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시태그가 많아졌다.
다섯 살짜리 조카에게 여자 친구가 생겼다.
장난기 어린 조카의 얼굴에서 처음 보는 수줍은 미소였다.
"예린이가 왜 좋아?"
라고 물으면, 배시시 웃으며 차마 말을 잇지도 못했다.
어린 조카에게 얼굴을 들이밀고 집요하게 캐묻자 한숨을 푹 내쉬던 조카는 이렇게 대답했다.
"몰라."
만족스러운 대답을 얻기 못한 나는, 조카를 만날 때마다 묻고 또 물었다.
도대체 예린이가 왜 좋은 거냐고 말이다.
그러자 그 다음번 질문에는 조카가 꽤나 흡족한 답변을 내놓았다.
"냄새가 좋아."
처음으로 이유라고 칭할만한 단어를 꺼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조카는 아마도 귀찮은 이모의 질문을 피하기 위해 아무 말이나 내뱉은 모양이었다.
나에게도 어린 시절 그런 친구가 있었다.
나중에 커서 그 친구와 결혼하겠노라며 일기장에 몰래 적어놓곤 했다.
도대체 결혼이 뭔지나 알고 적은 일기였는지.., 아직도 의문이지만 나에게 그 친구는 그 시절 내 인생의 전부와도 같은 소중한 존재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생이 되면 살면서 한 번도 만나본 적 없는 낯선 이성을 만나게 된다.
친구나 선후배 혹은 주변 지인들이 소개팅이라는 걸 주선할 때면 꼭 나오는 질문은 바로, 그 사람의 전공학과이다.
그리고 사회생활을 할 나이가 되면, 그 질문들은 조금씩 더 구체적으로 변한다.
"무슨 과야?" > "뭐 하는 사람이야?" > "집안은 어때?"
결혼하는 지인들이 늘어나는 시기가 오면..., 이건 뭐 거의 취조실에서 묻고 답하는 질의응답 수준이다.
"어떤 스타일이 좋아?"
"그냥.... 착하고, 성실하고, 가정적이고, 평범한 집안에...."
나이와 직업, 성격과 하다못해 술버릇까지....
그리고, 집안의 채무상태, 집안 어른들이 현재 직업을 유지하고 계신가, 상대 부모님의 노후대책까지 알려 든다.
좋아하는 이성의 부류를 나누는 해시태그가 점점 많아지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이성관계의 피로감을 느끼게 된다.
단지, 설레던 연애 세포들이 되살아나길 바랐을 뿐인데.
나와 상대의 사회적 레벨을 따져봐야 한다니...
분명 내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
문방구에서 파는 500원짜리 반지를 나눠 끼는 것만으로도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던 시절.
버스에서 좋아하는 남자를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두근거리는 시절.
가진 거라곤 엄마에게 받은 오천 원짜리 지폐 한 장이 전부인 남자 친구와 공원에 앉아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던 시절이 있었다.
아무런 이유 없이 그냥이 많았던 시절이다.
아주 가끔은 많은 질문에 대한 답변에 이유를 다는 나 자신이 피곤하다.
그러다 보면 누구에게나 그냥....
'그냥'이라는 의미를 되찾고 싶은 순간이 오기 마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