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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다함 Oct 25. 2022

추억의 백령도

오래 전 10시간 이상 걸리던 옹진호


개짱이 브런치 작가님은 나의 인스타 친구 인친이다. 스테르담 작가님 중심으로 브런치 작가 모임인 팀라이트가 있다. 팀라이트에서는 매월 인사이트나이트라고 줌 강연을 한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거의 매월 인사이트나이트 강연을 듣고 있고, 개짱이 작가님은 인사이트나이트 스태프다. 팀라이트와 인사이트나이트로 아는 개짱이 작가님은 나의 인친이기도 하다. 인친 개짱이님의 인스타 피드가 떴다. #지방에서살고있습니다 라는 해시태그의 시골살이에 관한 피드였다.


 저희 어머니 아버지께서 초등학교 부부교사셨어요. 어머니는 20년 하시고 명예퇴직하시고. 아버지는 정년퇴직하시고요. 부모님 직장 때문에 저 초등학교 때 백령도에서 3년 살았어요. 북한이 바로 앞에 보이는 그 백령도.

개짱이 @나 세상에 북한 앞 백령도 어떠셨는지 궁금합니다.


나의 어머니 아버지처럼 개짱이님도 초등학교 교사이다. 나의 댓글과 개짱이님의 대댓글이 아주 오래전 초등학교 때 백령도 살이의 기억을 소환했다. 백령도 살이에 대한 궁금증의 대한 답변을 브런치 글로 갈음하려 한다.




백령초등학교


나의 어머니 아버지께서는 초등학교 부부교사셨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지만, 당시 국공립 학교 선생님은 몇 년마다 한 번마다 근무지역을 이동해야 했다. 예를 들어, 수원의 두 학교에서 8년을 근무한 후에, 안양의 학교로 옮겨 근무했다. 한 학교에서는 4년 한 지역에서는 8년 있을 수 있었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지만, 당시에는 오지 벽지에서 근무하면 점수가 있었다. 교감 교장 승진에 필요한 점수였다. 백령도는 벽지였지만, 승진 점수도 따고, 아이들 어릴 때 대자연의 정서도 함양시켜주고자, 젊은 부부교사들이 줄을 섰다.


나 초등학교 3학년 때 영흥도에서 1년, 4 5 6 학년 때 백령도에서 3년, 총 4년의 섬 살이를 했다. 지금은 영흥도에 갈 때 육지에서 연륙교로 대부도를 가로질러 차를 타고 가지만, 당시에는 인천에서 배 타고 갔다.


추억의 자동차, 현대 포니


영흥도 1년의 기억은 아빠 오토바이 한 대에 4 식구가 타고 다닌 것이다. 아버지가 운전하시고, 동생이 아버지 앞에 타고, 어머니가 뒤에 타시고, 내가 아버지 어머니 사이에 끼고, 그런 식이었다. 백령도에서는 육지에서 중고차 포니를 가져와 타고 다녔다. 포니는 현대차로 한국차 최초의 독자생산 모델이었고, 우리가 타고 당시에도 이미 오래된 똥차였다.




백령도에서는 학교 사택에서 살았다. 선생님들이 외지에서 잠시 왔다 가는 섬이라, 선생님들은 사택에서 살았다. 학교 안의 사택과 밖의 사택이 있었는데, 우리는 학교 안 사택에 살았다. 학교 안 사택의 장점이 시설과 거주환경이 좋았다면, 단점은 교장 선생님 사택이 옆집이었고, 학생들이 학교에 있는 시간에는 학생들에게 사생활이 노출되었다. 물론, 학교 안 사택이라 해도, 학교 저 뒤 구석에 짱 박혀 있기는 했다.


쉬는 날 가족끼리 낚싯대를 가지고 망둥어를 잡으러 다녔다. 나는 밖에 나가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혼자 집에서 프로야구를 보기도 했다. 영흥도였는지 백령도였는지 구별이 가지는 않지만, 물이 빠지면 갯벌에 호미를 들고나가 조개를 캐고 낙지를 잡았다.


백령도 특산물 중 하나가 해삼이었다. 백령도에서도 해삼은 귀한지라, 그 안에서 살아가는 동안에는 맛보지 못했다. 방학을 맞이하여 육지에 휴가 나올 때, 선물용으로 몇 통을 사 가지고 나와, 선물로 주고 얻어먹었다.


