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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한 Dec 04. 2020

용건이 없는 전화통화

잘 지내냔 물음 뒤엔 언제나 목적이 있다.

요즘 10대 친구들에게는 휴대폰 번호가 010이 다른 번호로 시작한다는 건 상상할 수 없는 일일 것이다.

 011, 016, 017의 마지막을 목격하는 30대의 내겐 어린 시절 빨간 전화기에 수많은 추억이 담겨 있었다.


빨간 집 전화기 시절을 지나, 그 후에는 070으로 시작하는 인터넷 전화가 유행이었다.

일반 전화 요금보다 저렴하다는 이유에서, 손에 딱 잡히는 작은 무선전화기 모양이었다는 이유로.. 070은 핫한 잇 아이템이 되었다.

게다가 내가 고등학생이던 때에 우리 집에는 독일로 유학간 언니가 한 명 있었다.

공부라면 치를 떠는 나와는 다르게 전교 1등의 인생을 살아온 언니는 부모님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머나먼 이국 땅, 독일로 대학원을 다녔다.


그때는 이해할 수 없었다.

왜 굳이 잘 사용하지도 않는, 070으로 시작하는 인터넷 전화기를 집에 모셔 둬야만 하는지 말이다.

생각해보면 그 시대는 지금처럼 스마트한 시대가 아니었다.

반나절의 시차가 존재하는 이국땅으로 전화를 건다는 건, 보통 일이 아니었다.

물론 국제전화가 존재했다.

공중전화 부스에서 사용할 수 있는 국제전화 전용 전화카드도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 국제전화라는 게.... 아주 아주 비쌌다는 거다.

국제전화를 이용하기엔 우리 집은, 우리의 집의 가정형편은 마이너스 통장을 품에 끼고 사는, 아주 지극히도 평범한 시골집이었기 때문이었다.


반나절이나 되는 시차를 퍼즐 조각처럼 맞춰가면 그나마 전화 통화할 타이밍이 생기는 틈이 있었다.

그 순간을 위해서 엄마는 070 전화기를 구입했을 것이다.

혹은 언제 올지 모르는 딸의 전화를 한 통이라도 놓치고 싶지 않은 마음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랜선으로 연결된 인터넷 전화기는 딸을 향한 엄마의 그리움이었을 거라 짐작한다.


엄마의 마음을 헤아리기에 나는 너무나도 어린 나이었다.

그저 친구들과 밤새도록 통화해도 전화요금이 나가지 않는 인터넷 전화기가 좋았다.

뭐가 그리도 할 말이 많았을까?

내일이면 또다시 학교에서 만날 친구들이었다.

같은 교실에서 수업을 듣고, 같은 식당에서 밥을 먹고, 같은 공간에서 하루 온종일을 함께했다.

그러고도 저녁이 되면 깔깔거리며 통화를 했다.




서른이 넘어 다시 공부를 시작한 나는 1년째 휴직 상태다.

딱히 통화할 업무 전화도 없고, 특별한 약속을 잡지 않으면 온종일 아무와도 대화를 나누지 않는 하루를 보내기도 한다.

하나 있는 남편이 출장을 가거나 늦게 들어오는 날이면 입에서 단내가 나도록 입을 열지도 않는다.

이제는 침묵이 조금 익숙해져서인지 말없는 하루를 보내고도 별로.... 우울하지도, 심심하지도 않다.


그러다 한 번씩 누군가와 꼭 통화를 해야 하는 사건이 생기는 날이 있다.

예를 들자면 이런 순간이다.

내가 일하던 제작사의 직원에게 무언가의 서류를 요구해야 할 때, 한동안 안부도 묻지 않던 이에게 전화를 해야 하는 순간.

나는 이런 순간이 참 힘들다.

이제 곧 32살인 유부녀가 되어서도 사회적 관계가 쉽지만은 않다.


“잘 지내세요~?” 로 시작하는 전화통화는 곧 서먹서먹한 대화들을 오간다.

“별 일 없으시죠?”

“요즘 일은 어때요?”


친구들과의 전화통화도 별반 다르지 않다.

“잘 지내?”

“요즘 어때?”

“남편도 잘 지내지?” 혹은, “연애사업은 잘 돼가?”


가깝게 지내는 친구가 아닐 때에는 직장동료들보다도 더하다.

“어쩐 일이야?”

“그냥~ 잘 지내나 해서” 로 시작한 대화는 “나 좀 물어볼 게 있어서~.” 혹은 “부탁할 게 좀 있는데....” 로 끝난다.


꼭 무언의 목적이 있어야만 만나는 관계.

무언의 용건이 있어야만 거는 전화통화의 수가 점점 늘어가고 있다.

더 정확히 얘기하자면.... 용건이 있는 전화통화만으로 바쁜 나이가 된 것만 같다.

전화통을 붙들고 시시콜콜한 수다를 몇 시간 동안 떨고 난 뒤에는 “아이고!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 어떡하지?”라는 말이 저절로 튀어나온다.

분명, 깔깔거리며 밤새 전화기를 붙들고 있어도 아무런 근심 없이 행복하기만 했던 시절이 내게도 있었던 것 같은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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