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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athfinder Nov 18. 2019

영화 그린북: 경계를 넘어 나를 찾아가는 여행

인생영화로 자리매김하다

* 필자는 영화를 전문적으로 공부한 적 없으며, 이 글은 인상깊게 본 영화에 대한 주관적인 후기, 장면 해석을 담은 글임을 먼저 밝힙니다. 스포 있습니다!


어제 영화 그린북을 봤다. 친구에게 추천받아 본 영화였는데, 생각보다도 너무 좋아서 인생영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무엇보다 이 영화를 통해 생각해 볼 거리가 많은 것 같아서 리뷰를 써보려 한다.


<그린북>을 네이버에 검색하면 보통 이런 제목의 리뷰가 나온다. '편견을 깬', '두 남자의 우정'. 물론 맞는 이야기다. 이 영화에서 주인공 토니와 돈의 우정은 단연코 빛난다. 그러나 이 둘의 우정에만 초점을 맞춰 이해하는 것은, 이 영화를 반 만 이해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단순하게 해석하기엔 너무나 아까운 영화다.


나는 이 영화를 이 두 사람에게 나타난 '변화'를 중심으로 재구성하여 리뷰하려 한다.


                                        < 그린북, 허락되지 않은 경계를 넘어서다 >


1962년 미국, 아직 인종차별이 흔하던 시기이다. 돈 셜리는 3살때부터 피아노를 친 천재 피아니스트이지만, 흑인이기에 여러 차별을 당한다. 미국남부에서의 투어연주를 무사히 마치기 위해 토니 발레롱가를 운전기사 겸 보디가드로 고용하고, 이 둘은 8주 간의 여행을 떠난다.



흥미로운 것은, 이 둘의 성격이 전혀 상반된다는 것이다. 토니는 온갖 갈등상황들을 허풍과 주먹으로 해결하던 사람이다. 오죽하면 별명이 '떠버리 토니' 이겠는가. 반면 셜리 박사는 그야말로 교양과 우아함 그 자체이다. 그래서 토니가 가게에서 작은 돌 하나 슬쩍하는 것을 결코 눈감아주지 않는다. 




토니에게 나타난 변화 1. 흑인인 셜리박사와 친구가 되다


토니는 본래 굉장한 인종차별주의자였다. 이는 초반부, 자신의 집을 방문한 두 명의 흑인들이 사용한 물컵을 쓰레기통에 버리는 장면을 통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그의 이탈리아 출신 가족들 역시 마찬가지다. 흑인들에게 "검둥이" 라는 표현을 쓰며, 노골적으로 무시하고 한 공간에 있는 것에 불쾌함을 표한다.

'흑인과 일하는 것' 조차 꺼려하던 그의 태도가 조금이나마 바뀐 것은 셜리박사의 피아노 연주를 처음으로 듣고 나서다. 아마 그의 마음 속에는 '흑인이 박사라고?' '그래봤자 흑인인데 얼마나 잘 치겠어.' 하는 오만한 생각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진심으로 박사의 음악에 매혹된다. 그게 시작이었다. 

여행 중 토니는 셜리 박사가 받는 차별을 뼈저리게 실감한다. 그는 유명한 피아니스트임에도 불구하고, 흑인이라는 이유로 유색인종 전용 숙소를 사용해야 했다. 또한 바람을 쐬고 술 한잔 하기 위해서 간 바(Bar)에서 백인들에게 조롱과 폭행을 당한다. 그때마다 토니는 전화를 받고 그를 구하기 위해 달려간다.

나 없이는 어디도 가지 말랬잖소!


영화 중 계속해서 등장하는 토니의 대사이다. 토니는 출발 전 음반회사에서 절반의 돈을 받았고, 나머지 돈은 모든 곳에서의 연주가 완성되면 받게 된다. 따라서 잔금을 위해서라도 셜리 박사의 안전을 위해 도울 의무가 있었다. 처음엔 의무였을 것이다. 그러던 그가, 여행을 통해 셜리 박사를 이해하고 알게 되면서 정말 그를 친구로서 보호하게 된다. 어떻게 아냐고? 그의 눈을 보면 알 수 있다.



