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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다함 Oct 19. 2020

목사님이 되지 않은 이유

고등학교 친구들과 선생님께서는 내가 목사가 될 줄 알았다

강릉역 주변 공원에서 아내와 함께 ⓒ 최다함


신학과

원서를 썼다가


친구들과 담임 선생님은 내가 목사님이 될 줄 알았다.
그 길로 곧장 갔었더라면, 지금 다른 삶을 살고 있을까?


고등학교 친구들과 담임 선생님은 내가 목사님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셨다. 그때 나는 미래에 무엇이 되어야지 하고 딱히 정해 놓은 것은 없었으나, 목사님도 내 미래의 진로로 고려하는 선택지 중 하나였던 것은 맞다. 사실 나는 그 당시 독실한 크리스천 학부모들과 학생들이 하나님의 대학이라고 생각했던 포항의 한동대학교에 가는 게 꿈이라면 꿈이었다. 교회 활동이나 기독교 동아리 활동을 줄이고 공부에 더 집중하고, 짝사랑이었던 첫사랑에 연연하지 않고 공부에 몰두했다면, 한동대를 갈 수 있었을 것이다. 한동대 졸업하고 신학대학원을 진학했을지도 모른다. 소녀에 대한 사랑에 목숨 걸지 말고 내 길을 걸어갔었더라면, 나중에 소녀가 나를 찾아올 수도 있었을지도 모르고, 더 예쁘고 착하고 스마트하고 멋진 여자가 나에게 팔짱을 끼며 "오빠" 했을지도 모른다. 만약 그랬었더라면 에미마를 만나지 못했을 테지만, 좀 더 빠르고 편안한 인생을 살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인생을 길게 보면, 가장 빠르게 갔던 사람이 가장 앞에 서 있는 것도 아니고, 가장 느리게 갔던 사람이 가장 앞으로 나서서 따라잡을 수 없는 초격차를 내기도 하더라는 것이다. 빠르게 가는 사람보다 느리게 가는 사람이 좋다는 이야기는 아니고, 자기 스피드대로 가면 되는 것이다. 넘어져서 혼자 일어날 수 없다 할지라도 절대 낙심하지 않고 끝까지 살아남으면, 언젠가 좋은 날이 온다는 것이다.


사실, 고3 때 총신대학교 신학과 원서를 썼었다. 신학과 원서를 쓸 때는 담임목사님과 교단의 노회장의 추천서를 받아야 한다. 당시 나는 상당히 큰 대형교회에 다니고 있었다. 나는 담임 목사님을 알고 있었지만, 담임 목사님께서는 나를 알고 계셨는지 모르고 계셨는지 모른다. 주일학교 중고등부 학생회장을 하며 교회에 뻔질나게 드나들었으니, 내 얼굴이나 이름 정도는 알고 계셨을지도 모른다. 내가 교회 학생회 회장을 할 때 담임 목사님 딸도 임원이었기 때문에, 딸을 통해 저를 알고 계셨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목사님 딸은 어느 날 갑자기 유학을 갔다 얼마 안 되어 돌아와서, 이른 나이에 피트니스 클럽을 운영하는 다른 큰 교회 목사님 아들이랑 결혼했다나 하는 정확하지 않은 그런 풍문을 흘려 들었다. 목사님 딸이 내 눈에 예뻐서 기억에 남는 것은 아니었다. 그냥 교회 동생이었고 학생회 임원이어서 같이 활동을 하며 교회 안에서 친하게 지냈을 뿐이지, 내 눈에 예쁘게 보이지는 않았다. 내가 사랑했던 소녀 또한 같은 동아리 회장 부회장 임원으로 동아리 친구로서 친하게 지냈을 뿐이지, 나를 특별하게 생각했었던 것은 아닌 것과 마찬가지였지 않았나 생각해 본다.


