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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다함 Oct 24. 2021

소녀 사랑

1996년 3월 고등학교 2학년이 되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던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소녀를 사랑하게 되었다. 나는 기독학생반 부회장이었고, 소녀는 기독학생반 회장이었다. 학교 동아리 '기독학생반' 회장 부회장을 함께 하면서, 나의 심장은 소녀를 향해 뛰기 시작했다. 소녀를 향한 나의 심장박동의 유통기한은 7년이었다.


예수님께서 인류를 사랑하사 자신의 몸을 십자가의 달리신 그 사랑처럼 나는 소녀를 사랑하고 싶었다. 이현세 만화 <공포의 외인구단>의 까치 오혜성이 엄지를 자신의 인생이 파멸하기까지 사랑했던 것처럼 나는 소녀를 사랑하고 싶었다. 소녀에게 나는 예수님도 오혜성도 아니었을 뿐이다. 소녀 또한 엄지가 아니었을 뿐이다.


학교 정규 시간표에 한 주에 한 시간 동아리 시간이 있었다. 내가 다니던 학교는 공립학교였다. 교회 다니는 선생님께서 기독학생반을 개설하셨고, 원래 교회 다니던 학생들이 기독학생반에 모였다. 믿지 않는 학생들이 기독교에 관심을 가지게 되어 가입한 것은 아니었다. 학교 안에 교회이자 크리스천 학생의 커뮤니티였다. 기독학생반의 같은 학년 동기와 일 년 선배 중 마음을 같이한 일부가 모여 학교 기독학생반과는 별개로 우리끼리 독립적인 사조직 찬양선교단을 조직했다. 우리가 다니던 학교를 복음화하겠다는 야심 찬 목적으로 찬양선교단을 창단했다. 토요일 오전 수업 끝나고 학교 근처 교회에 모여 찬양연습을 했다. 쉬는 시간 학교의 빈 공간을 아지트 삼아 수시로 모였다. 야간 자율학습 끝나고 학교 앞 교회에 모여 기도회를 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방학 때 학교 근처 교회를 빌려 친구 가족 초청해서 찬양콘서트를 했다. 학교 축제 때 무대에 나가서 찬양과 율동을 했다. 그리고 신앙으로 모인 남녀 학생들끼리 함께 떡볶이를 먹으러 다녔다. 


소녀와 나는 1학년 때부터 기독학생반과 찬양선교단 멤버로 알고는 지냈지만, 그때까지는 소녀를 향한 아무런 마음이 없었다. 동아리 친구 중 하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소녀를 향한 설렘이 시작되었던 것은, 2학년 때 소녀가 회장 내가 부회장 활동을 하면서부터였다.


첫사랑 소녀는 예쁘거나 착하지는 않았다. 키가 작았다. 눈에 뭐가 씌었던 나에게는 귀여웠다. 시간이 흐르고 내 주제도 모르고 눈만 까마득히 아져, 나의 이상형이 '예쁘고 착한 여자'가 되었지만, 그때는 사람의 그 마음과 중심만 보았다. 계산기를 두드려 의식적으로 시작한 사랑이 아니라, 나도 모르게 어느 순간 소녀를 사랑하고 있었지만, '하나님 사랑'이 꿈이던 나에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소녀'가 무의식적으로 끌렸지 싶다.


소녀는 평범하기보다 비범했다. 학교 기독 학생반과 찬양선교단에서만 활동했던 것이 아니었다. 안양 지역 전체의 청소년 찬양선교단체에서도 활동했다. 소녀는 찬양과 율동에 능했다. 안무를 따라 할 뿐 아니라, 안무를 직접 짜기도 하고, 다른 교회나 찬양선교단에 가서 안무 코칭을 하기도 했다. 고등학교 때 소녀의 꿈은 크리스천 뮤직 CCM 가수가 되는 것이었다. 우리가 아마추어였다면, 소녀는 프로였다. 소녀의 집에서 반대를 해서 지원을 받지 못하고, 야간 자율학습 때 도시락을 일찍 까먹고 음악실을 빌려 입시를 위한 보컬 연습을 했다. 소녀가 음악실에서 연습을 할 때면, 나는 음악실 뒤에 앉아 소녀를 축복하는 기도를 돌아갔다. 어떤 날은 음악실 문을 잠가 주고 키를 교무실에 가져다 주기도 했다.


