명적으로 예쁘고 착했던 소수의 여자들은 나에게 팜므파탈 경국지색이 되었고, 그로인해 조울증이 재발하여 정신병원에 여러차례 입원했다, 비록 비정규직이었지만, 괜찮은 직장을 그만두게 되었다. 경력이 단절되어 원하지 않게 만년 백수 니트족이 되었다.




네팔에서 아내 에미마와 약혼여행을 다닐 때 ⓒ 최다함


사랑의 끝에서

사랑을 만나다


사랑을 포기하고 내 삶을 살기 시작했을 때
나의 사랑 나의 아내 에미마를 만났다.


동생 사업장에 1주일에 한 번씩 가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태백의 정신지체 생활시설에서 살면서 생활복지사로 일하며 온라인 학점인증제로 사회복지사 2급 자격증을 땄다. 중등학교 영어교과 정교사 2급 자격과 사회복지사 2급 자격을 가지고 있었지만, 조울증으로 피폐해지고 경력이 단절된 내가 재취업을 하여 다시 사회생활을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초등학교 교장선생님으로 정년퇴직하신 아버지께서는 나에게 평생직장 왕대추농장을 만들어 주시기 위해, 아버지 고향이자 할아버지 할머니께서 평생 사시던 논산 시골집으로 귀농을 하셨다.


다시 누군가를 만나서 사랑할 수 있을까 생각하며 사랑과 결혼을 포기했을 때, 부모님과 둘째고모와 네팔에서 살고 계시는 고모지인을 통해서 에미마를 소개받게 되었다. 세상에 그 어느 여자가 나를 사랑할까 하며 사랑과 결혼을 이미 포기했을 시기였는 데다가, 사랑과 결혼을 한다면 당연히 한국여자랑 하지 네팔 여자를 할 마인드 자체가 없었다. 인연이 되어 서로에 대한 정보를 교환하게 되었다. 아내 에미마가 나의 사정과 형편의 다 듣고도 믿음으로 나를 사랑해 주기로 손을 내밀어 주었다. 첫사랑 때 이상형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여자'이었고, 2030 청춘의 때 이상형은 '예쁘고 착한 여자'이었다. 에미마를 소개받았던 마흔 즈음에 이상형은 더 이상 예쁘고 착한 사람이 아니라,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이었습니다. 에미마는 자기가 나를 사랑해 주면, 하나님께서 나를 치료해 주셔서 일으켜 세워 주실 것이라는 기도응답을 받고, 나를 사랑하기로 결정하였다. 실제로 만나본 아내 에미마는, 내가 이전에 사랑했던 그 어느 여자들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쁘고 착하고, 나를 사랑해주는 여자였다. 내 인생의 최고의 사랑 에미마가 먼저 나를 사랑하여 나에게 손을 내밀어 주었다.


카카오톡으로 연애를 하던 우리는, 네팔 가는 경비가 만만치 않기 때문에, 에미마를 처음 만나러 부모님과 함께 네팔에 들어 갔을 때 약혼식은 해야 했다. 2018년 6월부터 카카오톡을 연애하기 시작해서, 네팔 카트만두에서 9월 10일 양가 부모님을 모시고 상견례 겸 약혼식을 하고, 그다음 날 우리 부모님과 함께 히말라야 안나프루나가 있는 포카라로 약혼 여행을 갔다. 12월에 부모님과 함께 다시 네팔에 들어가 그달 18일 네팔에서 결혼식을 하였다. 아내 비자 수속과 대학원 논문 통과를 위해 네팔에서 6개월쯤 신혼생활을 하다가 손잡고 한국에 함께 들어왔다. 네팔에 사시는 에미마 부모님을 한국으로 초청해서 수원에서 2019년 6월 한국 결혼식을 올렸다. 우리는 네팔에서 한 번, 한국에서 한 번, 총 두 번의 결혼식을 했다.




에미마와 수원 한옥카페에서 찍은 나의 최애 사진 ⓒ 최다함


다함스토리


지금 비록 가난하지만, 사랑과 행복을 찾았다.
경제적 자유를 얻어 선한 영향력을 흘려 보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내가 쓰고 있는 이 책의 주제는 나 최다함이 살아온 이야기 <다함스토리>이다. 에미마를 만나기 전 사랑이란 무지개를 찾아 여행해 온 이야기, 마침내 에미마를 만나게 되기 까지의 이야기 등을 나누고 싶다. <다함스토리>는 사랑을 찾아 헤매다가, 마침내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쁘고 착한 아내 에미마를 만나,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며 가정을 이루어 행복하게 살아가는 스토리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나의 첫 차, 첫 수리, 백만 원 깨지게 생겨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