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사랑하던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소녀를 사랑하게 되었다
과거의 사랑과 인생이 실패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최고의 사랑 아내를 만나게 되었다.
사랑하는 아내 에미마와 행복하게 살고 있는 지금 첫사랑 소녀에 대한 이야기 하는 것은 미련이 남아서는 아니다. 혹자들은 남자들에게 첫사랑은 잊히지 않는다고 하지만, 그것 또한 케바케 케이스 바이 케이스이다. 나와 같은 경우에는, 더 이상 미련이 없을 만큼 온 마음을 다 쏟아서 한 터럭의 감정도 남아있지 않기도 하고, 그 사이에 여자를 보는 눈과 이상형이 달라졌다. 추억 속 옛 소녀는 더 이상 내 이상형이 아니고, 소녀를 향하여 뛰던 심장이 멈춘 지 이미 오래이다. 소녀 또한 나를 여전히 남자로 느끼지 않겠지만 말이다. 추억 속 소녀는 인터넷 검색을 하면 최근 근황을 알 수 있는 정도의 사회적 위치에 있기 때문에, 어쩌다 한 번씩 옛 친구가 뭐하고 사나 네이버나 구글 검색을 해 본다. 여전히 자기 분야에서 멋지게 활약하며 살아가는 대단한 여장부라고 생각한다. 앞으로 만날 이유도 이 책을 끝으로 다른 책에서 언급할 이유도 없겠지만, 옛 추억 속 소녀가 있는 그곳에서 행복하고 승승장구하는 인생을 살았으면 한다.
내 무의식에 가장 밑바닥에 깊이 남은 첫사랑이라 그런지 어쩌다 한 번씩 꿈에 나오기는 한다만, 나는 무의식이 의식을 지배한다는 프로이트식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심리의 밑바닥에 가라앉은 무의식이 쌓여 나의 현재를 만드는데 영향을 주었기는 했겠지만, 무의식은 과거의 나이고 잊혀 가는 과거이다. 가장 최근의 의식이 의식의 수면 밑으로 가라앉는 무의식을 덮어 간다.
이 책을 통하여 첫사랑 소녀에 대한 마지막으로 쓰려고 한다. 지금 쓰고 있는 이 책이 출판되어 출간 작가가 되어, 강연이나 북콘서트를 하고, TV 출연이나 YouTube 방송을 하며, 이 책을 가지고 활동하는 동안에는 지나간 사랑 이야기를 하게 되겠지만 말이다. 내가 첫사랑 소녀 이야기를 하는 것은, 소녀의 대한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라, 나의 대한 이야기를 하려면 가장 근본적으로 언급하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아내 에미마를 만나게 된 사연을 이야기하기 위해, 다루지 않을 수 없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디테일하게 자세히는 아니지만, 아내 또한 대강은 알고 있는 이야기이다.
아내 에미마는 34살 때 나를 만났지만, 내가 첫사랑이었다. 아내는 좋은 여자로 주변에 소문이 나서, 아내에게 결혼하자고 중신은 많이 들어왔는데, 아내가 비혼 주의자는 아니고 하나님 안에서 아름다운 가정과 사랑을 꿈꾸었지만, 나를 알게 되기까지 사랑을 느끼고 결혼하고 싶은 상대가 없었다고 한다. 아내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우리가 만나기 전에 서로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만났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만, 우리가 만나기 전에 역사에 대해서는 서로 상관하지 않기로 했다. 오히려 우리가 만나기 전에 서로 만나고 교제하는 사람이 있었다면, 그것은 청춘에 때에 당연한 것이고, 서로의 추억으로 존중해 주기로 했다. 만나기 이전에 서로가 스치고 지나갔던 인연에 대해, 숨길 필요도 없고, 일부러 말할 필요도 없고, 그렇게 하자고 했다. 나의 첫 책에서 첫사랑 소녀와 그 이후에 사랑했던 수많은 여자들 가운데 운명적으로 느껴지는 몇몇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도, 다른 여자들의 이야기를 다루려 하는 것은 아니다. 나의 이야기를 나누고자 하는 것이고, 내 인생 가운데 마침내 아내 에미마를 만나서 행복해졌다는 것으로 귀결되는 결론의 과정으로서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다. 이 책에서 아내에 대한 이야기의 비중이 적은 것은, 이 책의 메인 주제는 아내와의 행복한 국제결혼 이야기가 아니라, 아내를 만나서 행복하게 사는 지금까지의 내 인생의 이야기를 다루는 자서전적 에세이이기 때문이다.