소나기가 오면 청소시간에 학교 앞 집에 비를 맞고 달려가 우산을 가져다 소녀의 여자 반 교실 앞에 가져 주고 돌아왔다.


소녀의 생일 때 선물하려고 작지만 페이지 수가 많은 노트 한 권을 샀다. 오직 소녀 한 명의 독자를 위한 글을 매일매일 1년을 썼다. 일기도 있고, 그림도 있고, 시도 있고, 소설도 있었다. 한 페이지 분량의 작은 패러디 동화 하나를 썼다. 그 내용이 아직도 생생하다. 마귀할멈이 거울에게 물었다. "거울아, 거울아!  세상에서 가장 예쁜 여자가 누구니?" 아직 세상 물정을 모르고 순수하고 순진했던 거울은 마귀할멈의 질문에 마귀할멈 귀에 듣기 좋은 대답으로 거짓으로 둘러대지 못하였다. 세상에서 가장 예쁜 소녀의 이름과 신상을 댔고, 마귀할멈이 대로하여 성 안의 모든 거울이 다 깨졌다는 잔혹동화다. 각종 색상의 볼펜 색연필 파스텔 등을 사용하여 매일매일 일 년 동안 노트 한 권에 글을 썼다. 결국 그 노트는 보내지 못한 편지가 되었다. 그 노트를 전달했더라면, 그 작은 노트에 아로새겨진 나의 마음의 무게로 나의 역사가 바뀌었을까?


학교에서 서울랜드 캠핑장으로 야영을 갔다. 5월 초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산이라 새벽에는 한 겨울처럼 추웠다. 다른 친구들과 달리 선생님의 말씀을 잘 들은 나는, 나를 위한 침낭 하나와 소녀를 위한 겨울 파카 하나를 준비해 갔다. 그걸 배낭에 싸 가지고 야영장까지 메고 가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른다. 밤이 되어서 여학생 구역의 소녀의 텐트로 빨간색 겨울 파카를 가져다주었다. 소녀는 고맙다며 미소를 지었지만, 소녀의 텐트 안에서는 다른 소년들이 와서 놀고 있었다. 돌아오는 길, 왠지 모를 쓸쓸한 공기가 싸하게 밤하늘을 스쳐갔다. 다음 날 아침 소녀가 밤새 따뜻했다며 고맙다며 돌려준, 소녀의 체온이 닿은 빨강 파카가 기분이 좋았다. 아침식사 때 여학생들이 남학생들의 텐트에는 음식을 가져다 주기도 했다. 아침에 신선한 공기에 퍼지는 맛있는 음식 냄새가 내게는 씁쓸했다.


고3을 앞둔 고2의 마지막 겨울이었다. 그제야 소녀에게 내 마음을 전했다. 주변의 모든 친구들이 소녀를 향한 나의 마음을 다 알고 있었는데, 소녀는 나의 마음이 좋은 친구로서의 마음으로 생각했다고 했다. 알면서도 모른 척했을 수도 있고, 진짜 몰랐을 수도 있다. 소녀의 주변에는 남녀와 노소를 가리지 않고 사람이 많았다. 소녀에게 나도 그중의 하나였는지도 모른다. 소녀는 이미 결혼까지 생각하고 진지하게 사귀는 남자 친구가 있었다. 둘은 결국 오래가지 못하고 깨진 것으로 알고 있다.


첫사랑 소녀를 7년 동안 짝사랑했지만, 자주 만나며 가깝게 지낼 수 있었던 것은, 동아리 회장 부회장 활동을 함께 했던 2학년 딱 1년뿐이었다. 3학년 때도 같은 학교 같은 층에 있었지만, 대학입시 준비로 동아리 활동이 끝났다. 남녀공학 남녀 각반이어서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없기도 했다. 졸업 이후에는 말할 것도 없었다. 재수할 때 우연히 길에서 한 번 마주치고, 몇 차례 전화를 하고, 싸이월드에 몇 개의 글을 남겼을 뿐이었다.


