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 에미마를 만나 사랑과 결혼에 골인했다
나는 더 이상 사랑 때문에 아프고 싶지 않아, 내 인생을 살고 싶어, 사랑을 놓았는데
아버지 어머니의 생각은 달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현숙한 아내를 만나면
내가 회복되면 예전으로 돌아갈 것이라 믿으셨다.
더 이상 내 인생에 사랑은 없다고 생각했다. 오는 사람 막지 않고, 가는 사람 붙잡지 않으며, 스쳐가는 인스턴트 사랑은 있을 수 있다고 열어 두었지만 말이다. 내 일 하면서 열심히 살다 보면, 사랑과 인연은 아니더라도, 가끔 여자랑 단 둘이서 스타벅스에서 아메리카노 한 잔 같이 마시고, CGV에서 영화를 같이 보고, 호프집에서 맥주 한 잔 같이 하고, 그런 작은 사랑과 우정들은 지나가지 않을까 생각했다. 운명적인 평생의 사랑과 결혼은 내개로부터 이미 멀리 떠나가 버린 것이라고 현실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나는 사랑과 결혼을 포기했지만, 어머니 아버지의 생각은 다르셨던 것 같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에 대한 사랑이 깊고, 그런 여자를 만나면, 내가 조울증에서 회복되어, 다시 어릴 때처럼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착하고 순수한 영혼으로 회복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셨다. 내가 사랑을 하고 결혼할 상황은 되지 않았지만, 이제 더 이상 청춘이 아니시고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셔서 노후를 보내시는 부모님께서는, 내 곁에 부모님 대신에 나를 지켜 줄 아내를 만들어 주고 싶으셨는지도 모른다. 나는 조울증 때문에 인생이 너덜너덜 해졌기 때문에 더 이상 사랑과 결혼을 끝이라고 판단을 했지만, 부모님께서는 오히려 반대로 그렇게 때문에 내게 짝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시고 눈물의 기도를 뿌리셨던 것 같다.
나도 네팔 여자를 만날 생각이 없었고, 아내 에미마도 한국 남자를 만날 생각이 없었는데
인연이 닿아 소개를 받아 서로에 대한 정보를 교환하고 고민하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아버지께서 교직을 은퇴하시면서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소명은, 남은 인생 동안 이웃들을 사랑하고 섬기면서 사시는 것이었다. 아버지가 돌볼 제1의 대상이 스물한 살에 조울증에 걸려 이십 년 가까이 방황하고 있던 큰아들 나였다. 정년퇴직 이후 나를 데리시고 다니시며 함께 400 시간 이상의 귀농교육을 받았다. 아버지께서 은퇴 이후 주변 이웃을 돕기로 한 실천 가운데 첫 번째는, 철원에 귀농해서 아로니아 오미자 농사를 짓고 계시는 둘째 고모 내외 분의 일을 도와 드리는 것이었다. 아버지께서는 나를 데리고 가셨다. 아로니아가 건강에 좋다고 소문나 상품성도 있고 잘 된다고 해서 너도 나도 아로니아를 심었는데, 아로니아가 작은 포도처럼 생겼지만 열매로 바로 먹기에는 쓰고 맛이 없는 작물이기도 하고, 원산지에서 워낙 좋은 아로니아들이 수입되어 오기 때문에 경쟁력이 없다. 둘째 고모 내외 분은 처음에는 아로니아를 주작목으로, 오미자를 부작목으로 심으셨는데, 지금은 아로니아 밭을 갈아엎어, 오미자 밭으로 바꾸시고 있다. 오미자 생과 그대로도 팔지만 그보다는, 오미자청을 담가 청으로 판매하시고, 음료회사에 밭떼기로 넘기신다.
둘째 고모 내외분이 한창 젊으셨을 때, 사립학교 선생님이셨던 고모부께서 방학 때 네팔로 봉사활동을 다니셨다. 네팔에 봉사활동 가셨을 때 처음 만나셔서 지금도 절친으로 지내고 계신 내외 분께서 네팔에서 비지니스와 봉사활동을 하고 계신다. 어머니와 아버지께서는 고모가 네팔에 친구가 있는 것을 아셨는지,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에 대한 사랑이 깊은 네팔 여자가 있으면 다리를 놓아 달라고 고모에게 부탁하셨다. 어머니 아버지께서는 한국 여자들은 콧대가 높아서, 네팔 여자를 만나서 살면 좋을 것이라고 생각하셨던 것 같다. 고모는 내가 네팔 여자를 만나 볼 의향이 있어야, 저쪽에 말을 넣어 본다고 하셨는데, 사실 나는 한국 여자 외에 다른 나라 여자와 글로벌 연애나 국제결혼은 단 한 번도 생각조차 해 본 적이 없었다. 외국 여자를 좋아하지 않았다기 보다도, 그냥 사랑한다면 당연히 한국사람을 사랑하지 그 외에 옵션에 대해서는 생각 자체에 없었던 것이다. 또한 앞서 이야기했듯이, 이미 내 인생에 사랑과 결혼은 끝난 것으로 정리를 했었다. 그래서 나는 네팔 여자와는 뜻이 없다고 말씀드렸다. 네팔 여자를 만날 생각 자체를 한 번도 안 해 본 것이지, 네팔 여자가 좋다 싫다 그 판단을 해 본 적도 없었다. 고모도 내가 뜻이 없으니 더 진행하실 수 없었다. 나와 고모는 움직이지 않았는데, 어머니 아버지께서 일을 계속 추진하셨다. 그러다 보니 한 번 소개나 받아보자고 했다. 네팔에서 비지니스와 봉사활동을 하고 계시는 고모 친구분께서, 배필감으로 정말 훌륭한 자매 하나가 있다고 했다. 나의 아내 에미마였다. 고모 친구분께서는 아내를 친 딸처럼 생각하고, 아내는 고모 친구분을 정신적인 어머니로 생각하는 사이였다. 아내 에미마는 고모 친구분을 앤티 이모라고 부른다.