가장 결정적인 또 하나의 이유는, 아내와 살아가는 행복한 국제결혼 이야기를 이 책에서 본격적으로 다루면 한 권의 책 밖에 안 된다는 것이다. 내 라이프 스토리의 결론으로서 에미마와의 사랑 이야기가 나오는 자서전적 에세이 《다함스토리》와 에미마와 행복하게 살아가는 국제결혼 에세이 (가제)《네팔 아내, 한국남편》을 한 권의 책이 아닌 두 권의 각각의 책으로 내려고 한다. 두 이야기가 전혀 다른 이야기여서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효율적이고 효과적으로 이야기하기 위해 두 권의 책으로 쓰기로 했다. 한 권을 수년 동안 공들여 쓰기보다는, 가능한 다작을 하며 대중과 끊임없이 소통하는 대중작가가 되고 싶다. 이십 년 동안 조울증을 앓다가 이제 겨우 아내의 사랑으로 회복이 되어, 나이 마흔 즈음에 다른 할 일이 없어 그동안에 아팠던 이야기 등등의 이야기를 글과 책으로 쓰고 유튜브 영상으로 만들어, 직업으로서 작가가 되고 싶다.
《다함스토리》라는 지금까지 내 인생 에세이에서 사랑 이야기를 빼면 앙꼬 없는 찐빵이 되어, 쓸 내용도 없고 분량이 나오지가 않는다. 아내를 만나게 되기까지 평생의 사랑을 찾아 방황했더 이야기가 주제인 이 책에서만 마지막으로 과거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이 책 이후 책부터는 아내를 만난 후의 현재와 미래의 이야기들을 풀어 나갈 것이다. 이전에 모든 사랑과 인생의 기회를 놓쳤기 때문에, 2030 청춘의 끝에서 마침내 에미마를 만났다는 기승전 에미마가 이 책의 결론이다. 그런 이유로, 옛사랑 이야기들을 다루는 것이다. 옛사랑 이야기를 하려고 과거를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고, 현재 우리의 사랑 이야기를 하기 위한 우리가 만나기 전에 내가 살아왔던 이야기로 판을 깔아 보는 것이다.
소녀를 향하여 심장이 뛰기 시작한 것은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였지만, 1학년 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동아리 친구로 알고 지냈다. 내가 다니던 평촌고등학교는 공립학교였지만, 지금 돌아보면 신앙심이 깊으신 것은 아니지만, 기독교인으로서 신앙적 양심에 부담을 가지고 계시던 여선생님께서, 1주일에 1시간씩 정규 시간표에 들어가는 학교 동아리에 기독 학생반을 만드셔서 운영하셨다. 기독 학생반에 가입한 학생들의 대부분은 선생님의 전도를 받아 들어온 것은 아니고, 원래 교회 다는 학생들이었다. 1주일에 한 번씩 모여서, 같이 예배드리고, 찬양하고, 목사님 초청해서 말씀도 듣고, 성경공부도 하고, 레크리에이션도 하는 등, 교회 중고등부 주일학교 청소년 예배드리는 것과 같은 동아리 활동이었다.
우리 학교는 설립된 지 얼마 안 되어서, 기독 학생반 또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동아리는 아니었다. 2학년 선배들도 있었지만, 우리 1학년과 2학년이 함께 창단 멤버와 같은 신규 동아리였다. 기독 학생반에는 동아리를 설립한 담당 선생님보다, 신앙심과 종교적 영절이 더 깊은 학생들도 상당수 모여들었다. 그때 그 시절 안양지역에는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학교에는 학교마다 찬양선교단이 있었다. 우리 학교 아닌 다른 학교의 찬양단의 성격은 잘 알 수 없지만, 학교 공식 동아리라기 보다도, 학교에 공인받지 않고 학생들 자체적으로 학교 밖에서 개별적으로 모여서 활동하는 찬양단이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기독 학생반 내의 우리 동기들과 한 학년 선배들 가운데 일주일에 한 시간씩 모여서 예배드리고 모임 갖는 학교 동아리 활동에 만족하지 못하고, 찬양으로 평촌고등학교의 복음화를 목적으로 하는 찬양선교단을 만들기를 희망하는 움직임들이 있었다. 찬양으로 학교 복음화를 목적으로 한다지만, 실제적인 활동은 (그때는 주 5일제 이전 시대라서 토요일 오전 수업을 했는데) 오전 수업 끝나고 학교 근처 교회를 빌려 찬양 연습을 하고 모임을 가지고, 돈 모아서 맛있는 것을 먹으러 다니며 남녀공학이나 남녀 각반이었던 학교에서 십 대 남녀 학생들이 기독교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모여 다녔던 것이다. 우리가 학교에서 시도했던 복음 전파라고 하는 것은, 1년에 여름방학 겨울방학 두 번씩 학교 근처 교회를 빌려 친구들을 초청하여 찬양 콘서트를 하고, 학교 축제 때 나가서 CCM 크리츠천 음악을 부르며 율동하는 그런 활동이었다.
그 당시는 지금처럼 기독교가 부정적으로 인식되던 시절이 아니라,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술 담배 안 하고 닮고 싶은 마음까지는 없지만 착하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을 때였다. 또한 대부분의 학교 동아리는 학교 교육과정 안에 수업 시간의 연장으로 일주일에 한 시간 편성이 되어 있으니까 형식적으로 참여하는 정도였기 때문에, 실제적으로 의미 있는 활동을 하는 동아리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 우리가 한 학년 위 선배들과 함께 창단해서 원년 멤버였다. 같은 학교 친구들에게 우리가 기독 학생반과는 별도로 창단한 찬양선교단이 신선하게 느껴졌던 것 같다.