소녀와 나 둘 다 재수를 했다. 소녀는 재수를 하면서 전공을 바꾸어 대학에 진학했다. 집안의 반대로 꿈을 접었는지, 꿈이 바뀌었는지, 둘 다였는지는 모른다. 소녀는 같은 대학 같은 과에서 학사-석사-박사를 스트레이트로 하여 지금은 대학교수가 되었다. 내 마음에 더 이상 소녀의 대한 그리움이 한 터럭이라도 남아있지는 않다. 옛 친구가 뭐하고 지내나 궁금해질 때면, 네이버 검색과 구글링으로 근황을 서치 해 본다. 어느 대학 어느 전공 교수가 된 지점에서 검색이 되는 소녀의 정보 업데이트가 멈추었기 때문에, 그 이후로는 더 이상 옛 소녀가 뭐하고 내는지 궁금해하지 않는다.


재수를 하고 강원대 영어교육과에 입학했다. 대학교에 입학한 99년 3월에 소녀에게 전화를 했다. 부담스러울 테니 더 이상 연락하지 않겠지만, 널 잊지 않고 사랑하고 있는 나의 마음만을 기억해 달라고 했다. 대학교 1학년 때 아직 조울증이 오기 전이었다. 학과 생활이나 전공과 연관된 필수나 교양 과목보다, 우리 과와 상관없는 컴퓨터학과 교양수업을 열심히 들었다. 홈페이지를 만드는 수업이었다. 어머니께 돈을 타서 사설 컴퓨터 디자인 학원도 다녔다. 조잡한 수준의 홈페이지를 만드는 수준이었지, 웹디자이너나 웹프로그래머로서 제대로 된 수준의 홈페이지를 만들 수 있는 수준에 이르지는 못했다. 때 홈페이지 만드는 기술을 공부했던 이유는, 소녀에게 나의 사랑을 고백하는 홈페이지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와 '어린 왕자'의 이미지와 스토리를 빌려와, 소녀를 위한 '아낌없이 주는 나무'와 '어린 왕자'가 되고 싶다는 내용의 홈페이지를 만들었다. 나는 소녀에게 언제까지나 너를 기다리는 나를 기억해 달라고 했지만, 소녀는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내가 자신을 그리워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고2 때 소녀를 사랑하게 되면서, 나는 항상 소녀를 생각했지만, 소녀는 내 생각을 전혀 않았을 것이다.


재수하고 1학년 마치고 군대에 갔다. 1980년 1월 생으로 빠른 생일이라, 2학년 마치고 같은 과 동기들 갈 때 같이 가는 것이, 당시 나의 정상적인 입영 시기였다. 국가에서 부르기 1년 전에 내가 스스로 병무청에 자원입대를 신청했다. 군대 간다고 하면 소녀가 카페에서 아메리카노 한 잔 함께 마셔 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소녀와 아메리카노 한 잔이면 소녀를 향한 갈증이 해갈될 것이라 생각했다. 소녀가 군대 가는 나와 커피 한 잔 함께 마실 수 없었던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그때까지는 내 사랑을 상대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고백을 하고 거절을 당했을 때, 더 이상 마음을 표현하지 않고, 멀리 떨어져 내 마음속으로 그리워했다. 군대에서 조울증에 걸리기 전까지는, 상대가 나의 사랑을 원할 때 적당한 거리두기가 되었다. 조울증 발병 후 내 정신을 붙들지 못했을 때는, 때때로 원하지 않는 연락을 하여 상대가 곤란했을지도 모른다. 첫사랑의 유통기한은 7년이었다. 조울증에 걸리지 않았더라면, 소녀를 향한 짝사랑도 그렇게 비정상적으로 오래가지 않았을 것이다. 군대를 제대하고 소녀를 훌훌 털어버리고, 내 삶을 살며 새 사랑시작했을 것이다. 첫사랑의 실패로 조울증이 오기도 했지만, 조울증이 사랑의 감정을 병적으로 증폭시켰다.


남자는 첫사랑을 잊지 못한다는 말이 다. 세상만사가 그렇듯 이 또한 케이스 바이 케이스다. 재가 될 때까지 그리워했기 때문인지, 사귄 적도 없는 혼자만의 짝사랑이었기 때문인지, 한 터럭의 감정도 남아있지 않다. 여자 보는 눈과 이상형도 달라졌다. 사랑 때문에 내 인생과 청춘을 잃어버린 것 또한 이제는 천추의 한이다. 사랑의 꽁무니를 쫒는 대신 나의 삶을 살았더라면,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사랑이 찾아오지 않았을까?


고2 때 소녀는 내 추억 속에서나 소녀이지, 이미 이상 소녀가 아니다. 하나님을 사랑했던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소녀를 사랑했고, 상사병은 조울증이 되었고, 2030 청춘을 잃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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