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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다함 Oct 24. 2021

목사님이 되지 않은 이유

고3 때 반 친구들과 담임 선생님은 내가 목사님이 될 것이라 생각했다. 교회에서는 중고등부 회장을, 학교에서는 기독학생반 부회장을 했다. 학교에서도 눈을 감고 기도하고 밥을 먹었고, 성경을 읽고 공부를 했고, 학교 복도에서도 찬송가를 흥얼거리며 길을 걸었다. 고3 담임선생님은 기독교인이나 특정 종교인은 아니셨지만, 모든 종교에 우호적이신 종교적인 분이셨다. 졸업식을 마치고 학부모를 교실 뒤편에 모시고 마지막 작별인사를 나눌 때였다. 담임선생님께서는 나의 기도로 고등학교 3년을 마치자고 제안하셨다. 내가 다니던 학교는 미션스쿨이 아닌 공립학교였는데, 나는 반에서 목사님 같은 존재였다.


졸업 후 특별한 꿈은 없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그 자체가 꿈이었다. 목사님은 안 될 것이라고 생각한 것도, 될 것이라고 생각한 것도 아니었다. 당시 기독 학생과 학부모 사이에서 '하나님의 대학'이라고 불리던 경북 포항의 한동대학교에 가고 싶었다. 첫사랑에게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내 삶을 살았더라면, 가고 싶었던 한동대에 진학했었을는지도 모른다. 그랬었더라면, 내 삶이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한동대를 졸업하고, 신학대학원에 진학하고, 기독교 세계에서 일찌감치 자리를 잡았을지도 모른다. 인생의 실패로 더 좋은 오늘이 왔다는 해석은 옳지 않다. 내가 원하는 대로의 삶이 풀렸더라면, 직장과 사회와 가정에 일찌감치 자리 잡고 무난히 살고 있을 것이다. 지금 아내 에미마와 아들 요한이와 행복하게 살고 있으니 후회는 없을 뿐이다.




사실, 고3 때 총신대 신학과 입학원서를 쓰기는 했었다. 신학과 원서는 담임목사님과 교단장의 추천서를 받아야 했다. 당시 나는 안양의 큰 교회에 다니고 있었다. 나는 담임 목사님을 알고 있었지만, 담임 목사님께서 나를 알고 계셨는지는 모른다. 입학원서에 구원의 확신에 대한 신앙고백을 적는 이 있었다. 나는 성경공부를 통하여 예수님을 나의 마음에 모시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성경말씀을 근거로 예수님을 믿고 천국에 가는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있다고 썼다. 다만, 구원의 확신은 분명히 있으나, 가끔 내 마음을 스치고 지나가는 의심의 구름이 있으니, 신학교에 가서 공부하여 답을 찾아보겠다고 썼다. 담임목사님께서는 납득이 가는 설명을 해주시지 않은 채, 그렇게 쓰면 신학과 입시에 떨어진다고 고치라고만 말씀하셨다. 담임목사님께서 성경공부를 다시 정확하게 시키시던지, 입학원서는 솔직한 고백이 아닌 심사자가 원하는 답을 써야 한다는 입시전략을 코칭해 주셨어야 했다. 순수했던 나는 담임 목사님의 경륜을 신학교를 가기 위한 거짓말 하라는 것으로 오해했다. 그렇게까지 해서 신학과에 가고 싶지는 않았다. 목사님 추천서에 X자를 긋고, 신학과에서 영어교육과로 전공을 바꾸어 총신대에도 원서를 넣기는 했다. 애초에 총신대에 가고 싶었던 것은 아니고, 한동대에 떨어졌을 경우를 생각하여 총신대에도 원서를 냈다.


한동대는 떨어지고 추가합격으로 총신대 영어교육과에 붙었다. 총신대 캠퍼스가 옆 학교 숭실대 화장실보다 작아 못 가겠다는 말도 안 되는 변명을 하며 재수를 했지만,  그런 이유에서는 아니었다. 총신대 추가합격 통지를 받았을 때는, 재수해서 한동대 가려는 마음을 노량진 입시학원 일타강사 출신의 목사님께서 운영하시는 기숙학원에 이미 입소한 후였다. 추가합격을 하고 총신대에 가지 않은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총신대 신학과 원서 작성과 관련된 해프닝 때문에, 총신대에 대한 확증 편향을 가지게 되었다.


지금에 와서 돌아보면, 한동대 가려고 재수할 것이 아니라, 총신대 영어교육과에 갔어야 했다. 재수하고 한동대에 다시 한번 떨어졌고, 강원대 영어교육과에 갔다. 강원대 영어교육과가 총신대 영어교육과보다 입시 커트라인은 높지만, 그때 나에게는 총신대 영어교육과가 어울렸다. 당시 시점에서 내가 가고 싶었던 한동대보다 총신대 영어교육과가 내게 더 맞았다. 원하는 대학 가보겠다고 시간과 돈을 들여 1년 더 고생해서 얻은 것보다 잃은 게 더 많았다. 내가 있는 지금 여기에 자족하고 충실하여도 또 다른 좋은 길이 열리는데, 그때는 그것을 알지 못했다.