토요일에만 모인 것은 아니고, 학교에서 쉬는 시간에 모여 성경공부도 하고, 찬양과 율동 연습도 하고, 야간 자율학습 마치고 10시에 학교 앞 교회에 모여서 기도회를 하고 헤어지기도 했다. 참 아름다운 시절이었다는 회상을 하면서도, 기본적인 신앙생활은 하면서 교회 학생회 활동이나 학교 기독교 동아리 활동에 에너지를 쏟는 대신에, 그 에너지로 공부를 했었더라면 내 미래는 단기적으로는 더 무난하고 빠르게 갈 수 있지 않았을까도 생각해 본다. 물론 인생을 아주 길게 보면, 그 차이가 아무 차이가 아닐뿐더러, 빨리 간 사람이 나중에는 뒤에 있고, 늦게 간 사람이 나중에는 앞서 가는 경우도 보게 된다. 결코 후회는 없는데 지금 그때로 돌아간다면, 없는 길을 만들어 가거나 돌아가지 않고 내 앞에 놓은 고속도로나 국도를 타려고 했을 것이다.
나에게 소녀는 아름다운 여자였지만, 소녀에게 나는 그저 코흘리개 친구였을 것이다.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소녀를 알고 지냈지만, 이성적인 감정은 전혀 없었다. 첫사랑이라고 할 수 없을 만큼 깊은 마음은 아니었지만, 같은 동아리의 다른 여학생에게 가벼운 마음이 있었다. 크리스마스 카드를 손수 만들어서 주려고 하다가 전하지 못했다. 그 여학생의 이름의 한글 초성이 ㅇㅈㅇ이었는데. 짓궂은 동아리 친구가 그것을 알고서 동아리 친구들 모인 곳에서 '오주여 나의 마음이'라는 어느 찬양의 소절을 반복해서 부르며 놀리고는 했다. 찬양의 소절 '오주여'의 초성 'ㅇㅈㅇ'와 살짝 마음이 있었던 여학생 이름의 초성 'ㅇㅈㅇ'이 초성만 같았다. 차라리 첫사랑이 소녀가 아니라, 풋사랑이었던 그 여학생이었더라면, 해피엔딩이 되었을 수도 있었다는 가정도 해본다. 그 사랑이 결실이 맺어 끝까지 가지 않았다 하더라도, 고등학교 시절 좋은 감정을 가지며 서로에 미래를 향해 경주하는데 도움을 주는 좋은 인연과 추억으로 남았었을지도 모른다. 졸업하고 각각 다른 대학교 다른 전공으로 가서 각각 다른 인연으로 갈아타더라도 말이다.
사람마다 각각 다른 인연이 있겠지만, 나는 중고등학교 때 이성과 교제를 하더라도, 특별한 운명을 만나지 않는 이상, 인생의 마지막 인연 배필은 대학교에서 같은 과나 동아리에서 CC 캠퍼스 커플로 찾는 게, 가장 이상적이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풋사랑이었던 오주여 여학생이 첫 번째 풋사랑인 것도 아니다. 중고등학교 때 같은 교회 주일학교를 다니던 여학생이 예뻐 보이기도 했고, 초등학교 때 같은 반 여자 친구 몇몇에게 호기심이 가고 설레기도 하고 같이 놀고 싶고 그러기도 했다. 유치원 나이 때 같은 아파트 같은 나이 또래 여자아이 집에 놀러 가서 노는 게 즐겁기도 했다. 고등학교에서 2학년 때 첫사랑이 시작되기 이전, 같은 고등학교에서 1학년 때 풋사랑이 있었다는 것이지, 그 이전에도 비숫한 감정이 계속 있었기 때문에, 특별한 감정은 아니었다.
소녀는 평범하기보다는 상당한 비범함을 가지고 있었다. 못 생겼다고 할 수도 없지만, 예쁘지도 않았고, 키도 작았다. 공부도 못 한 것은 아니지만, 그다지 잘한 것도 아닌 것 같다. 소녀는 내가 공부를 잘하지 못했던 것으로 생각했던 것 같지만, 나도 그렇게 공부를 잘한 것은 아니지만, 소녀보다는 내가 조금 더 잘했었던 것 같다. 결과적으로 둘 다 재수를 하고, 나는 강원의 춘천에 강원대학교로 진학했고, 소녀는 인 서울 대학교에 갔지만, 우리 학교 영어교육과는 우리 학교 인문계에서는 가장 커트라인이 높고 비전 있는 학과였기 때문에, 전공을 생각하지 않고 학교를 보고 갔더라면, 나 또한 인 서울의 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을 것이다.
