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이 오는 날까지 걸어가는 거야.
나의 꿈은 작가이다. 아주 오래전부터 작가의 꿈의 씨앗은 내 마음속에서 자라고 있었지만, 작가가 되어야겠다고 명확한 뜻을 세우고 주변 사람들에게 선포하기 시작했던 것이 2015년 봄이었다. 고도원의 아침편지 고도원 작가님께서 하시는 충주의 명상치유센터 깊은산속 옹달샘의 건강치유 프로그램 《녹색뇌 프로젝트》에서 였다.
2000년도 군대에서 조울증이 시작되어 기나긴 방황을 하다가, 2012년 여름 박사도 아닌 학사를 13년 반 만에 마침내인지 간신히인지 강원대 영어교육과를 졸업하였다. 2013년부터 1년 반 동안 초등학교에서 영어회화 전문강사로 근무했다. 초등학교에서 영어회화 전문강사는 쉽게 말해서 비정규직 영어교사이다. 영어 수업과 영어과 행정업무를 맡았다. 나는 비정규직이 꼭 나쁘다고만 생각하지는 않지만, 이명박 정부의 영어회화 전문강사 정책은 상당히 교육적으로 문제가 있는 정책이었다고 생각한다. 영어교사 부족의 이류로 영전강을 만들었는데, 교대생 임용이 적체된 상황에서 교대 졸업생 중 영어교육 전문가를 키워서 영어전담교사가 초등학교 영어과 수업과 영어과 행정업무를 담당하게 해야 했다. 중고등학교에서 영어회화 교사가 필요하다면, 영전강 대신 사범대 영어교육과를 졸업하고 중등교사 영어교과 정교사 2급 자격증을 소유하고 임용고사에 합격하지 못한 자원 중에서 영어회화 전문가를 육성하여 공교육 현장에 투입해야 했다. 정규직 비정규직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비정규직이라고 할지라도, 교육대학이나 사범대학을 통해서 길러진 인재를 써야 했다. 영전강도 케이스 바이 케이스라서, 영전강 중에서도 아주 훌륭하신 선생님들이 있다. 그러나 평균적으로 볼 때, 영어를 잘한다고 하여 영어교육을 잘하는 것 또한 아니다. 이명박 정부 때 이경숙 전 숙명여대 총장이 대통령 인수위원장이었는데, 숙대 TESOL 졸업생을 공교육에 넣으려고 무리수를 둔 게 영전강 정책이라는 이야기도 있었다. 지금은 거의 모든 교육감을 진보좌파에서 휩쓸어서, 영어회화 전문강사 정책은 막을 내렸다. 다만, 진보좌파의 정책 강령 중 핵심이 비정규직의 정규직화여서, 영전강을 새로 선발하지는 않고, 기존의 영전강은 근무하던 학교에서 평생 일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영전강 제도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생각하지 않지만, 내가 만약 그때 계속 영전강을 했었더라면 평생직장이 되었을 수도 있다.
2013년도에는 학년 당 학급 수가 하나 씩 밖에 되지 않은 아주 작은 학교에서 근무했다. 이듬해 재계약하기로 교장선생님께로부터 구두 확답을 받았는데, 경기도교육청의 정책 변화로 소규모 학교의 영전강을 빼게 되었다. 소규모 학교인 우리 학교의 영전강과 다음 연도 계약을 맺지 말라는 공문이 교육청에서 내려왔고, 학교의 영어과 관련 업무 전반을 담당했던 내가 그 공문을 직접 처리하여 부장 선생님과 교감 선생님을 거쳐 교장선생님께 올렸다. 교육청 정책의 변화로 소규모 학급의 영전강을 해고하라는 공문을 내 손으로 처리했어야 했다.