투어가 끝난 후, 토니의 가족들은 "그 검둥이는 어땠어?" 라며 묻는다. 그리고 토니는 "그렇게 부르지마" 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셜리 박사가 그의 집에 찾아왔을 때, 진심으로 반가워하며 손님으로 대접한다. 방금 전까지 '검둥이'라고 지칭하던 그의 가족들조차 예의를 갖춘다. 


셜리 박사에게 나타난 변화 1. 클래식 음악을 연주하다

이게 무슨 의미인데? 하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영화 후반부 '오렌지 버드'에서 낡은 피아노로 쇼팽 에뛰드 겨울바람을 연주하는 그의 모습은 시사하는 바가 너무나 크다.


"운 좋게 내 공연을 본 관객이 레닌그라드 음악학교에 입학하게 도와줬어요. 그 학교 첫 흑인 학생이었죠."

"거기서 지금 연주하는 곡들을 다 배운 거요?"

"사실은 클래식 음악 교육을 받았어요. 브람스, 리스트, 베토벤, 쇼팽. 그런 음악들을 연주하고 싶었소.”

하지만 음반회사가 대중적인 걸 원했지. 클래식 연주하는 흑인을 관객들이 받아들이지 않을 거라고. 뻔한 흑인 음악가로 만들고 싶어했죠. 위스키 잔 올려 놓고 담배 물고 피아노 치면서 클래식 거장 같은 대접 안 해준다고 불평하는 사람들.


영화 중반부 셜리 박사와 토니의 대화이다. 토니는 셜리 박사에게 어떻게 음악을 공부하게 되었는지 물었고, 박사는 음악학교에서 클래식을 배웠으나 현재는 음반 회사의 요구에 따라 현재의 곡들을 연주하고 있다고 대답했다.


셜리 박사는 아마 이렇게 말하고 싶었을 거다. "클래식 음악을 하고 싶었는데, 현재는 '흑인 음악'을 하고 있소.


그가 배웠던 클래식 음악은 당시 백인들만의 음악으로 인식되었고, 그래서 그는 사회가 그에게 '허락한 음악'을 해야 했다. 그러던 그가, 마지막 연주회를 거부하고 나와 오렌지 버드에서 피아노에 앉았다. 그가 피아노에 올려져있던 위스키를 바닥에 내려놓았을 때, 혹시나 했다. 그리고 이내 그가 쇼팽 겨울바람의 도입부를 연주하기 시작했을 때, 나는 정말 전율을 느꼈다.



셜리 박사는 그에게 허락되었던 경계를 넘어섰다.


셜리박사에게 나타난 변화 2. 낡은 피아노로 연주하다

사실 클래식 음악을 연주한 것 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그가 오렌지버드의 낡은 피아노로 연주했다는 것이다. 사실 그에게도 음악가로서의 자존심과 고집이 있었다. 바로 '스타인웨이'로만 연주하는 것이었다. 이는 계약 상에서 포함된 내용이었으며, 토니는 매번 공연장에 가서 스타인웨이가 있는지 확인해왔다.


셜리 박사는 자신이 하고 싶었던 음악을 연주함과 동시에, 본인의 자존심을 내려놓았다. 마지막으로 언제 조율했는지가 궁금할 만큼, 방치된 듯한 피아노에서 쇼팽의 음악을 연주했다. 그리고 나는, 피아노가 낡은 탓에 어딘가 깨끗하지 못한 겨울바람 연주를 통해 격식을 내려놓은 곳에서 비로소 '자기자신'이 되는 아이러니를 떠올렸다. 

셜리 박사가 자신의 '꿈'을 이룬 것은, 스타인웨이가 갖춰진 화려한 무대가 아닌, 동네의 흔한 술집 오렌지버드에서였다. 심지어 돈도 받지 않고 한 연주였다. 그러나 모두가 셜리 박사의 연주를 숨죽여 지켜보았고, 곡이 끝난 후 하나되어 환호했다. 셜리 박사는 진심으로 행복해보였다.


토니에게 나타난 변화 2. 편지에 감성을 담다

"시간 있을 때마다 편지 써."

"나 편지 못 써."

"왜 못 써."

"창피하고 내용도 별로일 거야."