지금 와서 돌아보면 소녀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 마음을 내려놓았어야 했다. 그 마음을 놓을 수 없었더라면, 더 이상 그 마음을 드러내지 말고 소녀와 친한 친구로 지내면서, 진학을 할 때 소녀에게 어느 대학 어느 과에 갈 것인지 물어보아서 같은 학교 같은 과로 진학해서 좋은 친구로 곁에서 같이 공부할 걸 하는 생각도 해 본다. 더 이상 감정을 드러내기보다는 소녀 곁에서 좋은 친구로 지내면서, 열심히 공부하고 동아리 활동하면서 나 자신을 가꾸며 멋진 남자로 하루하루 거듭나다가, 소녀가 남자 친구와 언젠가는 깨질 그 타이밍을 기다렸어야 했다는 생각도 해 본다. 그토록 잊지 못하게 사랑했었더라면 말이다. 더 좋은 시나리오는 고등학교 때 소녀 생각하지 말고 공부 열심히 하다가, 대학 가서 같은 과에 동기나 선배 후배 중 더 예쁘고 착한 여자를 사랑하여 같이 공부하며 사랑과 미래를 함께 키워 나갔어야 했다. 지난날 내가 사랑에 목마르고 사랑에 목숨 걸었던 성격이었던 것을 전제로 말이다. 가장 이상적인 것은 인생에서 사랑을 인생 목표로 삼지 말고, 본인의 삶을 살았더라면 예쁘고 착한 여자들이 줄줄이 내 꽁무니를 따라다녔을지도 모른다. 먼저 멋진 남자가 되어서 열심히 살다가, 내 주변을 맴도는 여자들 가운데 서로 마음이 가는 사람과 한 배를 타면 되었다. 그게 지금은 될 것 같은데, 그때는 안 되었다.
소녀는 교회 학생회나 학교 기독 학생반과 찬양선교단 활동만 한 것이 아니라, 안양 지역 전체를 커버하는 청소년 찬양 선교단체에서 활동하였다. 스케일 자체가 달랐다. 아마도 그곳에서 남자 친구를 만나 결혼까지 생각하며 사귀었던 것 같다. 나중에 흘려듣기로는 당시 남자 친구가 전도사님이었다고 하는데, 교회 전도사였을 수도 있지만 찬양 선교단 스탭 전도사였을지도 모른다. 우리 학교에서도 소녀의 친구들이 있었는데, 소녀를 중심으로 그 안양 지역 청소년 찬양 선교단체에서 함께 활동했었다. 소녀는 크리스천 뮤직과 크리스천 댄스에 능했다. 그 찬양선교단체에서 활동하면서 크리스천 뮤지션 CCM 가수를 꿈꾸었다. 노래와 율동을 익혀서 따라한 정도가 아니라, 본인이 직접 안무도 짜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안무를 가르쳐 주기도 했다.
인간관계도 좋아서 남자 친구 외에도 주변에 남자 사람 친구 남사친들이 많았다. 내가 티가 나게 소녀를 사랑했어도, 그냥 수많은 이성 친구 중 하나구나 생각했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소녀 또한 어릴 때여서 남자가 여자에게 잘해주는 데는 반드시 이유가 있다는 남성 심리를 잘 몰랐을지도 모른다. 꿈이 CCM 가수여서 레슨도 받았는데, 집안에서 부모님들이 반대하셔서 전적으로 그 길을 준비하지는 못하고, 학교에서 야간 자율학습을 하면서 저녁 식사를 쉬는 시간에 미리 까먹고, 그 시간에 음악실을 빌려 연습을 했었다. 가끔 내가 교무실에 가서 음악실 열쇠를 받아다가 문을 열어 주고 잠가 주기도 하고, 연습할 뒤에 앉아서 별 말없이 기도해 주고 가기도 했었던 것 같다. 1학년 때는 기독 학생반 활동과 우리 학교 찬양 선교단 일을 같이 했지만, 2학년이 되고 소녀가 기독 학생반 회장이 되고 안양 지역 찬양선교단 활동을 왕성히 하게 되고 공부도 더 해야 할 때가 되면서, 우리 학교 찬양 선교단 활동은 거의 접다시피 소홀하게 되었다. 나 또한 소녀에 대한 아무 감정이 없었던 1학년 때는 소녀와 상관없이 찬양선교단 활동을 열심히 가장 우선적으로 하였지만, 2학년이 되고 기독 학생반 부회장이 되면서 소녀와 같이 임원단 활동을 하고 소녀가 학교 찬양선교단 활동을 접게 되면서, 나 또한 더 이상 찬양선교단에 에너지를 쏟을 이유가 없어졌다.