2014년도에는 큰 학교로 갔다. 자동으로 전근이 되는 것은 아니었고, 다른 학교에 원서를 내고 1차 서류전형과 2차 수업실연과 면접을 통과하여 합격해야 했다. 지원자가 나 한 사람밖에 없었고, 시기적으로 영전강을 하루라도 빨리 뽑아야 했던 시기라서, 그 학교에서도 나 외에는 대안이 없었다. 그 학교 말고 나를 오라는 학교가 있었는데, 상황이 어떻게 될지 몰라서 여러 학교에 원서를 지원했었다. 만약에 나를 오라는 학교에서 먼저 면접을 봤더라면 그 학교에 갔을 텐데, 내가 면접을 본 학교의 교장선생님이 장학관 출신이었는데 아주 유능하신 분이었다. 유능한 관리자 밑에서 일하면 내가 유능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의 결정적인 오판이었다. 나를 오라고 불러준 그 학교에 갔어야 했다. 그 학교에 갔어도 당연히 수업실연과 면접은 보았어야 했는데, 그 학교에도 그 시기에 다른 경쟁자가 없었기 때문에, 나 혼자 시험을 보는 형식적인 절차였기 때문이었다.
옮겨간 학교의 1학년 여선생님이 예뻤다. 옷도 잘 입었다. 나이도 어렸다. 나보다 8살 연하였다. 아내 에미마도 나보다 6살 연하이기는 했지만, 내 나이 마흔 즈음에 만난 에미마는 이미 34살 노처녀였다. 더더욱이 네팔에서는 스무 살 즈음 일찍 결혼하는 경우가 많다고 하니, 예쁘고 착하고 능력이 있는 에미마에게 결혼 중신은 여전히 많이 들어왔지만, 아내도 늦은 나이였기 때문에 그때 6살 차이는 큰 차이는 아니었다. 1학년 여선생님이 예뻤다. 내가 1학년 여선생님께 마음이 있는 것을 그분도 아셨는데 부담스러워한다고 들었다. 학교 책상에는 처리할 업무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고, 내일 당장 수업은 줄줄이 있는데 수업 준비는 되어있지 않고, 손까딱 할 힘조차 없었다.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어머니께 이끌려 병원 응급실에 갔고, 학교에 어머니를 통하여 사직서를 제출했다. 교장선생님께서 사직서를 반려하시며, 목요일 금요일 이틀 연차 내고 더 쉰 후에 다음 주에 출근하면 된다고 하셨다. 그럴 때는 주말까지 연차 내고 그다음 주에 출근해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눈썹 휘날리며 밀린 업무를 처리하면 되었다. 지금이라면 그렇게 했을 텐데, 그때는 그게 되지 않았다.
집에서 놀다가, 금식과 기도로 조울증을 고쳐 보기로 했다. 무슨 바람이 들어서 인지 10일 동안 조울증 약을 끊었다. 처음에는 기분이 더 좋아졌다. 원래 조울증 환자가 조울증 약을 끊으면 얼마 동안은 오히려 본인뿐 아니라 주변에서 보기에도 좋을 수 있다. 살짝 뜰 때에는 컨디션이 평소보다 좋다. 문제는 살짝 뜬 상태가 유지되며 지속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살짝 뜬 상태를 찍고, 더 뜨기 시작해서, 넘어서는 안 될 선을 훌쩍 넘어버린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조울증의 정점에 이르면, 자기가 끌어올 수 있는 모든 돈을 다 써 버리고, 대형사고를 치게 되고,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되는 것이다. 그 상태에서 정신병원에 3개월 즈음 입원하면 보통 퇴원할 때가 된다. 약물농도가 적정 수준으로 유지가 되어서, 더 이상 과대망상을 보이거나 사고를 치지는 않는다. 대신 3개월 동안 병원에 있는 동안 몸무게가 5Kg도 불어서 나온다. 병원에서 하는 일이 TV 보고, 침대에 누워 있고, 간식 먹고, 그런 것이니 집에 와서도 그렇게 지낸다. 마땅히 나와서 할 일도 없으니 무기력해진다. 정신병원 치료의 한계와 문제점을 지적하는 게 아니라, 원래 정신병원에서 전문의들이 하는 게 거기까지이다. 약을 먹고, 증상을 조절하는 것은, 조울증을 치유하는 시작점이지, 끝이 아니다. 운동도 하고, 햇볕도 보고, 사람들과 만나 대화도 하고, 좋은 프로그램도 참여하고, 공부도 하고, 사회생활도 하고, 적정한 시간 일어나고 잠에 들고, 이 모든 것은 본인이 해야 하는 것이다.