8주의 여행을 떠나기 전, 토니와 아내 돌로레스의 대화이다. 그리고 결국 여행 중 토니는 틈틈이 편지를 썼다. 그러나 그의 편지는 'Dear' 의 스펠링부터 틀리는 둥, 문제가 많았다. 내용도 편지라기 보다는 끄적이는 일기에 가까웠다. 보다못한 셜리박사는 그에게 어떤 내용을 쓸지 아예 불러준다. 돌로레스의 그의 편지를 받고, 큰 감동을 받는다.

그리고 영화 후반부, 토니는 마침 돌로레스를 위해  로맨틱한 편지를 쓰는 법을 배우게 된다.


사실 이 장면은 백인들의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과 함께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백인들은 흑인들을 열등하다 믿으며, 그들의 '노예였던' 존재로 치부했을 것이다. 그러나 막상 어떤가. 토니는 셜리 박사에게 많은 것을 배운다. 문학 수준, 음악 수준 그 밖의 다른 교양들을 나누는 기준은 결코 인종이 아니다. 이 영화는 여러 장치들을 통해 계속해서 그것을 말해주고 있다.

인종보다 중요한 것은 개인, 한 사람 그 자체라고. 


셜리박사에게 나타난 변화 3. 존엄성을 해치는 이를  거부하다

셜리박사는 영화내내 교양있고 품위있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감옥에 갇힌 순간마저도 '품위'를 중시하고, 또 이 연주회를 끝까지 마무리 짓는 것을 굉장히 소중하게 여긴다.

그러던 그가 마지막 연주장소에서의 연주를 거부한다. 바로 '흑인은 출입금지'라는 식당의 규정 때문이었다. 한 시간 후에 자신의 연주를 들을 백인들은 멀쩡하게 식당에서 밥을 먹고 있는데, 주인공이나 다름 없는 연주자인 자신은 식당에 출입할 수조차 없는 상황이었다. 직원들은 "대기실로 가져다주겠다", "호텔 방침이라 어쩔 수 없다." , "근처에 있는 오렌지 버드에 가서 식사를 하고 와라" 는 말만 반복한다.

마지막 장소였다. 셜리 박사는 실내 화장실 사용을 거부당하는 상황 속에서, 호텔까지 다녀오는 수고를 하면서도 공연을 마다하지 않았다. 딱 한번만 더 참으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그에게도 분명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토니와 함께 마지막 공연장을 떠났다. 마치 식당에 들어와서는 안될 병균처럼 자신을 대하는 사람들, 자신의 존엄성을 해치는 사람들을, 연주자로서 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으로 거부한 것이다.

그의 결단에 진심으로 박수를 보내고 싶었다.


토니에게 나타난 변화 3. 셜리 박사의 외로움을 이해하다

토니는 흑인들은 모두 프라이드 치킨을 좋아하지 않냐는 등 이분법적이고 다소 편향된 발언을 자주 했었다. 그러던 그가 여행을 통해 '다양성'을 배웠다. 흑인들이 모두 같은 장르의 음악을, 같은 종류의 음식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거물 선생님, 당신은 성 꼭대기에 살잖아! 부자들 상대로 공연하느라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난 거리에 살고 당신은 왕좌에 앉아 있지. 당연히 내 세상이 당신보다 더 흑인스럽지."

토니는 마지막 한 마디는 셜리 박사를 폭발하게 한다. 셜리 박사는 화를 내며 차를 세우게 하고, 마침내 소리친다.


충분히 백인답지도 않고 충분히 흑인답지도 않고 충분히 남자답지도 않으면...
난 대체 뭐죠?


부유한 백인은 비용을 지불하고 셜리 박사가 피아노를 치게 한다. 그리고 겉으로는 연주자로서 존중해주는 척 한다. 그러나 박사가 무대에서 내려왔을 때, 그들에게 자신 역시 그저 한 명의 '검둥이'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는 잘 안다. 자신은 '문화인 기분'을 내려는 백인들에게 소모되는 존재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흑인들 역시 셜리박사에게서 이질감을 느껴 그를 거부한다. 결국 셜리 박사는 외로움에 함몰된다.

토니의 눈에 보기엔 셜리 박사는 인종차별을 좀 받긴 해도, 나름 화려해보였을 것이다. 항상 좋은 옷을 입고 다니고, 운전기사를 고용해서 투어를 다니고, 좋은 집에 사니까. 그렇기에 그의 내적인 외로움이 어디서 기인하는지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박사의 속얘기를 들은 후, 토니는 마침내 그를 이해하게 된다. 어딘가에도 속하지 못한 것 같은, 셜리박사의 외로움을.