지금은 배가 바뀌어 4시간이면 간다. 내가 백령도에 살던 그때는, 편도로 10시간이 넘게 걸렸다. 새벽에 인천을 출발하면 밤에 도착했다. 새벽에 출발하는 배의 문이 열리면, 잽싸게 들어가 돗자리를 깔고 드러눕는다. 돗자리만 깐다고 내 땅이 아니라, 돗자리 위에 드러 누어야 내 땅이다. 그날의 배 안의 내 땅이 결정되는 때는 배가 출발하는 순간이다. 배가 일단 출발하면, 그때부터는 돗자리와 짐만 놓은 채 자리를 떠도, 배가 도착하는 순간까지 내 땅이다. 배로 10시간이 넘는 긴 여행이라 드러누워 자면서 가지 않으면, 배 타는 내내 멀미하여 토하며 가야 한다. 지금은 배가 바뀐 지 오래라, 아주 오래전 이야기다.


백령도에 달동네라는 동네가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보통 슬럼가나 빈민촌을 달동네라고 부른다. 백령도의 달동네는 그 반대였다. 백령도의 달동네는 부촌이었다. 같은 학년 여자 친구 한 명이 달동네에 살았다. 백령도 토박이인데, 부모님이 어부도 군인도 아니었다. 아버지가 KBS 방송국 직원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KBS 방송국 백령도 지부의 현지 직원이었다.

백령도 달동네에 살던 KBS 직원 딸에 대한 추억이 있다. 4학년 때였는지, 5학년 때였는지, 6학년 때였는지, 기억이 나지는 않는다. 한 학년에 한 학급밖에 없던지라, 항상 같은 반이었기 때문이다. 새 학년이 되었고, 새 선생님을 만났고, 짝을 뽑는 투표를 했다. 남자아이는 여자 아이를 뽑고, 여자 아이는 남자아이를 뽑는, 그런 짝짓기 같은 짝뽑기 투표였다. 대부분의 여자 아이들은 한 남자아이를 뽑았고, 대부분의 남자아이들은 한 여자 아이를 뽑았다. 둘은 서로를 뽑았고, 왕자와 공주가 탄생했다. 그 왕자님은 백령도 최초 호텔 오너의 아들이었고, 그 공주님은 예뼜다.

2차 투표에서 나는 KBS 딸을 뽑았다. 사실 그 여자 아이는 나를 뽑지 않았는데, 중간에 표를 걷어가는 여자 아이가 개표 전에 내 표를 하이재킹 하여, KBS 딸에게 내가 자신을 뽑았다고 가르쳐 주었다. KBS 딸은 투표지에 쓴 다른 이름을 지우고 내 이름을 적었다.

시간이 아주 오래 지난 후에, 나는 대학에 다니고 그 친구는 대학을 졸업했을 때, 그 친구와 연락이 닿아 롯데리아에서 한 번 만났다. 병원에 입원해야 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나는 조울증으로 일상성을 잃어버렸고, 조금 이상한 사람이었다.

롯데리아에서 햄버거 세트를 먹고, 그 친구는 나에게 『새의 선물』이라는 은희경 소설을 선물했고, 나는 그 친구에게 『땅콩박사』라는 위인전을 선물했다. 땅콩박사는 한 흑인이 땅콩으로 박사가 되어, 땅콩으로 미국 사회에 기여한 이야기다. 나는 왜 『땅콩박사』를 선물했는지 잘 모르겠다. 그 친구는 왜 나에게 『새의 선물』을 선물했는지도 모르겠다. 은희경의 『새의 선물』다소 야한 책이었다. 그래서 재미있는지도 모르겠다. 조숙한 어린 소녀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그런 소설로 기억한다. 나는 그 친구에게 왜 그 책을 선물했고, 그 친구는 왜 나에게 다른 그 책을 선물했는지, 잘 모르겠다. 커서 한 번 만나고, 더 이상 연락을 하고 지내지는 않았다. 인천교대 평생교육원에 뭐 배울 게 있어 갔다가, 당시 거기서 잠시 조교를 하고 있던 그 친구를 아주 우연히 한 번 마주쳤던 것을 제외하고 말이다.