소나기가 오면 청소시간에 청소 땡땡이치고 학교 앞 집에 달려가 우산을 가지고 소녀의 여자 반 앞에 찾아가서 주고 돌아왔다. 작은 수첩 하나를 사서, 매일매일 1년 내내 하루의 한 개씩 소녀에게 편지 글을 썼다. 일기도 쓰고, 자작시도 쓰고, 그림도 그리고, 자작 소설도 썼다. 한 페이지에 작은 동화 하나를 썼는데 아직도 그 내용이 생생하다. 마귀할멈 왕비가 거울에게 세상에서 가장 예쁜 여자가 누구냐고 물었더니, 거울이 너무 순진해서 거짓말을 하지 못하고 세상에서 가장 예쁜 여자의 이름으로 소녀의 이름을 대서, 거울이 다 깨졌다는 내용의 동화였다. 볼펜뿐 아니라, 오색 색연필과 파스텔 등을 동원해서 예쁘게 편지를 한 권 가득 채웠다. 1년 동안 한 권의 작은 수첩에 하루 한 페이지씩 편지를 써서 생일날 주려고 준비했다. 결국 그것은 주지 못하고, 4절 색도화지를 가지고 손수 글을 쓰고 그림을 그려 생일 카드를 만들어 주었다. 물론 그때까지는 직접적으로 사랑한다고 고백하지는 않았다. 같은 동아리 친구이며 임원단 회장 부회장으로서 때때로 서로 손편지도 쓰고 그렇게 친하게 지냈다. 소녀에게 나는 남자도 아니었고, 가까운 남자 사람 친구도 아니었지만, 2학년 1년 동안 같은 동아리 임원단을 하면서 자주 보았기 때문에 친한 친구 사이이기는 했다. 1학년 때도 이성으로 느끼지 않았을 뿐, 기독 학생반과 찬양선교단이 작은 동아리였기 때문에, 멤버 모두가 친구처럼 친밀하게 지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학교에서 서울랜드 야영장으로 야영을 갔다. 텐트를 치고 캠핑을 했다. 5월이지만 산이라 새벽에 매우 추웠다. 매년 같은 곳으로 야영을 가기 때문에 그 상황을 아시는 선생님께서는, 따뜻한 침낭이나 겨울 파카를 준비하라고 충고를 해 주셨지만, 대부분의 학생들은 선생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았다. 나를 위한 침낭 하나와, 소녀에게 빌려 주기 위해서 두꺼운 겨울 파카 하나를 준비했다. 야영을 위한 준비물은 그것뿐만 아니라, 개인과 팀 준비물이 있었기 때문에, 엄청 큰 배낭을 준비했음에도 다 들어가지 않아, 배낭 외부에 도마나 부르스타를 매달았던 기억이 있다. 왜곡된 과장된 기억인 지는 모르겠지만, 집에서 배낭을 메고 한 발자국 움직이기에도 무거울 정도의 배낭을 메고, 집 근처의 범계역에서 서울랜드 역까지 지하철을 타고, 서울랜드 역에서 야영장까지 짧지 않은 거리를 걸어갔다. 군대 가서 매었던 군장보다 무거웠다. 밤이 되어서 여자 텐트 중 소녀의 텐트로 빨간 두꺼운 겨울 파카를 가져다주었다. 소녀가 고맙다고 하였다. 소녀의 텐트 안에서는 다른 남자애들이 와서 놀고 있었다. 다음 날 아침 소녀가 밤새 따뜻하게 입고 잤다고 고맙다고 빨간 겨울 파카를 돌려주었다. 소녀의 체온이 닿은 파카가 기분이 좋았다. 아침 식사할 때 여자 아이들과 친하게 지내는 인기 있는 남자아이들의 텐트에는 여자 아이들이 음식을 해서 가져다주었다. 맛있는 음식 냄새를 맡으며 나는 다소 씁쓸하고 쓸쓸했다.
1년 동안 생일선물로 작은 수첩에 편지를 썼던 그 생일 말고, 그다음 해 고3 수능을 마친 이후 졸업하기 전 생일 때, 1월의 추운 겨울날 소녀의 집 앞으로 선물을 가지고 갔다. 그때는 아직 사람들이 핸드폰을 쓰기 이전 삐삐를 쓸 때라서, 소녀의 삐삐로 집 앞에서 기다리겠다고 늦더라도 나오면 좋겠다고 했다. 그때 소녀는 아마도 안양지역 찬양선교단 모임으로 외출했었던 것 같다. 나는 계속 기다렸고, 소녀는 제가 기다리다 집에 갔겠지 하고 다른 길로 집으로 돌아왔다. 그해 가장 추웠던 날 중 하나로 기억하는 날이었다. 반나절을 밖에서 기다리다가 다시 삐삐로 연락을 남겼다. 소녀가 집에서 놀란 얼굴로 내려와서 지금까지 기다릴 줄 몰랐다고 했다. 나는 선물만 주고 바로 집으로 돌아왔다. 카페에서 아메리카노 한 잔 같이 마시자는, 떡볶이라도 같이 먹자는, 그런 주변머리도 없고, 그냥 괜찮아하고 선물만 주고 돌아왔다. 그때까지는 소녀 또한 내 마음이 그토록 심각했던지 몰랐었을지도 모른다. 종종 선물도 주고 편지도 했지만, 고2 마칠 때 한번 고백하고 소녀가 진지하게 사귀는 남자 친구가 있다고 말한 이후에는, 평상시처럼 친구로 대해왔기 때문이다. 내 기억과 소녀의 기억은 차이가 있을 수도 있다.