신학과 원서를 쓰는데 구원의 확신에 대한 신앙고백을 하라는 질문이 있었다. 나는 성경공부를 통하여, 예수님을 영접하고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는 말씀에 근거하여, 예수 천당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있다고 썼다. 다만, 구원의 확신이 있기는 있는데, 가끔 의심의 구름이 내 마음을 지나간다고 썼다. 신학교 가서 공부하여 그에 대한 답을 찾겠다고 썼다. 담임목사님께서 직접 성경공부를 제대로 다시 시키던지, 아니면 입학원서는 솔직한 게 좋다고 생각나는 그대로 쓰면 안 되고, 심사 교수가 듣고 싶은 답안을 써야 한다는 입시전략을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잘 설명해 주시지 않으셨다. 담임목사님께서는 그렇게 쓰면 떨어진다고 이렇게 이렇게 고치라고만 말씀하셨다. 지금 돌아보면 목사님의 조언이 신학과 입시전략으로는 맞았는데, 왜 그런지에 대한 설명을 하지 않고 그런 말씀을 하시니, 나는 그 말이 거짓말을 하라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거짓으로 대학교와 신학과에 가고 싶지는 않았다. 담임목사님과 노회장 목사님의 추천서를 파기하고, 총신대에는 신학과에서 영어교육과로 과를 바꾸어 원서를 넣었다. 총신대 영어교육과에 추가합격으로 붙었는데, 안 가고 재수를 했다. 부모님께는 총신대가 옆에 있는 숭실대 화장실 보다 작아서 가고 싶지 않다는 말도 안 되는 이유로 변명을 늘어놓았지만, 담임목사님과의 해프닝으로 총신대 전체에 대한 내 생각이 부정적이어서 재수를 하였다. 그것이 결정적이었던 것은 아니고, 이미 한 번 재수해서 포항의 한동대학교에 가려는 마음을 다잡고, 노량진 입시학원 일타강사 출신의 순복음 교단 목사님께서 운영하시는 기숙학원에 입소했던 때 추가합격 통지를 받았기 때문에, 한 번 결정한 것은 유연하게 바꾸지 못했던 고지식했던 나는 재수를 밀어붙였다. 




아내와 강릉 안목해변에서 ⓒ 최다함


무신론자가

되었다


하나님이 원망스러워 무신론자가 되었던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론에 이르렀던 것이다.
하나님을 부정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있다고 말하는 선지자를 부정했었던 것이다.


20대 때는 대학에 가면서 과 선후배 동기랑 술도 마시고, 교회 음악이 아닌 세속 음악을 듣고 하였다. 교회를 떠난 것은 아니고 교회 주위를 맴 돌기는 했는데 나일롱 신자가 되었다. 예수를 신이 아닌 위대한 인간 정도로 생각하는 자유주의 교회에 다녔던 것도 아니고 복음주의 보수 교회에 여전히 다녔지만, 내 개인의 신앙은 자유주의적으로 변했다. 자유주의 신학을 책으로 공부했던 것은 아니고, 세속화되다 보니 누구에게 배우지 않고 스스로 그렇게 흘러갔다. 정확히 말하자면 자유주의 신앙은 아니었고, 기독교 사회주의 쪽에 가까웠다. 문재인 정부에서 대한민국 좌파의 본질을 경험하면서 지금은 자유 시장 법치를 모토로 하는 자유민주주의 보수우파로 전향하였지만, 20대 30대 때는 요람부터 무덤까지 복지를 책임지는 사회민주주의로 가야 한다는 진보좌파였다. 나는 운동권 이후 세대이기 때문에, 마르크스 레닌주의나 김일성 주체사상의 세례를 받지는 않았지만, 북유럽식 사회민주주의와 기독교 사회주의와 적극적인 보편적 복지국가론에 영향을 받은 진보좌파였다. 내가 진보좌파였을 때도, 문국현이나 안철수를 적극적으로 지지하기도 했는데, 그때 나는 진보좌파로서 그분들을 지지했다. 나는 광장에서 진보좌파 운동을 해왔던 정치리더 보다, 전문경영인 또는 오너로서 진보좌파적 신념을 경제계에서 실천한 정치리더들을 신뢰했다. 20대 때는 나일롱 신자였기는 하지만, 때때로 목사가 될 생각도 없지 않았던 것 같다. 교회 주변에서 맴돌며 살아온 사람들은 신앙이 깊고 하나님에게 소명을 받은 것도 아닌데, 목사님이 되어야겠다는 싶은 충동이 들기도 한다.