당시 프로야구 태평양 돌핀스에 박은진 선수라고 있었다. 그때는 몰랐는데 검색을 해 보니 당시 잘 나가는 마무리 투수였다. 어떤 역사는 지금보다 시간이 지나서 보는 게 더 정확할 때가 있다. 당시를 살아갈 때는 잘 모르나, 시간이 지난 후에 그 의미를 알게 될 때가 있다. 당시 그 노래에 관심이 없었으나, 시간이 아주 오래 지난 후 내가 좋아하게 된 지나간 노래처럼 말이다. 프로야구 선수 박은진을 기억하는 것은, 그가 백령도 출신이었고, 시즌이 끝나고 휴가 때 백령도에 왔다. 백령도 아이들에게 사인공을 풀었고, 백령도 아이들과 캐치볼도 했다. 당시 백령도 아이들에게는 백령도 박찬호였다. 나는 박은진 선수를 직접 만나지도 못했고, 같이 야구하며 놀지도 못했다. 어떤 경로로 사인볼은 내 손에 들어왔다.

당시 큰 외삼촌과 큰 이모는 부자였다. 큰 외삼촌은 잔디가 깔린 마당이 있는 방배동의 2층 단독주택에 살았고, 큰 이모는 압구정 현대아파트에 살았다. 큰 외삼촌 아들인 사촌 형이 쓰던 리틀야구 야구장비가 우리에게 왔다. 그냥 글러브 한 두 개랑 야구공 하나 정도가 아니라 야구장비 세트였다. 일반 글러브가 아닌 포수 글러브도 있었고, 포수 헬멧도 있었고, 포수 배에 장착하는 보호대도 있었다. 그 야구장비를 가지고 우리들끼리 작은 구단 하나를 창단할 수 있었다.

학교 운동장 한 편에서 우리는 야구를 했다. 우리끼리 야구단을 창단했다. 우리 야구단 이름은 공포의외인구단이었다. 리틀야구 공포의외인구단의 구단주는 나였다. 동생 친구들 중심의 팀 멤버 중 나이로서 제일 형이었고, 야구장비의 주인이 나였다. 맞으면 아픈 진짜 야구공을 대신 테니스 공으로 야구를 했다. 미끄럼틀을 넘기면 홈런이었다. 우리가 야구를 하던 운동장 한쪽 구장(?) 뒤편에는 방공호가 있었다. 전쟁 나면 숨는 곳인데, 깜깜해서 사실 그 안에 뭐가 있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야구장비를 방공호에 넣어두었다. 우리 집인 학교 사택에 가져다 놓아도 되는데, 점심시간 쉬는 시간 야구를 하다가 집에 다가 장비를 가져다 두고 교실로 들어가기는 번거로웠다. 방공호에 야구장비를 두었는데, 어느 순간 잊어버렸다. 누가 가져갔나 보다.


매년 백령도와 부속섬 학교들이 모여 군부대장 배 운동회를 했다. 우리 학교는 백령도와 부속섬 대청도 소청도 섬 학교와 분교 중 두 번째 규모의 학교였지만, 5학년 6학년 다 선수로 뛰어야 축구팀 하나가 나왔다. 물론, 후보까지 포함해서 말이다. 나는 6학년이었지만 후보였다.

3개월 정도 아침과 방과 후 축구 훈련을 했다. 다른 학교를 불러 연습 게임도 했다. 대회를 앞두고 나는 부상을 당했다. 축구하다 부상을 당한 것은 아니었다. 친구들끼리 1층 단층의 동사무소 건물 옥상에 올라갔다. 한 친구가 자기가 옥상에서 뛰어내릴 수가 있다고 했다. 뛰어내리겠다고 하면서 뛰어내리지 않았다. 내가 먼저 뛰어내렸고, 그 친구는 나를 따라 뛰어내렸다. 그 친구는 공사를 위해 쌓아 둔 모래 위로 뛰어내렸고, 나는 콘크리트 바닥에 발바닥을 정면으로 떨어졌다. 발바닥으로 뛰어내렸지만, 콘크리트로 떨어져서, 한동안 정상적으로 걸어 다니기 어려웠다. 병원에 가고 깁스를 한 것은 아니었지만, 다리를 절면서 다녔다.

부상으로 훈련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볼을 제대로 찰 수 없어서였는지, 아니면 실력이 되지 않아서였는지, 나는 후보로 벤치만 지키고 있었다.