공부를 하여, 미래를 준비해야 했을 때
나는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책을 보고 있으면서도
소녀를 생각했다. 왜 그랬을까? 단지, 호르몬 작용 때문이었을까?
소녀는 재수를 하고 평촌에 학원가에서 재수를 했고, 나도 재수를 하여 일산에 노량진 입시학원 일타강사 출신의 목사님께서 운영하시는 기숙학원에 들어가 재수를 했다. 소녀를 마음에서 떠나보내든 떠나보내지 못하든, 소녀 생각을 내려놓고 오직 입시에만 집중해야 했다. 그게 안 되면 학원에서 연애는 금지였지만, 학원 여자 친구들 중에서 예쁘고 착하고 나를 따르는 아이 친구와 학원 선생님들 몰래 뒤에서 가볍게 사귀면서 그 에너지로 함께 신바람 나게 공부하면 되었을지도 모른다. 지금이라면 그게 될 텐데, 그때는 그게 안 되었다. 어느 순간 내 심장이 소녀를 향해 뛰게 된 것이지, 소녀가 이렇게 이렇게 괜찮으니까 소녀를 좋아해야지 계산을 해서 사랑에 빠지게 된 것이 아니었다. 소녀를 향해 자동적으로 뛰게 된 심장을 멈출 방법을 알지 못했다.
부모님의 반대로 소녀가 CCM 가수의 꿈을 위해 레슨을 받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학원비라도 모아 주려고, 어머니께서 간식이라도 먹으라고 크지 않은 돈을 보내주면 모아 두었다가, 놋쇠 저금통에 하루에 몇백 원씩 크면 천 원씩 넣었다. 작은 포스트잇에 매일매일 편지를 써서 놋쇠 저금통에 동전과 함께 집어넣었다. 그렇게 1년을 모아봤자 10만 원이 조금 넘는 돈이었다. 한 달 레슨비도 안 되는 돈이었다. 입시가 끝난 후에 편지를 써서 그 당시 유명하던 CCM 가수의 앨범 카세트테이프 하나와 저금통을 소녀 집 앞에 놓고 왔다. 소녀가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는 기억에 남지 않는다.
생각만큼 잘 가르치는 재수학원은 아니었지만, 매일 함께 예배를 드리고 찬양과 기도로 마음을 정돈하고 관리하며 공부하는 학원이었기 때문에, 중간에 나오지 말고 그 학원에서 수능을 볼 때까지 있었어야 했다. 반년 공부하고 무단이탈하여 뛰쳐나와 기차 타고 멀리 여행을 갔다. 일종의 가출이었다. 부모님과 학원에 대한 불만은 전혀 없었는데, 소녀에 대한 그리움을 이기지 못했다. 뛰쳐나온 후에도 길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노량진의 재수 전문학원 정진학원에 종합반을 한두 달 다니다가, 평촌 학원가의 독서실에서 혼자 공부했다. 매 순간 소녀 생각을 했지만, 공부를 아예 놓은 것은 아니었다. 소녀 생각에 사로 잡혀 있으면서, 의자에 엉덩이를 떼지 않았다. 나를 노력파 공부벌레로 알고 있는 친구들도 있었다. 실제로 공부도 안 하면서 책가방에 교과서와 문제집 바리바리 싸 가지고 다니고, 딴생각에 빠져 있으면서도 의자에는 앉아 있고 그런 스타일이었다.
고3 때 전국 석차 상위 15% 정도 되었는데, 재수 한 뒤에는 상위 9% 까지 올라갔다. 딴생각하지 않고 공부에 집중했더라면, 그 당시 바라고 바라던 포항의 한동대에 갔을 것이다. 포항의 한동대에서 소녀를 잊고 더 멋진 사랑을 만났을지도 모른다. 많은 사랑이 계산기를 두드려 시작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더 멋지고 예쁜 사람이 옆에서 나를 쳐다보고 있어도, 먼저 꽂힌 사람에게 눈동자를 떼지 못하는 것이다. 모든 사랑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어떤 사랑은 중증의 정신질환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어떤 사랑은 완전 미쳐 버려서 불구덩이에 들어가도 그 불이 나를 태워 불사르는 것도 모르는 것이기도 하다.
재수를 하면서 소녀는 예체능 계열에서 인문 계열로 바꾸어 다른 과로 대학에 진학했다. 집안의 반대로 꿈을 접었는지, 아니면 현실적으로 꿈이 바뀌었는지는 모르지만, 인 서울 대학 중에서 이름은 알려졌지만, 그다지 나쁘지도 좋지도 않은 명문대라고는 할 수 없는 그렇고 그런 대학교에 갔다. 인 서울 자체를 어렵다고 하면 어렵다고 할 수 있지만 말이다. 재수를 하고 강원도 춘천 강원대학교 영어교육과에 입학했지만, 학교는 지거국 지방 거점 국립대학이라는 것 빼고는 그저 그런 학교였음에도, 과가 임용고시를 합격하거나 영어실력만 있으면 비전이 있는 전공이었다. 소녀는 같은 대학 같은 과에서 스트레이트로 학사-석사-박사를 하여 국내 박사를 하고, 지금은 대학교 교수님이 되었다. 특별히 소녀의 소식을 들려올 길은 없지만, 네이버와 구글 검색을 하면 근황을 알 수 있을 정도로 사회적 성공을 이루었다.