서른 살 신앙을 잃어버리고 무신론자가 되었다. 소녀의 대한 사랑을 허락하지 않은 하나님에 대하여 화가 난 것은 아니었다. 세상에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이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세상이 요지경이고 내 인생이 슬픈 것은, 하나님이 무능하거나 나에게 아무 관심이 없거나 사악한 존재여서 아니라, 애초에 하나님이란 초월적 존재가 없는 것뿐이라고 생각했. 인간 고통의 문제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 문제는하나님의 부재에 대한 빼도 박도 못하는 결정적인 증거로 보였다. 내가 부정한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하나님을 보았다고 주장하는 자칭 선지자들이었다. 하나님을 부정하게 된 또 다른 결정적 이유는, 내가 이과가 아닌 문과라 과학적인 언어로 신의 부재를 설명하기는 어려웠지만, 현대인의 상식으로 성경과 기독교가 난센스였다. 성경을 수능 언어영역 지문처럼 읽으면, 역사서나 과학서와 같은 장르가 아니라, 사람과 신이 연애를 하는 그리스 로마 신화나, 곰이 쑥과 마늘을 먹고 인간이 되는 단군신화와 같은 장르였다.


당시 국내 최대 무신론 커뮤니티에서 논객으로도 활동했다. 오프라인 모임에도 나가 기독교를 포함한 모든 종교와 비상식적 사고를 비판하며, 무신론자들과 친목을 도모하였다. 한 번 무신론자는 대개 평생 무신론적 신념이 변하지 않지만, 무신론자는 고양이와 같아서 그 커뮤니티가 교회처럼 역사와 전통을 가진 지속적인 모임이 되지 못한다. 잠깐 필요에 따라 활성화되었다가, 각자 삶을 살면서 소멸된다. 개인적으로 여전히 무신론적 신념을 가지고 살아가지만, 천국을 믿지 않는 사람은 나 하나 살아가는 것과 한 번뿐인 인생 즐기는데 바쁘지, 일주일에 한 번씩 모여 함께 노래를 부르고, 독서토론을 하고, 삶을 나누고, 식사를 함께 할 필요가 없다.


목사 아들이 무신론자로 사니 부모님의 새벽기도가 길어지셔서부모님께서 이 세상에 계시는 동안만 교회에 다녀드리기로 했다. 조울증으로 긴 방황으로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해도, 늘 사랑해주시고 기도해주시고 언젠가 회복될 것이라고 믿어 주셨던 분들은, 우리 교회 식구들밖에 없었다. 그런 이유로 교회로 돌아왔다. 믿음이 생겨서 돌아왔던 것은 아니었다.




세상에서 나를 사랑해준 유일한 여자 아내 에미마는 독실한 크리스천이다. 술을 마시고 안 마시고가 신앙의 근본적 척도는 아니지만, 아내는 태어나서 단 한 방울의 술도 안 마셨다. 아내가 어렸을 때 힌두교인이었지만, 매주 사원에 나가 동물의 피로 제사를 드리는 독실한 힌두교 신자는 아니었다. 평생 단 한 번도 힌두교 사원에 가본 적도 없었고, 명절 때 이마 위에 빨간 점찍고 춤추고 민족 축제를 즐기는 정도의 문화적인 힌두교 신자였다. 동네 교회에 재미 삼아 다니다가, 17살에 하나님을 만나 영접하고 독실한 크리스천이 되었고평생 술을 입에 한 방울도 대지 않았다.


나 또한 술을 즐겨 마시는 사람은 아니었다. 혼자 순대국밥 먹으며 맥주나 막걸리 한 병 시켜 반주로 마시는 정도였다. 술보다는 사람들과 술 마시는 분위기가 좋았다. 회식이 있을 때나 친구 만날 때만, 술판이 끝날 때까지 잔을 놓지 않았을 뿐이다. 말술까지는 아니었지만, 술판이 끝날 때까지 살아남는 정도의 주량은 되었다.


아내와 결혼 후 안 마신다. 결혼 초기에 정말 한 잔 하고 싶은 날이 있어, 마트에 심부름을 갔을 때 맥주 한 캔 마시고 입을 쓱 닦고 왔다. 아내가 킁킁킁하며 '오빠, 이거 무슨 냄새야?' 하고 들키고 난 후에는 그렇게 마시는 것 마저도 끊었다.


지금은 부모님이나 아내를 위해 교회를 다녀주는 것은 아니다. 아내를 만나 결혼한 이후 아내가 사랑하는 예수님과 교회를 사랑하게 되었다. 아내를 만난 후 다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신앙으로 돌아갔다.




지금 나는 그때 내가 아니라, 총신대가 어울리지 않지만그때는 총신대가 어울렸다지금의 최선은 아니지만, 그때의 최선이었다.  


아내 에미마에게 꿈이 뭐냐고 물었더니 사모님이라고 했다. 아내가 사모님이 되려면 내가 목사님이 되어야 한다. 잠깐 고민을 해보았는데 이미 지나간 길이다. 현재 나의 정체성은 교회를 사랑하고 존중하는 세속인이다. 아내와 손 잡고 교회에 다니지만, CCM을 듣고 성경을 보고 기도하는 것보다, KPOP을 듣고 밀리의 서재를 보고 생각을 하는 게 좋다. 목사님이 되기보다 작가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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