아버지는 옆 학교 축구팀 감독이었다. 그 학교는 아주 소규모 학교였다. 아버지 학교는 한 게임을 이기고, 부전승으로 결승전에 올라갔다. 운이 좋아 부전승으로 결승에 올라갔지만, 작은 학교가 큰 학교와 싸워 한 게임을 이기고 결승에 올라, 그 학교와 학부모가 난리가 났다. 경사가 난 것이다. 아버지는 우리 학교 감독 선생님과 달리, 후보들 한 명 한 명 전부 게임에 내보냈다. 승리 이전에 아이들 시합인데, 후보들도 게임 한 번씩 뛰어 보아야 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셨다.


백령도도 나름 작지 않은 섬이고, 군인도 많고 그 자녀도 많아, 그때도 있을 것은 다 있었다. 짜장면 집도 있고, 사진관도 있고, 학원도 있었다. 나는 컴퓨터 학원을 다녔다. GW 베이직이라고 프로그래밍 언어를 배웠다. 그때도 코딩 교육 같은 게 있었다. 물론, GW 베이직은 아무 쓰잘데 없었던 언어였지만 말이다. 아이들 컴퓨터 논리를 길러준다고 가르쳐 주었던 것 같은데, 순서도 그리고 검은 흑백 화면에 하얀 글씨로 코딩을 했다. 아무 의미 없었다.

거기도 그런 게 있었을 텐데, 공부 학원, 피아노 학원, 태권도 학원은 다니지 않았다. 서예 학원에 다녔다. 한중일 어린이 국전에 나가서 상을 탔다. 물론, 어린이 서예 대회라고 상을 아주 많이 줬다. 출전비 내고 상을 사가는 것과도 같은 그런 국전이었다. 선생님이 쓴 글씨 위에 한지를 올리고 따라 썼다. 모두가 그랬지는 않았겠지만, 다른 참가 어린이들도 대부분 그렇게 했을 것이다. 사실 그 상도 무용지물이었다. 섬 아이들이 선생님 따라서 서예 글씨 스며 정신을 함양하면서, 육지에 나가서 멋진 곳에서 상 타고 맛있는 것 먹고 돌아오는 그런 것이었다.

공부 학원은 다니지 않았다. 다닐 필요가 없었다. 엄마가 초등학교 선생님이니 말이다. 엄마가 옆에 끼어놓고 동아전과 옆에 가져다 두고, 이달학습 다달학습 풀이를 시켰다. 지금에 와서 보면 엄마가 아주 공부를 지독하게 시킨 것은 아니고, 학교 진도에 맞추어 문제 풀이시키고 그 정도였다. 학교에서 1등을 달렸다. 섬이라서 그런 것도 있지만, 거기서도 외지에서 오거나 환경이 좋은 아이들은 육지 아이들처럼 공부했고 잘했다. 육지로 올라와 안양의 중학교 가서 처음 반 배치고사를 보았을 때 전교 6등을 했다. 물론, 첫 중간고사에서 바로 반 10등을 했다. 그때는 학급 당 학생 수가 지금 같지 않아서 많기는 했다. 어머니가 내가 중학교 올라가자마자, 나 공부시키는 것 손을 바로 떼어 버리셨다. 학원이나 과외를 다니던 것도 아니고, 자기주도학습 능력을 갖춘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중학교 때 반에서 10등 달리다가, 반에서 10등 정도 하는 애들이 가는 고등학교에서 반에서 10등 하다가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인천에서 배 타고 10시간 이상이 걸렸는데, 전망 좋은 곳에서 날씨 좋은 날 저 건너편을 보면 북한에서 북한 사람들이 왔다 갔다 하는 것이 보였다. 가끔 북한 사람이 물살에 떠 내려왔다는 소문이 들리는 그런 곳이었다. 내가 있을 때는 북한의 큰 도발 같은 것이 있었던 기억은 없다.


우리가 백령도에 있을 때, 할아버지 4형제 형제 내외분들이 단체로 우리 집에 놀러 오셨다. 풍랑 때문에 배가 묶여 섬에 예정보다 더 오래 계셨다. 할머니 여러 분들이 계시니, 청소도 뚝딱 하시고, 텃밭에 심어 놓은 야채도 뚝딱 캐시고, 밥도 뚝딱 해 놓으시고 하셔서, 어머니께서는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오히려 힘들지 않으셨다고 한다.


4학년 5학년 6학년 3년 백령도에 있었다. 그때가 1989년 1990년 1991년이다. 아주 오래전 일이다. 이렇게 쓰고 보니, 나도 옛날 사람이다. 백령도에 대한 그런 추억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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