네팔에 살고 계시는 고모 절친 분을 통해서, 나는 에미마에 대한 정보를 전해 들었고, 아내 에미마는 나에 대한 정보를 전해 들었다. 어머니께서는 정직한 분이라서 그분께 제 좋은 부분만 말씀드리지 않았다. 내가 그동안 조울증으로 아프고 방황했던 모든 것을 말씀드리고, 그럼에도 내가 조울증이 걸리기 전에는 정말 훌륭한 청년이었고, 미래에 아내를 만나 사랑으로 회복되면 변화하여 하나님과 사람을 사랑하는 멋진 남자로 변화할 수 있다는 비전을 그쪽에 전달했다.
결혼할 형편이 되어서 결혼한 것은 아니었다. 사랑의 끝에서 진정한 사랑 에미마를 만났고
오직 사랑과 주변 가족과 이웃의 응원으로 우리는 아무것도 없이 사랑과 결혼을 하게 되었다.
아내 또한 한국 남자나 외국사람과 결혼하여 타국에 가서 살 생각은 전혀 없었다. 네팔 사람들이 일자리를 찾아 외국인 노동자로 타국으로 많이 가지만, 트리부반 대학교에서 보건교육으로 석사과정을 마쳐가고 돈에 대한 욕심보다는 의미 있는 일을 하는 가치에 욕심이 있었던 아내로서는, 네팔을 떠나 타국의 남자와 타국으로 갈 생각이 전혀 없었다. 고모 친구로부터 내 이야기를 다 듣고 에미마는 금식 하면서 하나님께 기도드렸다고 한다. 성경 말씀을 보고 기도를 하면서 하나님께 응답을 받고 나를 사랑하기로 결정했다. 아내는 자신이 나를 사랑해주면, 하나님께서 나를 회복시키실 것이라는 믿음으로 나와 사랑하고 결혼해 주기로 했다.
고모 친구로부터 들은 아내에 대한 정보도 나의 마음을 열게 하였고, 아내에 대한 이성으로서의 매력을 느꼈다. 아내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나를 사랑하고, 그런데다가 예쁘고 착한 여자였다. 내가 아내에게 마음을 열었던 가장 결정적인 하나의 이유는, 있는 모습 그대로 나를 사랑해 준 여자였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일단 만나서 안면을 트고, 커피 마시고 영화관에 같이 가고, 서로 사귀면서 평생을 같이 갈 사람인가 신중하게 검토한 후에, 결혼을 결정한 일반적인 루틴을 따르지 않았다. 아내는 기도를 하고, 나는 생각을 하면서, 사진 외에는 얼굴 한 번 본 적도 없고, 만나서 커피 한 잔 마셔보지 않고, 카카오톡으로 메시지 한 번 교환하지 않고 사랑과 결혼을 결심했다. 사랑과 결혼을 결심한 후에, 카카오톡으로 사귀기 시작했다.
2018년 6월에 카톡으로 네팔과 대한민국에서 멀리 떨어져 사귀기 시작하여, 9월 카트만두에서 양가 부모님과 함께 약혼식을 했다. 원래는 교회에서 지인들과 친척들과 교회 식구들을 모시고 성대하게 약혼식을 하려고 했다. 국제결혼 행정수속의 도움을 받기 위해 행정사를 찾아갔는데, 행정사는 결혼비자를 받기 위해서는 서류로 우리의 사랑을 증명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한 번도 만나보지 않고 약혼식을 한다는 것을, 대사관에서 이해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그런 저런 이유로 약혼식이 흐지부지 되었는데, 또 생각해 보니 약혼식이 아니더라도 결혼 전에 한 번 가서 만나보면 되지 않나 생각을 하게 되었다. 에미마와 나는 직접 만나보지 않아도 사랑이 굳건한데, 우리의 사랑을 서류로 증명을 해야 하는 것이었다. 어떻게 알게 되었고, 어떻게 사랑하게 되었고, 언제 어디서 처음 만났고, 이런 것을 서류에 쓰게 되어 있다. 두 가지 이유인데 하나는 한국 남자에게 네팔 여자가 당하지 않게 보호하기 위해서이고, 또 하나의 이유는 한국에 오기 위해서 네팔 여자가 사기 결혼하고 한국 국적만 얻은 후에 날라 버리는 경우를 막게 하기 위해서이다.