병원에서 퇴원하여 조울증 과대망상 증상은 잡혔으나, 눈의 초점은 나가 있고, 집에서 TV나 보고 인터넷이나 하고 밖에 나가지 않고 집 안에서 히키코모리 은둔형 외톨이 마냥 있으니, 어머니의 눈에서는 피눈물이 나는 것이었다. 한창 젊은 청춘이 그러고 있으니 말이다. 아들을 살릴 길이 없나 어머니께서 찾아보시다가, 큰고모의 추천으로 명상센터 옹달샘의 <녹색뇌 프로젝트>에 나를 보내 주셨다. 원래 옹달샘 프로그램이 소비자 입장에서 결코 저렴하지 않은데, <녹색뇌 프로젝트>는 옹달샘 스태프들이 자체 진행하는 것이 아니라, 외부에서 오셔서 진행하는 프로그램인데다가, 양한방 통합치료 전문가들과 스태프들과 진단장비들이 따라오기 때문에, 옹달샘 프로그램 가운데서도 가장 비싼 프로그램 중 하나일 수밖에 없다. 우리 집이 그런 프로그램에 참여할 경제형편은 되지 않았지만, 아픈 아들을 회복시키고자 보내 주셨다.
둥그렇게 둘러앉아 간단히 자기소개를 했고, 옹달샘 요가를 했고, 통나무 명상 요가를 했고, 향기 명상을 했고, 춤 명상을 했고, 여러 가지 옹달샘 명상 프로그램을 했다. 그렇게 몸과 마음을 푼 후에 통합의학 전문가가 오셔서, 서양의학과 동양의학과 자연치유가 접목이 된 녹색뇌 프로젝트 프로그램을 본격적으로 진행했다. 나쁘지는 않았는데, 아파서 눈에 초점이 나가 있던 나의 마음을 열지는 못했다. 그 프로그램들이 나에게 아무 영향도 주지 못했다. 어머니께서 비싼 돈 내고 보내 주셨으니, 참여하는데 의의를 두고 있었다.
그때까지 내 마음이 열리지 않았기 때문에 프로그램 자체는 나에게 아무 의미도 없었다. 다만, 집에서 혼자서 은둔형 외톨이로 지내다가 2주 동안이라도 사람들을 만나니 좋았다. 그때까지 프로그램은 내게 아무 의미가 없었는데, 프로그램과 프로그램 사이 쉬는 시간에 같이 다니던 일행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옹달샘 뒷산에 산행을 다니는 것이 재미있었다.
최 선생, 외우는 시 한 수 있으면 읊어봐요.
시를 읊어 보란 것이었는지, 아니면 노래를 한 곡 뽑아 보란 것이었는지,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는다.
외우고 있는 시는 없고, 제가 지은 자작시가 있는데 괜찮을까요?
일행들은 당연히 더 좋다고 하였다. 나는 내가 지은 시 《나의 마음에 어느 고을엔》을 읊었다. 뜨거운 반응이었다. 다들 너무 좋은 시라고 칭찬해 주셨다. 옹달샘 시인이라고 치켜올려 주셨다.
제가 이 시로 노래로 만든 자작곡이 하나 있는데, 한 번 불러 볼까요?
다들 당연히 좋다고 하였다. 모두들 나에게 집중하였다. 노래를 가수처럼 아주 잘하는 편은 아니지만, 그 순간 나는 옹달샘 가수가 되었다. 그렇게 노래를 불렀다.
반응이 뜨거웠다. 달아올랐다. 너무 좋다고 하였다. 산행을 한 후에 그다음 저녁 모임 때, 다시 둥글게 모여 앉았다. 처음 자기소개를 나눌 때는 한 마디씩 간단히 소개를 했다면, 좀 더 깊은 자신의 속 이야기와 사연을 이야기하는 시간이었다. 내 순서가 다가왔을 때인지, 같이 산행을 했던 일행들이 내가 지은 시와 노래가 있는데 너무 좋다고 한 번 들어 보자고 하였다. 고도원 작가님도 너무 좋다고 한 번 해보라고 응원해 주셨다. 뜨거운 반응이었다. 모든 사람들이 나에게 집중했고, 나의 시와 노래를 사랑했다. 고도원 작가님께서도 아주 높은 평가를 해 주셨다. 나는 옹달샘 시인이 되었다. 나의 시와 노래에 대한 뜨거운 반응에 힘입어 나의 마음이 열렸다. 나는 내 아픈 사랑 이야기와 조울증 이야기와 어떤 사정으로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지 간단하게 이야기했다. 나는 그 자리에서 옹달샘 시인이 되었고, 옹달샘 스타가 되었다. 2주 간의 옹달샘 건강치유 프로그램 내에서만 제한하여 말이다.