나는 강원대학교는 그냥 그랬지만 영어교육과는 비전 있는 학과였지만, 상사병과 군대 부적응과 괴롭힘으로 조울증에 걸려 겉돌다가 13년 반 만에 겨우 졸업장만 땄다. 대학교에서 영어공부 하나도 안 하고 졸업한 줄 알았는데, 서당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13년 반 동안 영어교육과를 다니면서, 주워들은 영어능력이 상당히 있다는 것을 느낀다. 일반인 치고는 높은 점수이지만 영어 전공자 치고는 별 볼일 없는 점수인 토익 790점으로 졸업했지만, 네팔 아내 에미마를 만나 영어를 실제로 의사소통을 위해 사용하면서 영어가 터졌다. 그전에 1년 반 동안 초등학교에서 영어회화 전문강사를 하며 영어로 수업을 하면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영어실력이 늘은 것 같기도 하다. 전공자 프로페셔널 실력은 안 되지만, 의사소통할 정도는 되는 것 같다. 조금만 더 노력하면 전공자나 전문가 수준까지 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자신감이 최근 든다.
비록 혼자만의 짝사랑이었지만
후회 없이 인생 종 칠 때까지 사랑해 보았지만
사랑 또한 헛되고 헛되고 모든 것이 헛되었다.
강원대학교에 입학한 99년 3월에 소녀에게 전화를 했다. 부담스러워하는 것 같아서 연락은 하지 않겠지만, 소녀를 사랑하고 있다는 나의 마음을 기억해 달라고 말했다. 다음에 혹시 상황이 바뀌어 나에게 기회가 생기면 연락을 달라고 했다. 그 후 나는 과 생활을 잘하고, 학과 공부를 열심히 하기보다는, 우리 과와 상관없는 컴퓨터 학과 수업만 열심히 들었다. 주로 홈페이지를 만드는 수업에 열중했다. 어머니에게 컴퓨터 디자인을 공부하고 싶다고 돈을 타서 디자인 학원에 가서 어도비 포토샵 일러스트레이터 등 컴퓨터 디자인 툴을 배웠다. 아직 조울증에 걸리지 않은 온전한 정신이었지만, 그렇다고 건강한 정신도 아니었기 때문에, 실제로 홈페이지와 컴퓨터 디자인도 실무적인 업무가 가능할 정도로 깊게 공부하지는 못했다. 학교에서 1학년이 수강할 수 있는 홈페이지 만드는 컴퓨터 교양 수업이 조잡하게 홈페이지를 하나 만들어 보는 정도의 수준이었지, 실제로 회사나 공공기관의 홈페이지 웹 프로그래밍이나 웹디자인을 할 수 있는 목표로 설계된 수업이 아니기 때문이다.
1년 동안 공부해서 내 마음을 고백하는 홈페이지를 만들어 크리스마스 때 소녀에게 주소와 패스워드를 보내 주었다. 소녀의 집 주소로 선물을 보내주었다. 내가 기억하는 홈페이지는 아낌없이 주는 나무와 어린 왕자의 이미지를 차용하여, 소녀를 위한 아낌없이 주는 나무와 어린 왕자가 되고 싶다는 내용으로 이미지와 스토리를 저의 상황에 맞게 변용하여 만들었다. 소녀는 내가 홈페이지를 만들어 보내고, 크리스마스 선물을 보냈을 때, 이제는 내가 소녀를 여자가 아닌 좋은 친구로 생각하는지 알았던 것 같다. 나는 군입대를 앞두고 있었다. 재수를 했지만 빠른 생일이기 때문에 1년 더 있다가 군대에 가는 게 보통 동기들의 페이스였다. 군대 간다고 하면 소녀와 카페에서 아메리카노 한 잔 함께 마실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렇게 한 시간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면 소녀에 대한 내 안에 그리움과 갈증이 해갈되어 한동안은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런 이유로 병무청에 자원입대를 신청하였다.
어찌 보면 소녀가 나를 만나주지 못하는 것은 당연했다. 어머니께서는 내가 혹시나 사고 칠까 봐서 나중에야 말씀해 주신 사실이지만, 소녀의 남자 친구가 화가 나서 어머니께 찾아왔는지 전화를 했는지 했었다고 들었다. 계속해서 연락을 했던 것도 아니고, 직접 찾아간 것도 아니고 마음속으로만 품고 있었고, 일 년에 한 번이나 이 년에 한 번 전화해서 마음을 전하고 선물을 소포로 보낸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데, 아무리 남자 친구라도 그렇게 화낼 일인가 싶기도 했지만, 사람들은 저마다 성격이 다르니까 그럴 수도 있겠다 생각했다.
