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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다함 Oct 24. 2020

아리따운꽃

하나의 사랑이 지나가면 다른 사랑이 찾아오지만...

아내 에미마와 네팔 교회 친구들과 ⓒ 최다함


군입대 전야


군대에 가면 입대 전 짝사랑 소녀와 카페에서 아메리카노 한 잔 함께 마실 수 있을 것 같아
너무 보고 싶고 또 보고 싶어 자원입대를 하였다.
군대에 가면 안 될 정신 상태를 가지고, 군대에 입대하였다.


2000년 1월 11일 춘천 102 보충대로 입대하였다. 춘천 102 보충대를 마지막으로 전국의 102 보충대가 해체되어 이제는 없다. 내가 입대할 시점에 신병의 다수는 논산 훈련소로 입대하여 훈련받은 후에 자대를 배치받았지만, 소수의 신병들은 보충대로 입대하여 3박 4일 대기하다가, 배정받은 사단 훈련소로 이동했다. 지금은 보충대가 없어지고 보충대를 거쳐 입대했던 자원들이, 사단 훈련소로 바로 들어간다.


기록을 찾아보지 않고도 입대 날짜를 기억하는 이유는 내 생일이 1월 10일이었고, 그다음 날 입대하였기 때문이다. 입대 며칠 전 어떤 메시지도 남기지 않고 가출을 했다. 부모님이나 가족에게 불만이 있어서 가출한 것은 아니고, 군입대를 앞두고 첫사랑 소녀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견딜 수 없어서 혼자 여행을 떠났다. 가출이라기 보다도 여행이었는데, 아무에게도 연락을 남기지 않고 떠났기 때문에 가출이 되어버렸다. 너무도 오래 지난 일이라 그 당시 정확한 행적을 기억하지 않지만, 대학교 다니던 춘천에서 버스 타고 강릉에 갔다가, 강릉에서 동해로 향했고, 동해에서 과 동기 누나를 만난 후에 동해역에서 부산역까지 기차 타고 갔다가, 부산에서 서울역 찍고 당시 살던 안양 평촌의 집으로 귀환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며칠 동안 길에서도 자고, PC 방에서도 자고 그랬다. 집에서는 가출이 문제가 아니라, 군대 가는 날까지 안 들어올까 봐 걱정하셨다. 군대 가기 바로 전날 집에 돌아오는 것으로 계획하고, 일정대로 움직였던 군 입대 전 여행이었다. 군 입대 직전까지 돌아오지 않던 나 때문에 정신이 나가셨던 가족들은, 전날 제 생일날 늦게라도 들어와서 그때서야 마음을 놓이시고 다음 날 군대 가는 아들을 위해서 환송을 해주었다. 조울증이 걸리기 전 1학년 때도 학업과 학과 활동에 열심이지는 않았지만, 우리 과 자체가 워낙 작은 과였기 때문에, 동기 중 첫 군대 입대라 그런지, 입대 장소가 학교가 있던 춘천이라서 그랬는지, 아니면 같은 과 선배 형이 같은 날 같은 보충대로 입소해서 그랬는지, 과 동기들이 여럿 와 주었다. 그중 여학생들도 있었다.




크리스마스 날 네팔의 아내 에미마의 교회 앞마당에서 ⓒ 최다함


군대에서

조울증이 찾아오다


초대형 태풍처럼 지독한 사랑도 지나가고 나면, 아무것도 아닌 지나간 과거의 추억으로 남을 뿐이다.


군입대 3개월 만에 조울증에 걸렸고, 6개월도 채 되지 않아 조울증으로 의가사 전역하였다. 첫 주치의셨던 군의관 선생님이 제대 후 반드시 병원에 다니며 꾸준히 약을 먹어야 한다고 하셨지만, 부모님도 저도 조울증이 어떤 병인지 잘 몰랐기 때문에, 약을 먹다가 끊다가 하여 조울증이 수차례 재발하였다. 2000년 6월에 제대하여 이듬해 봄에 바로 복학하였다. 부모님께서 내가 1학년 때 공부 안 하고 겉돈 것을 그동안 아시고, 또 조울증에 걸린 것을 걱정하셔서, 2학년 때는 자취를 시키시지 않으셨다. 기독교 선교단체 CCC를 찾아가서 대표간사님을 만나 나를 부탁하시고 선교단체 기숙사에 넣으셨다. 선교단체 기숙사에서 살았지만, 기숙사생으로서 꼭 참여해야 했던 CCC의 기본 모임 외에는 그곳에서도 겉돌았다. CCC 기숙사에서 낮에도 잠자고 여러 가지 나만의 생각에 빠져서 학교에도 가지 않았다. 