서른 즈음 신앙을 버리고 무신론자가 되었다. 무신론자가 된 이유는 소녀의 대한 사랑을 허락하지 않으신 하나님께 화가 나서 실망하여 돌아선 것은 아니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는데, 신 하나님께 실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란 초월적 존재가 부재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세상이 요지경인 것은 하나님이 없다는 증거라고 결론지었다. 세상이 이렇게 고통스럽고, 아무리 사랑해도 그 사랑이 상대방에게 전달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이 악하거나 무능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애초에 신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결론지었다. 하나님을 부정한 게 아니라, 하나님의 목소리를 들었다는 선지자들의 일방적인 주장을 부정했던 것이다. 그보다 더 근본적인 이유가 있었다면, 인문계라서 잘 모르는 과학까지 동원하지 않더라도, 현대인의 상식으로 성경과 기독교 신학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30대 초반에 나는 한국 무신론자 모임이라는 국내 최대 무신론 모임에 참여하였다. 무신론 모임 온라인 사이트에서 활발하게 활동했던 주요 논객 중 하나였을 뿐 아니라, 오프라인 상에서 정모와 번개에도 나가서 무신론자들과 기독교뿐 아니라 모든 종교와 비이성적 비과학적 사고들을 비판하며 교제하였다. 한 번 무신론자가 되면 그 신념이 평생 변하기 쉽지 않지만, 무신론 그룹은 고양이들과 같아서 무신론자들의 모임이 교회처럼 지속되지가 않았다. 잠깐 시대적 트렌드에 따라 활성화되었다가 각자 삶을 살면서 모임은 소멸되었다. 물론, 한 번 무신론자는 거의 평생 개인적으로 무신론의 신념을 가지고 살아가지만 말이다. 내세에 천국을 믿지 않는다는 사람들이 자신 살아가는 것도 바쁜데, 일주일에 한 번씩 모여서 함께 노래를 부르고 대화를 나누고 공부를 하고 책을 읽으며 소감을 나누고 함께 식사를 하고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나는 아내와 사진 찍는 것을 좋아하는 포토그래퍼이다 ⓒ 최다함


다시 교회로

돌아오다


부모님과 아내의 사랑으로 교회로 믿음으로 다시 돌아왔다.
가족을 위해서 교회 다녀주고 믿는 척을 하는 것은 아니고,
아내를 만난 후에 하나님과 기독교와 교회가 다시 좋아졌다.

 

무신론자로 살다가 목사님이신 아버지와 사모님이신 어머니께서 슬퍼하시는 것 같아서, 교회에는 다녀드리기로 했다. 부모님 교회 다니다가 부모님 교회 설교가 북유럽식 사회민주주의 진보좌파였던 나에게 보수적으로 느껴져서, 신학은 보수적이나 정치성향은 급진적으로 진보적인 복음주의 좌파 교회를 찾아다녔다. 그런 교회는 말로는 복음적이지만, 실제로 그들의 세계관은 진보좌파 사회주의 공산주의 또는 세속적 인본주의와 무신론자의 생각과 똑같기 때문에, 무신론자였던 내가 듣기에도 전혀 부딪히지 않았다.


그러다가 아버지가 교회 담임목사님인데 아들이 다른 교회 다닌다는 것을 부모님께서 힘들어하시는 것 같고, 정치노선은 다르지만 내가 방황하고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해도, 늘 사랑해주시고 기도해주시고 언젠가 회복될 것이라고 믿어 주셨던 분들이 우리 교회 식구들밖에 없었다. 그런 이유로 원래 다니던 교회로 돌아왔는데, 믿음이 생겨서 돌아왔던 것은 아니었다. 부모님 살아계실 때만 예수님 믿는 척하고, 세상 떠나시면 한국의 리처드 도킨스가 되어서 종교로부터 대한민국 국민을 해방시켜야지 하는 생각을 했었다부모님을 위해서 교회 다녀 드리고 믿는 시늉만 해드렸다.


나를 사랑해준 유일한 여자 에미마가 독실한 크리스천이다. 술을 마시고 안 마시고가 신앙의 척도는 아니지만, 아내는 태어나서 단 한 방울의 술도 안 마셨다. 아내가 어렸을 때는 힌두교인이었다. 매주 힌두교 사원에 나가 동물의 피를 흘려 제사를 드리는 독실한 힌두교 신자도 아니었을뿐더러, 평생 단 한 번도 힌두교 사원에 가지는 않았다고 한다. 명절 때 이마 위에다가 빨간 점찍고 축제하는 정도의 힌두교 신자였다. 그러다가 동네 교회에 먹을 것 얻어먹으면서 놀러 다니다가, 17살에 하나님을 만나 영접하고 독실한 크리스천이 되었는데, 태어나서 평생 술을 입에 대지 않았다고 한다. 나는 대학 입학 이후에도 스스로 술을 마시고 싶어 미신 적은 별로 없으나 , 회식을 하거나 사람들과 만날 때는 술판이 끝날 때까지 술잔을 놓지 않았었다. 말술은 아니었지만 술판이 끝날 때까지 술잔을 꺾으며 끝까지 살아남았었다. 아내와 결혼 후에는 술을 안 마신다. 정말 마시고 싶을 날에는, 아내 모르게 마트에 가서 맥주 한 캔 마시고 왔는데, 지금은 그마저도 아내가 즐거워하지 않는 것 같아 마시지 않는다. 아내를 위해 억지로 믿어 주는 척하는 것은 아니고, 아내를 만나고 결혼한 이후 다시 아내가 사랑하는 예수님과 교회를 사랑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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