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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한 Nov 13. 2020

너 때문일까, 나 때문일까?

사라진 주민등록증을 찾아줘.

인생의 가장 큰 첫 결정을 내리는 순간은 바로 진로 선택이다.

기대와 두려움이 공존하는 시기.

수능이라는 테스트가 마치 나의 미래를 결정짓는 것만 같은 무게감을 느끼는 순간이 다가온다.

우리 대한민국 청년들은 열여덟이라는 나이에 처음으로 자본주의가 낳은 계급론에 부딪힌다.

막연한 두려움이 아닌, '성인'이라는 현실감을 피부로 느끼는 순간은 언제일까?

아마도, 첫 주민등록증이 발급되어 손안에 들리는 그 순간일 것이다.


주민등록증이 발급된다는 것은 여러 가지 사회적 의미를 부여받는 것이다.

이 작고 네모난 카드 한 장은 20대 초반의 청년들에게 그 어떤 값비싼 보물보다 소중한, 분신 같은 존재가 되곤 한다.


대학을 막론하고, 누구나 이 카드 한 장이면 그동안 금기시되어왔던 '어른의 맛'을 맛볼  수 있다.

친구들과 함께 밤 10시가 넘어서도 PC방에 들어갈 수 있고.

대학가의 호프집, 노래방, 클럽.

이 카드 한 장이면 못 갈 곳이 없다.

마치 놀이공원에서 어떤 제약도 없이 내가 타고 싶은 놀이기구라면 그 어떤 것이든, 하루 종일 탈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은 자유이용권 카드처럼 말이다.

그야말로 주민등록증이란 신세계로 향하는 출입카드, 대학가를 누비는 프리패스 같은 존재이다.




대학 시절, 친구들과 술집에 갔을 때였다.

각지에서 모인 대학생들의 모임이란, 언제나 시끌벅적한 법이었다.

그날도 자리에 앉자마자 왁자지껄 수다를 떨고 있었다.

항상 리더 역할을 해오던 친구 한 명이 메뉴판을 둘러보고 직원을 불렀다.

그런데, 친구와 눈이 마주친 직원이 사장님으로 보이는 남성분에게 다가가 무언가를 속삭였다.

왠지 모를 포스가 느껴지는 그 남성분은 우리 테이블로 성큼성큼 다가와 낮게 깔린 목소리로 물었다.

"민증 좀 보여주시겠어요?"

"아~, 네네!"

당당하게 주민등록증이라는 프리패스권을 꺼내며 한 명씩 성인 인증을 시작했다.

그런데, 한편에서 가방을 마구 뒤적거리던 친구가 당황하며

"집에 놓고 왔는데요, 어떡하죠?" 하는 거다.

결과는 뻔했다. 술집에서 쫓겨난 친구들은 밤새 민증 검사를 안 하는 허술한 술집을 찾아 돌아다니다 해산을 해야 하는 아픔을(?) 겪어야만 했다.


너 때문이잖아!


역적이 되어버린 그 친구는 그 날 이후로 잘 때도 머리맡에 지갑을 두고 자는 버릇이 생겼다는 후문이다.




20대 초반 까지만 해도 분신과도 같았던 소중한 주민등록증은 점점 빛을 잃어가기 시작한다.

주점에서도 "민증 좀 보여주세요." 하는 날이 점점 줄어들고.

취직한 후에는 주민등록증보다 사원증을, 명함을 더 아끼게 된다.


20대 중반이 지나 서른 즈음이 되면, 나를 어디로든 데려가 주던 이 마법의 카드는 그야말로 쓸데없는 골동품이 되어간다.

주민등록증보다는 운전면허증이 나의 신원을 보장하는 일이 훨씬 많다.

이제는 모임에 나가도 '쓰윽-' 얼굴만 훑어봐도 프리패스다.

아무도 "민증 좀 보여주세요."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그러다 한 번쯤, 아주 고맙게도 우리에게 민증을 요구하는 종업원이 나타나면...

그 술자리에서의 첫 대화는 이렇게 시작된다.


나 때문이거든?


서로 자기 때문에 민증 검사를 한 거라며 우겨대는 현상이 발생된다.

너 때문이라고 서로를 탓하던 시절은 끝나고, 나 때문이라고 우겨대는 시절이 왔다면...

어른이 되어간다는 증거일 것이다.


당신의 얼굴에도 세월이 지나간 흔적이 아주 조금은 묻어있다는 뜻일 테니까.
아 다르고 어 다르다. -  너 때문이냐 나 때문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더욱더 슬픈 진실은, 시간이 지나면 누구도 당신에게 주민등록증을 요구하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소중했던 마법의 프리패스 카드가 지갑 속의 장롱 민증이 되는 나이쯤 되고 나니,  아주 가끔은 서로를 탓하던 그 시절이 그리워질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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