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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한 Oct 29. 2020

백수선언

글이 쓰고 싶어 백수가 된 방송작가

백수 선언과 아이러니 1. 글이 쓰고 싶어 백수가 된 방송작가

나 TV 예능 작가 그만 할래.

결혼 후 1년 만에 내가 남편에게 던진 폭탄선언이었다.


방송 작가로 살며 단 하루도 편히 쉬어본 적이 없던 내가, 백수를 선언한 날이었다.

방송가 후배인 나의 남편은 눈동자가 흔들렸다.

아니라고 하지만, 그의 심장이 쿵하고 내려앉는 소리를 분명, 아주 또렷하게 들었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7년이란 세월 동안, 지상파 3사, 종합 편성 채널, 네이버 tv, 유튜브, 온갖 프로그램을 전전하며 프리랜서로 살았다.

2010년대의 초반의 사회는 개인의 인권보다 집단, 회사, 사회의 이익이 우선시되는 시대였다.

지금의 방송가도 여전히 개인의 인권과 권익, 프리랜서 작가들이 고군분투하며 노동자의 권익을 지켜내기 위해 노조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한국의 방송가가 가야 할 길은 멀고도 험하다.


어쩌면 아주 좋은 핑곗거리였을지도 모른다.

"원래부터 예능 작가의 길은 내가 드라마 작가 되기 위한 과정이었어."


사실은 그저 예능작가를 직업이 내게 맞지 않는 옷이었을지도 모른다.

성공을 위한 수단이었을 뿐, 목적지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일말의 여지를 남겨두고 있다.

잊힐만하면, 하나씩 아르바이트 삼아 일을 하거나.

매일 구인 구직란을 훑어보곤 한다.

혹시나 좋은 자리가 있을까 싶어서다.

물론..., 반년쯤 지나고 나니. 점점 나의 본업..., 아닌, 전직을 내려놓아야 하는 생각이 든다.




백수가 된 내가 처음 정통 드라마를 쓰겠다며 집안 서재방에 틀어박혔을 때였다.

이제는 해야 할 일도, 써야만 하는 원고도, 날 방해하는 요소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주일에 한편씩 웹드라마 대본을 써 내려가던 나의 손가락은 뻣뻣하게 굳어있었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지?


몇 달 동안 질질 끌며 드디어 60분짜리 단막극의 초고를 완성했다.

한 마디로, 형편없는 글이었다.

어떠한 매력도, 나의 색깔도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나는 점점 깊은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스토리텔링에 있어 언제나 자신감 넘치던 부분들도 모든 것이 의심스러웠다.

그러던 어느 날, 혼자서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맥주 한 캔만 먹어도 얼굴이 빨개지고 심장이 벌렁거리는 나는 소위 말하는 알. 쓰.(알코올 쓰레기)였다.


"술 마셨어? 갑자기 웬 술이야?"

집에 돌아온 남편이 토마토가 된 나를 보며 적잖이 당황해하고 있는 사이, 나의 하소연은 시작됐다.


"아무래도 나..., 작가로서 소질이 없나 봐."


참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글 써서 벌어먹고 살던 방송작가가, 쓰고 싶은 글을 쓰겠다며 일을 때려치운 일도.

드디어 원하고 원하던 드라마 집필의 길에 들어섰음에도, 아무것도 써 내려가지 못하는 현실이라니.

그야말로 영혼이 가출하는 시기였다.




백수 선언과 아이러니 2. 자아 정체성의 혼란

그 후로 풀리지 않던 단막극 초고를 접어두고, 웹소설을 시작했다.

뭐라도 써야 했다.

가족들의 기대와 실패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서 벗어나려면, 뭐라도 해야 했다.


첫 작품만에 드라마와 웹소설의 차이를 깨달았다.

나의 글은 웹소설을 읽는 독자들의 입맛에 맞지 않는 글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지인들과 독자들이 내 글을 읽어줬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웹소설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시나리오로 쓰지 왜 웹소설로 썼대?