영어교육과라고 하지만 1학년 때는 주로 교양을 들었고, 2학년 때는 본격적인 전공과목을 이수하기 전에 영어 연극과 스피치 행사를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과제였다. 2학년 1학기 초부터 팀을 짜서 준비하여, 2학기 때 친구들 가족들 초청하여 영어 연극 공연을 하고 스피치 콘테스트를 하는 것이, 우리 과 4년 가운데 가장 큰 축제이자 행사였다. 배역을 맡아 놓고 학교도 나오지 않고 연습에도 나오지 않으니, 같은 학년 후배들과 복학한 선배들이 나를 찾으러 선교단체 CCC 기숙사까지 찾아오기도 했다. 조울증이 아직 조절이 안 된 상태에서, 아무리 선교단체 기숙사라고 하지만 조울증 환자가 가족으로부터 떨어져 혼자 타지에서 지내는 것은 위험했다. 


1학년 때는 학사경고는 겨우 면할 정도였는데, 2학년 때는 학사경고 정도가 아니라 1 2학기 모두 거의 ALL F 0.0 정도 수준이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우리 대학교 우리 과는 학사경고를 몇 차례 받거나 ALL F를 받는다고 제적되지는 않았다. 등록금 내고 졸업 학점을 따면 언제라도 졸업이 가능했다. 졸업하기까지 13년 반이 걸렸지만 말이다. ALL F를 받은 학년이 2001년 1 2학기 만은 아니었다. 그 후에도 여러 차례 반복되었다. 반복이 되어도 부모님께서는 나를 끝없이 믿어 주셨다. 중고등학교 시절 내가 보여드린 저에 대한 믿음이 있으셔서도 그렇지만, 부모님 또한 그때는 조울증이 어떤 병인지 잘 모르고 계셨다.


부모님께서 상황을 파악하시고 2002년도에는 휴학을 시키시고 집으로 데려 오셨다. 집에서 요양을 하다가 동생이 아르바이트하던 파리바게트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일을 잘하는 동생과는 달리 빵 이름과 가격도 빨리 외우지 못하여 가게 사장님 부부과 빵 굽는 누나와 다른 아르바이트 생에게 많이 혼났다. 지금이야 바코드만 찍으면 포스에 바로 뜨지만, 당시는 그렇지 않았다. 


2003년이 되면서 부모님께서는 춘천에 학교에 다시 복학시키면 똑같은 과정이 반복될 것 같고 졸업을 할 수 있을까 싶어서, 학점 은행제였던 숭실대 전산원에 보냈셨다. 강원대학교 영어교육과 학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강원대 학적을 버리기 까지는 숭실대 전산원 학점을 학점은행제 학점으로 인정받을 수 없었다. 한창 배울 나이에 집에서 놀리고 있을 수는 없었기 때문에, 부모님께서는 일단 숭실대 전산원 보내 놓고, 강원대 영어교육과 내려놓고 전산원 졸업을 시키던가, 나중에 상황 봐서 춘천 학교로 돌려보낼까, 두 가지 모두 고민하셨다. 두 학교를 비교해보면, 숭실대 전산원이야 면접 보면 누구나 들어갈 수 있는 곳이었고, 강원대 영어교육과는 지방이지만 사범대학교 영어교육과여서 비전 있는 학과였기 때문에, 쉽게 영어교육과를 접을 수도 없었다. 


전산원에 가서는 공부를 잘했다. 반에서 TOP을 다투었다. 넘을 수 없는 친구 한 명 있기는 했다. 대부분은 과 공부를 잘한다고 해도 1학년이 프로그래밍 공부를 한다고 해도 그렇게 특별히 잘하지 못힌다. 실제로 그 지식으로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다. 하지만, 그 학생들 가운데 비범한 친구가 한 명 있었다. 수업시간에 배우지 않는 것을 자기가 찾아서, 실제로 의미가 있는 코딩을 하는 친구가 하나 있다. 전산원에서 TOP을 달렸다고 하지만, 다른 동기들과 별반 차이 없었는데, 그 친구만 저 앞으로 앞서 나갔다. 보통 전산원 이후 바로 취업보다는 편입 등을 고민하는데, 그 친구는 일본어를 배워서 바로 일본으로 취직하였다. 얼굴도 잘 생기고 성격도 시원시원하고 상남자였는데, 일본 여자랑 결혼하여 일본으로 간 것으로 알고 있다. 나와도 상당히 친하게 지냈다. 열정이 넘치셨던 어느 교수님 한 분을 함께 수업 외 시간에 따라다니면서 별도의 과외 공부를 받았었는데, 나는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따라다닌 것이었고, 그 친구는 무슨 소리인지 다 이해하면서 따라다닌 것이었다. 