혼자 갈까 하다가, 부모님과 함께 가서 장인 장모님과 함께 양가 부모님을 모시고, 고모 친구 내외 분도 함께 참석하셔서, 카트만두에 한국식당에서 저녁식사를 하면서 약혼식을 했다. 약혼식을 한 후에 장인 장모님을 고향으로 보내 드리고, 아내와 우리 부모님과 히말라야 관광도시 포카라로 약혼여행을 떠났다. 2018년 6월부터 카카오톡으로 연애하기 시작하여, 네팔 카트만두에서 9월 약혼식을 하고, 12월 다시 부모님과 들어와 결혼식을 했다. 결혼식 이후 부모님을 한국으로 보내 드리고, 아내 결혼비자 수속과 대학원 논문 통과를 진행하면서, 네팔에서 6개월 동안 신혼생활을 했다. 네팔 말을 몰라서 조용히 아내 외에는 다른 사람들과 아무 이야기도 않고 지내다가, 마음이 열려서 영어로 이런저런 대화를 네팔 사람들과 적극적으로 하기 시작했던 즈음되니, 우리가 한국으로 올 때가 되어버렸다.
네팔 결혼식 이후 귀국하여 수원에서 네팔 장인 장모님을 초청하여 모셔서
한국 지인들 앞에서 한 번 더 결혼식을 했다. 장인 장모님을 고향으로 보내드리고
부모님과 논산 시골집 왕대추농장과 수원 집 아파트를 오가면서 오직 사랑으로 살았다.
2019년 5월 손 잡고 인천공항에 함께 들어와서, 그해 6월 수원에서 한 번 더 한국의 지인을 모시고 결혼식을 올렸다. 네팔의 장모님과 장인어른을 초대하여 함께 모시고 한국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식으로 초대한 기회에 한국 구경을 시켜 드렸다. 에버랜드 구경을 시켜 드리고, 잠실 롯데타워의 전망대와 아쿠아리움을 보여 드렸다. 수원 집에도 며칠 계시고, 논산의 농자에서도 며칠 함께 하셨다. 보통 외국인들 많이 모시고 가는 경복궁 같은 데는 가지 않았지만, 대신 수원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화성을 차로 드라이브하며 구경시켜 드렸다. 장인어른과 장모님이 매우 즐거워하셨는데, 그 가운데 가장 즐거워하셨던 것은 롯데타워 아쿠아리움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상대적으로 선진국에서 오신 분들에게는 경복궁이나 고궁을 보여 드리는 게 좋고, 상대적으로 후진국에서 오신 분들에게는 롯데타워나 에버랜드 같은 대한민국의 현대문명을 보여 드리는 게 좋다. 그분들에게 어떤 교훈과 계몽을 드리려는 목적에서가 아니라, 선진국에서 오신 분들과 후진국에서 오신 분들이 좋아하시는 한국의 문화가 다르다. 우리를 찾는 외국인 손님들이 가장 좋아하시고 즐거워하실 만한 것들을 보여 드리자는 취지이다.
장모님 장인어른을 네팔에 보내 드리고, 우리 부부는 주중에는 부모님과 논산에 내려가 왕대추농장 일을 하고, 주말에는 수원에 와서 쉬면서 교회에 다녔다. 돈을 번 것은 아니지만, 부모님과 함께 시간을 보내며 왕대추농장 일을 열심히 도와드리며 용돈을 받아 생활을 했다. 또 한 주에 한 번 씩은 동생 실용음악연습실 사업장에 가서 일을 도와주었다. 현재 우리 형편이 어렵기 때문에, 우리가 동생을 돕는 것 보다도, 동생 내외가 우리를 더 많이 도와준다. 부모님은 우리의 평생 사업장을 만들어 주시기 위해 왕대추농장을 시작하셨고, 우리는 당장 최저임금도 안 나오는 곳에서 부모님의 용돈을 받으며 부모님의 노후생활을 함께해 드렸다. 우리는 동생 부부를 돕고, 동생 부부는 우리를 도왔다. 네팔에서 아내와 함께 귀국한 2019년 하반기에는 가족과 사랑을 나누는 시간을 가졌고, 2020년에는 어떤 계기가 생겨 논산으로 귀농하셔서 완전히 정착하신 부모님을 떠나, 수원의 부모님 집에서 우리의 길을 찾아가고 있다. 사랑이라는 무지개를 찾아 떠난 여행을 내려놓고, 일상으로 돌아와 내 인생을 살기 시작했을 때 내 인생 최고의 사랑 나의 아내 에미마가 나를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