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팔에 오기 전 힘들었다. 아내 에미마를 만나 결혼했고, 아들 요한이의 아빠가 되었고, 사랑 때문에 시작된 조울증을 사랑 때문에 극복했고, 다시 직장에 다니며 돈을 벌고, 브런치 작가가 되어 글을 쓰고 있다. 그런 나는 행복하지 않았다. 불행했다.
20년의 조울증 동안 잃어버린 대부분의 것을 얻었는데, 하기 싫은 것을 해야 했고,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없었다. 하기 싫은 것을 하는 것보다,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없는 게 나를 힘들게 했다. 내가 하기 싫은 것을 해야 하기 때문에,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할 수가 없었다.
네팔에 오는 비행기를 타면서 나는 내 개인의 인생의 혁명을 꿈꾸었다. 네팔에 한 달 살다 돌아오면 다른 내가 되어 돌아가리라. 남이 원하는 삶을 사는 가짜 내가 아니라 내가 원하는 삶을 사는 진짜 내가 되어 돌아가리라. 하고 싶지 않은 일은 하지 않고, 하고 싶은 일을 하리라. 행복해질 것이고, 자유로워질 것이고, 더 많은 돈이 나를 따라오리라. 지금 이런 글을 쓴다는 것은, 나의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는 의미다. 혁명은 성공하면 된장이요 실패하면 똥이다. 혁명은 성공하여 밥이 될 가능성보다 실패하여 죽이 될 확률이 절대적이기에, 지금은 현실 가능성을 생각한다. 용기가 필요한지 현실감각이 필요한지 고민한다. 어떤 현재는 과거를 혁명하기에 존재하고, 어떤 미래는 현재를 혁명함으로 존재할 것이기 때문이다. 나의 혁명이라고 해 보았자 오늘의 밥을 걸고 내가 하기 싫은 것을 하지 않고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고스톱 한 판에 불과하지만 말이다.
한국은 부자 나라고 네팔은 가난한 나라다. 부자 나라 한국의 국민은 나를 포함하여 불행해 보이고, 가난한 나라인 네팔의 국민은 행복해 보인다. 여기나 거기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나름의 사회적 모순도 있고 나름의 미학도 있다. 부와 행복이 반비례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부와 행복은 긴밀한 상호작용을 하지만 관련이 없는 별개의 것이라는 게 나의 결론이다. 나는 한국에서 경제적 자유인으로 살 수 있는 정도의 부와 정신적으로 자유인으로 살 수 있는 정도의 행복을 추구한다. 극강의 부와 행복의 쾌락을 추구하는 변태는 아니다.
네팔에서 일주일 지내며 다시 느끼는 바는, 행복은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함에 있어서 오는 것이 아니다. 내가 할 수 있는 하고 있는 오늘 여기의 삶을 나의 삶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임에 행복이 있다.
물론 지금 나는 행복과 사랑이 인간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필수품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행복과 사랑은 인간의 인생을 가치롭게 하는 구찌 같은 사치품이고, 삶의 고통을 잠시 잊게 하는 타이레놀 같은 진통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