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Sep 04. 2023
미술교양, 미술사, 김인혜의 살롱 드 경성
내가 스무 살 되던 해 군대에 갔고, 군대에서 조울증에 걸렸고, 군입대 6개월도 채 되지 않아 의가사 제대를 했다. 조울증과 함께 과대망상이 찾아왔을 때 내 인생 단 한 편의 시가 찾아왔다. 어떤 의미에서 나는 책 한 권도 아닌 한 편의 시를 지은 시인이다.
조울증에 걸리고, 인생의 한 편의 시가 찾아온 그해, 나는 L과 친구가 되었다. L은 (얼마나 많은지는 모르지만) 나보다 나이가 많았고, (남자로서는 드물게) 동네 피아노 선생님이었다. L의 피아노 학원은 L의 예술가 친구들의 아지트였다. L은 거기서 피아노 교습을 하면서, 그림을 그리고, 성악과 해금을 배웠다. 시간이 흐르고 L은 피아노 학원을 접고, 그 자리에 아트홀 간판을 올리고, 입장료 5000원을 받고 차를 한 잔 주었다.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이 있고, 독신남이고, 그 공간에 모이는 그의 동네 예술가 친구들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이야기 인지도 모르겠다. 아주 오래전 이야기이고, 여전히 나는 그와 가까운 곳에 있지만, 그의 아지트를 더 이상 찾지는 않는다.
해냄출판사에서 출간된 <살롱 드 경성>의 부제는 <한국 근대사를 수놓은 천재 화가들>이다. 미술사를 전공하고 미술사가인 저자가 일제강점기와 한국 전쟁을 겪는 동안에 천재 화가들에 대해 풀어놓은 이야기다. 단순히 그 시대의 그림들을 소개하는 차원이 아니라, 화가들의 삶의 스토리를 담은 책으로 흥미진진하다. 화가와 그의 친구 문인들, 화가와 연인들, 화가와 시대, 예술가로서의 고통과 방황의 운명 등등에 대해 쓴 책이다.
이 책에 첫 장에서는 시인 이상과 화가 구본웅의 우정 이야기로 시작한다. 이상이 친구 구본웅과 기생 금홍이와 종로에 ‘다방 제비’를 차린 이야기가 나온다. 다방 제비는 그냥 다방이 아니었다. 미술관도 음악당도 없던 그 시절의 예술인들의 아지트였다.
화가 구본웅의 친구 시인 이상은 도쿄에 갔다가 불령선인으로 몰려 구치소 생활을 하다 27세 나이에 죽는다. 구본웅과 이상의 친구 작가 박태원은 월북했다. 시인 백석과 그의 시에 그림을 그려준 화가 정현웅도 전쟁통에 월북하여 그 이후 흔적은 없다. 시인 정지용과 화가 길진섭도 같은 시절 월북하여 같은 신세가 되었다.
내가 이름을 아는 몇 안 되는 한국 화가 박수근과 박완서도 인연이 있다고 한다. 625 전쟁이 한창일 때 박수근은 미군 PX에서 스카프나 손수건 귀퉁이에 손님의 애인이나 가족의 사진을 보고 초상화를 그려 주었고, 박완서는 미군들에게 서투른 영어로 호객행위를 했다. 박수근이 작고한 해 유작전이 열렸는데, 그 유작전을 찾은 그때 나이 39세였던 주부 박완서가 작가가 되었다. 박수근의 삶에서 시작된 박완서의 소설이 <나목>이다.
시인 이상의 아내는 변동림이었다. 이상과 변동림은 이상 생전에 같이 죽자고 영원한 사랑을 다짐했었다. 변동림은 이상이 먼저 떠나고 김향안으로 이름을 바꾸고 화가 김환기의 아내가 된다. 변동림 또는 김향은은 20세기 두 천재가 사랑한 여인이었다. 김향안은 김환기가 뉴욕에서의 30년간의 화가 인생을 이끌었다. 남편 김환기의 작품 슬라이드를 들고 먼저 파리에 가 소르본대학과 에콜 드 루브르에 다니며 프랑스어와 미술사를 먼저 공부하고, 파리 화단의 주요 인사와 교제하여 김환기의 아틀리에를 구하고, 개인전 일정도 잡은 후 김환기를 파리로 불러들인 것도 김향안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