정신줄을 놓기 전까지는 최대한 상대를 배려하려고 원하지 않는 것 같으면 연락하지 않고 혼자 그리워했지만, 조울증이 발병하고 난 이후 조울증이 조절될 때까지는, 때로는 원하지 않는 연락을 할 때도 있었고, 지나친 표현을 할 때도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계속 그런 것도 아니고, 내 관점에서는 쌓이고 싸였다가 터진 어느 날 며칠 그러고 말았던 것인데, 그것이 상대방 입장에서는 신경 쓰였을 것이다. 소녀에 대한 7년 간에 마음이 다 정리가 되고 완전히 털어 버린 후에, 본의 아니게 소녀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이 상사병과 조울증의 병이 되어 마음을 불편한 게 있다면 이해해달라 하며 더 이상 연락하지 않겠다 사과의 메세지를 보냈다. 알겠다고 잘 지내라는 메세지를 받고 더 이상 연락하지 않았다. 그때 이미 마음이 끝났기 때문에 더 연락할 일도 없었다.
미래에 내가 유명한 작가가 되고 유명 유튜버가 되어, TV에도 출연하고 강연도 다니고 영향력 있는 인물이 되면, 소녀와 예전으로 돌아가 좋은 친구로 지내볼까 하는 생각을 잠깐 해본 적은 있다. 지금은 생각이 달라졌다. 내가 성공하여 옛 소녀가 나와 친구 할 생각이 있다고 하더라도, 아내 에미마가 최고의 인생 친구가 되었는데, 지나간 옛 친구와 다시 친구 할 필요가 있을까? 그리움도 미움도 더 이상 남아있지 않고, 더 이상 어떤 남아있는 감정도 없고, 만날 이유도 없고, 이제는 완전히 모르는 사람이 되었다. 아주 오래전 알던 사람이지, 이미 아무 감정도 남아있지 않은 모르는 사람이다. 나중에 혹시 어딘가에서 스쳐가며 만나면, 먼저 아는 인기척을 하면 굳이 모른 척까지 할 필요는 없고, 옛날 알던 친구나 동네 사람을 만나는 것처럼 반가움을 표시하기는 할 것이다.
아내 에미마는 나를 어떤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사랑하고, 나 또한 아내를 사랑하고 존중하고 그 어떤 일보다 아내의 일을 우선적으로 하고 그 후에 내 일을 하지만, 예전의 사랑과 지금의 사랑은 달라졌다. 첫사랑에 실패하고 첫 단추를 잘못 끼워 인생의 스텝이 꼬인 나는, 그 이후에도 끊임없이 누군가 사랑할 한 사람의 대상을 찾았지만 줄줄이 실패했다. 사람처럼 살기 위해 더 이상 누구도 사랑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아내를 사랑한다고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 더 이상 그 누구도 사랑하지 않는다. 더 이상 자신을 사랑하지도 않는다. 사랑한다고 사랑받는 것도 아니고, 사랑한다고 존중받는 것도 아님을 깨달았다. 더 이상 그 누구를 향하여도 가슴이 떨리지 않는다. 세상에 그 어떤 사람보다 아내를 사랑하지만, 예전에 10대 소년 시절과 2030 청춘시절 했던 사랑이 사랑이라면, 더 이상 그런 사랑은 내게 남아있지 않다. 나 자신에 대해서도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 지금도 분명 사랑을 하지만, 예전에 그 사랑과 다른 의미에 사랑을 한다. 더 이상 순간순간 누가 생각이 난다거나, 가슴이 두근두근 된다거나, 그리워서 미칠 것 같다거나, 그런 게 사랑이라면, 더 이상 그 누구도 나 자신도 사랑하지 않는다.
다만, 이제는 내 인생에서 해야 하고 할 수 있는 있는 일을 찾고 있다. 이제는 과거의 아픔을 훌훌 털고 일어나서 세상에서 승리하는 삶을 살고 싶다. 조울증 때문에 만년 백수로 살았던 내가 극복하여 직업을 가져 가치를 창출하고, 경제적 자유를 얻고, 주변에 어려운 이웃들에게 내가 일을 해 땀 흘려 딴 열매들 흘려보내고 싶다. 자아실현과 입신양명을 하여, 사회에 기여하는 그런 인물이 되고 싶다. 희망사항과 의지이다. 아내의 사랑으로 회복되어 인생에 자신감이 생기고 다시 꿈을 꾸게 되었다.
사랑으로 상사병과 조울증에 걸려 모든 것을 잃었지만, 과거를 후회하지 않는다. 과거의 아픔이 있었기 때문에, 아내 에미마를 만나 사랑하며 행복하게 살고 있다. 내 인생 에세이 <다함스토리>를 쓰면서 소녀 사랑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그 옛 짝사랑이었던 첫사랑의 실패로 인생이 완전 꼬여버렸기 때문에, 결론적으로 에미마를 만날 수 있었다는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 것이다. 나의 첫 책인 이 책의 모든 이야기는 예쁘고 착한 여자들을 사랑하다 조울증에 걸리고 재발한 이야기로 시작하지만, 결론은 버킹검 기승전 에미마 사랑으로 끝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