숭실대 전산원 1년을 다니면서 성적도 매우 좋고 다시 회복되어서, 교육부에서 인정받는 학점은 받을 수 있으나 학원이나 마찬가지인 전산원을 접고, 강원대 영어교육과로 복귀하기로 했다. 그때 강원대 영어교육과를 접고, 집에서 숭실대 전산원 2년 졸업하고 숭실대 컴퓨터공학과로 편입해서 프로그래머로서 코딩을 하며 커리어를 쌓았으면, 지금 즈음 스마트폰 앱을 만들고 있을지도 모른다. 강원대 영어교육과와 숭실대 전산원을 단순 비교하는 것이 아니다. 조울증을 아직 조절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가족과 떨어져 혼자 춘천에서 공부를 한다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었다. 


전산원에 들어 간 2003년 3월에 7년 만에 드디어 내 마음속의 소녀가 떠나 버렸다. 전산원 다니기 시작했을 때 같은 반 동기 가운데 여학생 한 명이 예뻤다. 그 여학생은 내가 보기에 카사노바 같은 친구와 눈이 맞았다. 지금이야 그 친구가 매력이 있었다고 인정하지만, 그때는 왜 한 여자만을 사랑하는 나 같은 순수한 남자를 놓아두고 카사노바랑 사귀나 싶었는데, 지금은 충분히 납득이 간다. 보통 남녀관계는 밝은 교회 교육관에서 함께 성경 공부하고 싶은 이성과 사귀고 싶은 것이 아니라, 어두침침한 골목에서 키스하고 싶은 이성과 사귀고 싶은 것이기 때문이다. 예쁘고 착한 자매님에게 전도하고 성경공부 같이 하면서 작업을 거는 형제님도 보기는 했다. 그 여학생에게 깊이 빠졌던 것은 아니다. 바로 마음을 접었다. 큰 의미가 있었던 바람은 아니었으나 봄바람이 살랑살랑 불면서, 병원 잘 다니고 약 잘 먹고 조울증을 잘 관리하면서, 소녀에 대한 비정상적으로 증폭된 그리움과 사랑이 드디어 마무리가 되었다.




에미마와 내가 귀국하던 새벽 인천공항에 온 가족이 마중 나와서 ⓒ 최다함


여자를 만나러

옮기 교회에서 만난

아리따운꽃


하나의 사랑이 지나가면, 또 다른 사랑이 찾아 오지만,
내게 그 사랑을 받아먹을 능력과 매력이 있을 때야, 그 사랑에 성공할 수 있다.


2004년 춘천 학교로 돌아가서 복학을 했다. 회복된 에너지로 2004년 2005년은 학과 생활도 잘했고, 학점도 잘 나왔다. 2005년 교회를 옮겼다. 춘천교대 귀퉁이에 쪽문 하나가 있었는데, 그 쪽문 근처에 교회 하나가 있다. 설립 목사님께서 교대생들을 중심으로 사역하시면서 세운 교회이다. 그 교회에 갔을 때는 마침 설립 목사님께서 미국으로 유학 가시면서 교회를 떠나시고, 친구 목사님께서 담임 목사님으로 부임하여 오셨던 때이다. 그때 나는 믿음으로 교회 다니던 때는 아니었고, 가정 배경이 독실한 기독교였기 때문에 관성에 따라 교회를 맴도는 선데이 크리스천이었다. 믿음으로 그 교회를 간 것이 아니라, 교대생들이 많은 교회이니 예쁘고 착한 교대 여학생이 있겠구나 하고 여자를 사귀러 교회를 옮겼다.


교회에 갔던 바로 그날이었는지 앞에 나가서 자기소개를 했는데, 한 교대생 여학생이 다가와서 먼저 인사하며 참 이름이 좋다고 무슨 뜻이냐고 물어보았다.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했다. 첫사랑 7년 중간에도 그 이후에도 중간중간 설레는 사람이 있었기는 하지만, 두 번째 운명적인 사랑이었다. 이때까지는 외모를 보지 않았고, 마음의 중심만을 보았을 때입니다. 마음의 중심이 겉으로 보이는 이미지를 보았던 것이지, 아직 마음 심연의 그 사람의 진짜 모습을 들여다보지는 못했다. 그 교대생을 아리따운꽃이라고 불렀다.