명상센터 옹달샘 만의 문화가 있다.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면서,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모든 사람을 꼭 안아주며 인사하는 것이다. 특별히 프로그램 가운데 시킬 때도 있지만, 프로그램이 시작하고 끝날 때 명상 홀을 돌아다니면서 가능한 많은 사람들을 꼭 안아주었다. 사감 포옹이라고 한다. 시와 노래를 발표하고, 나의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은, 그 프로그램이 끝난 쉬는 시간에, 옹달샘 스태프인 아침지기 한 분이 다가와 나를 꼭 안아주면서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라고 했다. 너무 감동적이었다고 했다. 응원한다고 했다. 이 분은 옹달샘의 아침지기 가운데 여신이었다. 여신 가운데에도 최고 여신 아프로디테였다. 초등학교에 선생님을 하고 계신 예쁜 여신이 있어서 조울증이 재발하여 명상센터까지 흘러 들어오게 되었는데, 명상센터에는 더 등급이 높은 여신이 명상센터 직원 아침지기를 하고 있었다. 예쁜 여신 중 여신 아프로디테 아침지기가 내 마음에 들어왔다.
그 후 모든 명상치유 프로그램이 재미있어졌다. 마음이 완전히 열렸다. 치유의 효과가 일어나고, 내 얼굴빛도 달라졌다. 아픈 청년이 빛나는 청년이 되었다. 프로그램이 진행되는 기간 동안 나는 계속 시와 노래를 발표했고, 또 그 안에서 시를 지었다. <녹색뇌 프로젝트>가 끝날 즈음에 나에게는 꿈이 생겼다.
<녹색뇌 프로젝트>가 끝나기 전날, 참가자들이 한 번 더 둥글게 모여 앉았다. 소감 다짐 등등을 이야기하는 시간이었다. 나는 녹색뇌 프로젝트를 통하여 찾은 새로운 꿈을 발표했다.
저는 새로운 꿈을 꾸게 되었습니다. 작가가 되는 꿈을 꾸게 되었습니다.
집에 내려가서 동생 사업장에서 일하면서, 글을 써서 작가가 되겠습니다.
고도원 선생님께서는 내가 세계적인 작가가 될 것이라고 축복해 주셨다. 대신에 그 자리에 오르기까지는 수 차례의 고비를 더 넘어야 할 것이라고도 말씀해 주었다. 그때부터 나는 작가가 되어야겠다는 뜻을 세웠다.
물론 그 이전에도 이미 작가로서의 씨앗을 키워가고 있었다. 대학교 때 국어국문학과의 소설 창작 시 창작 등 문예창작 교양 수업을 듣기도 했다. 국어국문학과의 문학과 관련된 전공과목도 몇 개 들었다. 2000년도에 나의 시 《나의 마음에 어느 고을엔》의 최초 버전을 썼다. 그 이후 거의 20년의 세월 동안 사골국처럼 우려먹으며, 단어 하나하나를 다듬어서 완성했지만 말이다. 그 이전에 첫사랑 소녀에게 보내는 편지를 매일매일 일기처럼 썼었다. 좋은 평가를 받지는 못했지만, 중학교 국어시간에 단편소설을 쓰기도 했다. 초등학교에서는 백일장에 나가기도 했다.
작가가 되는 뜻을 2015년에 세웠지만, 그 이후 나는 글을 쓰지 않았다. 글을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한 것은 작년 2019년 8월부터였다. 블로그에 글을 거의 매일매일 쓰기 시작했다. 책으로의 출간에 적합한 양과 질의 글은 아니었다. 작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으로, 일단 큰 의미가 없는 글들을 써 왔다. 올해 2020년 10월 5일 브런치 작가가 되었다는 축하 통보 메일을 받았다. 브런치 작가가 되고 난 후에야 본격적인 글을 쓰기 시작되었다. 책 출간의 목적으로 그동안 써 놓았던 글들을 모으고, 새 글들을 몇 개 더 써서 어제 브런치북으로 완성시켰다. 그리고 브런치북 출판 프로젝트에 응모했다. 그 날이 오는 날까지 걸어가 보겠다. 나는 작가의 길을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