'개버릇 남 못 준다'는 옛말이 이런 걸까? 싶었다.

나는 소설을 썼는데, 사람들은 그 글을 영상으로 그려내고 있었다.

심지어는 인기 웹소설들과의 성적 차이는 나의 자존심을 마구 할퀴고 있었다.

'본업 작가가 아닌 작가들도 있다던데, 나는 도대체 뭐지?'

정체성의 혼란이 오는 순간이었다.


악에 받힌 나는 웹소설 독자들이 좋아하는 콘셉트로 다시 시작해보기로 했다.

그런데..., 쓰다 보니 '이거 괜찮은데?, 이거 웹소설로 풀기엔 좀 아깝지 않아?' 하는 내적 갈등이 오는 게 아닌가.


나는 결국, 웹소설로 쓰려던 그 글을 드라마로 풀어내기로 했다.

그렇게 나는 다시 아무도 내가 뭘 하는지 모르는 '드라마 작가 지망생'이 되어 하루하루 자신과의 싸움을 시작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

누군가는 내게 백수라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요즘의 내가 평생을 통틀어 제일 대견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듯하다.

분명, 내 꿈에 한 발짝씩 가까워지고 있는 걸 느끼고 있다.




백수 선언과 아이러니 3. 완벽하고 싶은 욕심과 회피, 그리고.... 내려놓음

한 지붕 아래 살고 있는 남편조차도, 내가 매일 어떤 하루를 보내는지 알지 못한다.

반나절을 방구석에 틀어박혀있는 내게 남편이 전화해 뭐하냐 물으면, 그저 "뭐하긴~, 그냥 있어." 하고 만다.


어떤 날은 한 자도 적지 못하고, 어떤 날은 하나의 시놉시스를 뚝딱 완성하기도 한다.

조금은 성장한 나의 시놉에 혼자 자화자찬하며 기뻐하다가도, 나아가지 못하고 제자리걸음 하는 글에 우울한 하루를 맞이하기도 한다.


그러던 어느 날부턴가 조금씩 내려놓기 시작했다.

"백수가 되었으니 이제 빨리 글을 쓰란 말이야!" 하는 내 안의 채찍질과 압박감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그때부터였다.

잘하고 싶은 욕심을 내려놓고, 한 발짝 물러나 글을 쓰기 시작하니, 술술 풀리기 시작했다.


"그래, 안 써지는 날도 있는 거지."

"뭐 어때, 벌써부터 대작 쓰면 내가 대작가지, 백수하고 있겠냐?"

"맞아..., 형편없는 글이라도 쓰는 게 중요하지."

"오늘은 쉬지 뭐."


괜찮아. 아무것도 안 되면 뭐 어때?


한 글자 한 글자 빡빡 눌러쓴 글을 쓰레기통에 버리고, 욕심까지 함께 버렸다.

완벽하고 싶은 욕심.

대작을 써야겠다는 욕심.

꼭 하고야 말겠다는 욕심.

성공해야만 한다는 나의 글에 대한 오만함을 버렸다.

그 순간, 안 풀리던 글도 술술 풀리기 시작했다. 마치 마법처럼....


가끔, 사람들은 완벽하게 해내고 싶은 일을 회피한다.

실패하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다.

내게도 글 쓰기란 그런 존재였다.

'완벽하게 해내고 싶은, 잘하고 싶은 일.' 그런 일이었다.


사람 일이라는 게 그런 것만 같다.

한 발작 물러나야 보이는 것들.

욕심을 비워야만 채워지는 것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는 아이러니한 일들 투성이다.


새로운 시작 앞에서 머뭇거리는 이들을 응원하며.

성공 혹은 실패라는 이분법에서 벗어나,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시작하려는 당신의 용기에 박수를 보낸다.

그 용기에 자부심을 갖고 스스로를 칭찬하는 하루가 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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