셜리박사에게 나타난 변화 4. 프라이드치킨을 먹고, 토니를 위해 운전하다

토니는 켄터키에서 프라이드치킨을 사온다. 운전하며 치킨을 뜯는다. 그리고 셜리 박사에게 먹어보라며 권유한다. 셜리 박사는 계속해서 "먹어본 적이 없다", "담요에 기름이 묻는 것을 원치 않는다."며 거절한다. 그러나 끈질긴 토니. 결국 셜리 박사는 치킨을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뜯으며 "비위생적인 것 같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의 표정은 어쩐지 밝다. 또한 토니가 주는 또다른 치킨을 거절하지 않는다.

둘이 친밀해졌다고는 하나, 어찌됐든 셜리 박사는 토니의 고용인이다. 그런데 크리스마스 이브, 집에 가는 길 토니가 오랜 운전으로 인한 피로에 앞이 잘 안보인다며 쉬었다 가자고 한다. 그리고 이내 뒷좌석에서 자고 있는 토니와 운전하는 셜리 박사가 등장한다. 박사는 토니를 집까지 데려다준다.


이 장면은 내게 이 둘이 정말 친구가 되었구나, 를 알게 해주었다 . 이 장면들을 통해 셜리 박사가 격식을 많이 내려놓고 편하게 행동하게 되었다는 것, 그리고 둘의 관계가 굉장히 깊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럼에도 세상이 살만한 이유는

크리스마스 이브가 가까워져 집으로 향하는 길. 눈보라가 몰아치고, 경찰이 차를 멈춰세운다. 전에도 한번 흑인이 통금시간을 어겼다는 이유로 경찰에게 잡힌 적이 있었기 때문에, 토니는 불안해했다.


"문제라도 있나요, 경관님?"

"있죠. 차가 왼쪽으로 기울었어요. 뒷타이어가 펑크 난 것 같네요."

이내 경관은 토니와 셜리 박사에게 "조심히 가세요, 신사분들. 메리크리스마스." 라며 인사했다. 너무나 많은 차별을 받았던 셜리 박사와, 그것을 보았던 토니. 그들에게 새겨진 상처와 불안함은 이 경관의 친절함으로 인해 조금이나마 녹아내리지 않았을까. 


마치며

피아노 연주를 굉장히 좋아하는데다, 생각해 볼 거리가 너무나 많아서 정말 인상깊게 본 영화였다. 무엇보다 나에게는 어떠한 고정관념 혹은 선입견이 없었는지 되돌아보게 볼 수 있었다. 

나는 흑인은 꼭 재즈음악, 힙합을 좋아한다거나 꼭 육상 등의 스포츠를 잘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는가. 나에게는 무해해보이는 선입견들이라도, 그것이 그들에게 향할 때 열몇 배로 유해할 수 있음을 <그린북>을 통해 느꼈다. 또한 이 영화를 통해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해볼 수 있었다. 영화를 통해 셜리 박사와 고민의 결을 같이 했던 것 같다.

흑인인데도 여행을 해야 한다면 말야.


이 대사는 내게 “여성인데도 밤 늦게 다녀야 한다면 말야” 라는 말과 오버랩되었다. 우리 사회는 아직까지 피해자에게 가스라이팅을 하며 책임을 전가한다. <그린북>은 흑인은 여행을 할 필요가 없기에 여행을 떠난다면 ‘유별난 것’인 사회였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현재는 여성들에게 “위험하기 싫으면 일찍 집에 들어오면 되잖아.” 같은 말로 그들을 제약하고 가두고 있는 건 아닌지 생각해보게 되었다.



리뷰가 너무 길어질까 인상깊었음에도 다루지 못한 장면들도 있다. 그리고 이제 한 번 본 영화이기에 분명히 놓친 의미들도 있을 것이다. 그런 것들을 발견하셨거나, 혹은 이 영화를 보신 분이 있다면 덧글을 통해 의견을 주고받고 싶다.

명백히 내 인생영화라고 말할 수 있는 <그린북>, 올해 1월 9일 개봉작인데 관객 수가 생각보다 적어 너무나 아쉽다. 더 많은 이들이 영화를 보고 정체성과, 자기자신에 대해서 생각해볼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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