전국에서 가장 오지 중에 오지인 그런 지자체에서도 읍내에서 한참 들어가는 오지 출신의 여자였다. 딸 딸 딸 딸 아들 딸 딸의 1남 6녀의 7남매 중 여섯째인 우리 시대에 좀 보기 힘든 환경에서 자라는 친구였다. 초등학교 때 내일이 중간고사인데 시험공부를 해야 하는데, 집에서 소를 몰아야 해서 혼자 울었다고 한다. 나의 자작시 <나의 마음에 어느 고을엔>을 엽서에 적어주면서, 친구 하자고 오빠 동생 하자고 했다. 그 친구도 그러자고는 했지만, 내가 말한 친구 오빠 동생과 그쪽에서 받아들인 그것은 다른 의미였다. 그 이후에 내가 마음을 드러내지 않고 서두르지 않고, 교회 친구 교회 오빠로서 곁에서 친하게 지내면서 좋은 모습만 보여 주었다면, 썸을 타고 싶은 마음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내 에미마와 가족과 친구 ⓒ 최다함


아리따운꽃은

나를 사랑하지 않았다


나에게 사랑이 상대에게는 아무것도 아닐 수 있다.
그때 쿨하게 그 마음을 놓을 수 있다면, 좋은 친구 하나를 잃지 않을 수 있고,
시간이 지난 후에 상대가 내 팔짱을 먼저 끼고 내게 다가올 수 있다.


그 친구를 많이 좋아했지만, 조울증에 결려 내 마음 조절을 잘 못하게 된 이후로부터는, 때때로 좋아했던 사람들에게 뜻하지 않게 실수를 하고는 했었다. 항상 그랬던 것은 아니지만, 어떤 순간에는 마음을 조절하지 못하고, 상대방을 불편하게 했었다.


그 친구도 그때 예수님 믿은 지 얼마 안 되어 한참 신앙에 불이 붙었던 때였다. 그 친구와 기회를 만들어 보려고 당시 내가 살았던 강원대 근처에서 상당히 거리가 있었던 교회에 새벽기도를 나갔다.  친구가 새벽기도에 나왔기 때문이었다.


아리따운꽃은 올곧은 친구였다. 자신이 존경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을 만나고 싶다고 했다. 나는 아니라는 거절이었다. 존경할 만하지 않은 시시껄렁한 남자랑 친하게 지내는 것을 내 눈으로 봤다. 남녀 간에 불꽃이 이성적인 이유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끌리고 느끼면 끝나는 것이지만 말이다. 이렇게 멋진 사람과 사귈 거라고 다짐해도, 전혀 엉뚱한 인물에게 심장이 뛰기도 하는 게 사랑이. 짚신도 제 짝이 있다는 의미도 되고, 사랑에 휩쓸려 엉뚱한 사람을 만날 수 있다는 의미도 된다.




에미마 고향집 근처를 장인어른과 조카들과 함께 산책하며 ⓒ 최다함


새로운 사랑과

조울증 재발


상대가 원하지 않는 사랑은, 상대에게도 아픔을 줄 수 있다.


조증 에피소드 과대망상이 찾아왔다. 설명할 수 없는 과대망상으로 소녀를 사랑했다. 아리따운꽃은 서태지 매니아였는데, 나의 큰 이모부 절친이 서태지 아버지였다. 큰 이모부 절친이 서태지의 아버지라고 해서, 내가 서태지와 어떤 일을 도모할 만한 관계가 아니었다. 나는 서태지랑 어떤 의미 있는 일을 도모해서 친해지고 싶었다. 아리따운꽃과 서태지를 만나게 해주고 싶었다. 그토록 서태지를 좋아한다면 서태지와 맺어주고 싶었다. 그리고 나는 그 곁에 있고 싶었다. 


아리따운꽃을 사랑하며 조증 과대망상이 찾아왔을 때 들었던 다른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대한민국의 오지 중 오지 깡촌이었던 아리따운꽃의 부모님께서 살고 계시는 그 지자체 그 마을에 <아리따운꽃 더불어숲> 이라는 숲이자 관광단지 조성하는 것이었다. 아리따운꽃의 고향을 세계적인 생태관광지로 발전시켜 주는 것이었다.


항상 그랬던 것은 아니지만, 하루 밤에 백 통이 넘는 메시지를 일방적으로 남긴 적이 있다. 변명할 논리는 있다. 메시지 폭탄을 보내기 이전에, 아리따운꽃이 이러이러한 이유로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상당히 많은 수의 메시지를 보냈다. 그쪽에서 그렇게 했던 것처럼 나 또한 다량의 메시지를 보내도 된다고 판단했다. 저쪽에서 나에게 이렇게 했다고, 나도 그 저쪽에게 똑같이 하면 큰일 난다. 아리따운꽃이 졸업한 후에 보고 싶어서 이메일을 보냈다. 아리따운꽃이 지내고 있었던 지역의 지하철 근처 대형서점에서 기다리고 있겠다고 했다. 무작정 찾아갔는데 나오지 않았다. 나중에 목사님을 통하여 알게 된 사실은, 그녀는 그 지역이 아니라 이름이 비슷한 다른 전철역 근처에 살고 있었다. 부천역 아니면 부평역 둘 중에 하나 근처에 살고 있었는데, 다른 역으로 잘못 알고 찾아갔다.




아내의 대학원 논문통과를 위한 프리젠테이션 ⓒ 최다함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면

사랑 대신 내 인생을

선택하겠다


나는 왜 내 삶을 살아가지 못하고, 사랑에 모든 것을 걸었을까? 다시 돌아갈 수 없기에 후회는 하지 않지만, 앞으로는 사랑보다 내 삶을 살아갈 것이다. 사랑하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라, 내 삶의 길을 직진으로 걸어가며, 내 가 좋아 내 곁을 따르는 사람들을 사랑하고 싶다.


조울증 전에는 내 감정을 앞세우지 않으려고 상대방을 존중하려고 노력했는데, 조울증 이후에는 조증으로 과장되고 증폭된 제 감정에 휩싸여서 상대를 배려하지 않은 부분도 있었다. 반성한다. 내가 상대를 좋아한다고 상대가 나를 좋아하는 것은 아닌데 말이다. 다방면으로 재능도 있고, 공부도 소홀히 하지 않을 성격인데, 임용고사에서 2번 떨어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아주 오래된 소식이다. 지금은 초등학교 선생님이 되었을 수도 있고, 다른 여러 재능이 있었으니 다른 일을 할 수도 있고, 결혼을 하고 남편과 아이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원하지 않는 마음으로 혹시 괴로운 기억이 남겼다면 노여움을 풀어달라고 석고대죄를 하지는 않겠다. 멋지고 훌륭한 사람이 되어 과거에 저런 사람이 나를 아프도록 짝사랑했구나 하고 긍정적으로 추억할 수 있도록 열심히 살겠다.


숭실대 전산원에서 복학한 후에 한동안 공부도 열심히 하고 성적도 좋았고 잘 적응했었다. 아리따운꽃을 마음에 품게 되면서 다시 서서히 무너지게 되었다. 한 번에 무너진 것은 아니다. 서서히 무너지게 되었다. 좋아하는 마음이 있으면 그 마음이 썩을 때까지 참지 말고 "나 너 좋아해." 고백하고, 아니라고 하면 쿨하게 털어 버리고 제 갈 길을 가면, 나중에 그쪽에서 "오빠" 하고 먼저 팔짱을 낄 수도 있다. 스스로 어떻게 해 볼 수 없을 정도로 이미 마음이 산산이 무너져 있었기 때문에, 고백을 하고 거절을 받았을 때, 어떻게 해야 할 방법을 몰랐었다.


항상 여자만 생각했던 것도 아니고, 조울증이 걸린 스물한 살 때부터 항상 조증 상태에 있었던 또한 니다. 대부분 멀쩡했는데 이상할 때가 있었던 것이다. 멀쩡한 모습만 보여주면 여전히 괜찮은 사람이었는데, 이상한 모습도 번갈아 보여주면, 어떤 여자도 그 남자에게 사랑을 느낄 리가 없다. 여자도 마찬가지이다. 멀쩡한 여자라도 아파서 가끔 이상한 모습을 보여주면, 남자들이 도망갈 수밖에 없다.


다시 돌아간다면 여자에 목숨 걸지 않고 내 갈 길을 갈 것이다. 마음이 생기면 고백하지도 말고 훌훌 털어 버릴 것이다. 내가 해야 할 공부를 열심히 하고, 아르바이트로 과외 등등을 하고, 과 생활이나 동아리 활동 열심히 하면서, 그 안에서 내 곁에 맴도는 여우들이 나타나면, 그 여우들 가운데 가장 예쁘고 착한 여우 하나를 선택해 사귈 것이다. 과거로 타이머신을 타고 돌아간다면 말이다. 절대 일어날 수 없는 가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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