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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athfinder Nov 27. 2019

대치동의 '부품'이 되다

대치동에서 과외를 한다는 건

영어선생 일은 갑작스럽게 시작했고, 그 갑절로 갑작스럽게 끝났다.



4월 중순 한 학부모님께 연락을 받았다. 중학생인 아들에게 영어 과외가 필요할 것 같은데 내게 어떤 특별한 노하우가 있어보였단다. 그로부터 일주일 후, 이름부터 '스카이캐슬'을 연상시키는 대치동 롯데캐슬 아파트로 향했다. 시범강의를 위해서였다.


대치동이라는 타이틀이 주는 긴장감 때문이었을까. 그동안의 시범강의 때보다도 더 많이 준비했고, 강의계획서도 철저하게 만들었다. 무엇보다 나의 또 다른 자아를 출동시켰다. 내게는 차분하고 상처받지 않는 성격에, 비즈니스에 능통한 또다른 자아기 있다. 가르치는 것은 비즈니스가 아니지만, 학부모님과 대면하는 자리에서는 표정부터 목소리까지 '비즈니스맨'이 되어야 한다는 걸 나는 경험을 통해 깨달았다.



그 날 가장 충격이었던 건, 학부모님께서 내가 사용할 교재의 문제를 직접 풀어보셨다는 것이다. 매일 출근 후 학생들을 가르치고, 녹초가 되어 돌아와 집안일을 하느라 바쁜 엄마의 모습과 대조되었다. 대치동 학부모는 이런 건가. 돈도 시간도 모두 되니까, 아이의 교재를 미리 '예습'할 여유가 되는 걸까. 정말 다른 세계에 와 있는 것 같았다.



사실 취업 준비로 바쁜 와중에 이 과외를 하게 된 이유는 결국 돈 때문이었다. 주1회 2시간, 월 4회 수업에 30만원을 받기로 했는데 이는 수업시수 대비 높은 금액이었다. 집에서 대치동까지 1시간 30분 가량 걸렸지만, 돈이 절실히 필요했던 내게 그쯤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예전에 다른 곳에서 했던 과외는 과외비가 예정보다 늦게 입금되는 일이 잦아서 힘들었는데, 이번엔 그런 일이 없겠지? 하고 묻게 믿었다. 여긴 대치동이니까.





안타깝게도 내 기대는 정확하게 빗나갔다. 3주차 수업이 끝난 후, 학생에게 다음 주까지 해올 숙제를 문자로 보내주었다. 그러자 학생이 보낸 답장.


이번 주 과외해요? 이번 주도 쉬어야 할 것 같은데.



7월 초에 있을 기말고사 때문이란다. 당장 화요일이 수업 예정이었는데, 바로 전 날인 월요일에 이 사실을 통보한 것에 대해 화가 나는 것은 둘째였다. 내겐 더 중요한 문제가 있었다. 돈. 7월 초까지 3주동안 수입이 없었다. 그것도 전혀.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7월 둘째주에 4회차 수업을 하니까, 셋째주가 되어야 과외비를 받을 수 있다. 즉 나는 5주동안 수입이 없을 예정이다.



하지만 학생이 중간고사 준비로 인해 수업을 쉬겠다는데, 내게 별다른 수가 있을리가 없다. 늘상 그렇듯 "알겠어"로 일관하고 머리를 굴렸다. 5주동안 어떻게 해야 생활비를 해결할 수 있을까. 당장 내일 모레 납부해야 할 교통비와 통신비는 어쩌고.




수업 중 나를 가장 힘들게 하는 건 그 학생의 태도였다. 그는 수업시간 내내 졸았다. 처음에는 좋게 좋게 깨워보고, 학생의 부탁대로 10분 정도 쪽잠도 재워보고, 잠 깨라고 화장실도 보내줬었다. 그렇지만 다 한 순간일 뿐, 계속해서 꾸벅꾸벅 조는 그 모습에 가슴이 답답해졌다. 어떻게 일대일 과외를 하면서 졸 수가 있는 거지? 진심으로 궁금했다.



결국 안되겠다 싶었다. 학생이 졸 때 등을 가볍게 때리기도 하고, 아예 일어나서 수업을 들으라고 지시하기도 했다. 집중해서 풀어도 모자를 영어영역에서 존다면 지문내용이 눈에 들어올 리가 없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었다. 정말이지 난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해서 학생을 깨웠다.



학생이 겨우 깨어났을 땐, 내가 진행했던 수업의 흐름이 끊긴지 오래였다. 무엇보다 기가 빨렸다. 생각해보라. 1시간 반 걸려 도착해 학생 방문을 열었을 때부터 이미 졸고 있는 모습을 발견한다면, 무슨 생각이 들겠는가. 학생이 좋은 리액션과 수업태도로 수업진행을 돕기는 커녕, 아무리 열심히 설명해도 실시간으로 졸고 있는데 내가 뭘 더 할 수 있을까. 수업동안 "일어나"라는 말만 30번은 족히 한 것 같았다.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나는 줄곧 그 학생이 부러웠다. 교수 아버지와 교육에 관심많은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강남구 대치동에서 살고 있는 그 환경이 부러웠다. 고등학교 시절, 학원비가 없어 인강을 들으며 독학했던 나와 달리 유명한 학원을 몇개씩 다니고 있으면서도 그 소중함을 모르는 그 학생의 철없음이 부러웠다. 정보력을 동원해 직접 영어과외선생님을 알아봐줄 수 있는 시간적으로 여유로운 어머니를 둔 것도 부러웠다. 경제적으로 여유로우니 어머니가 전업주부로 남을 수 있다는 걸 알기 때문에.



그는 모른다. 본인이 얼마나 많은 복을 가지고 태어났는지. 나라는 사람이 영어과외선생님으로 옆에 앉아서 온전히 본인에게 집중해주고 있는 게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그렇기에 졸 수 있는 것이다. 를 해서 졸리다는 것은 반은 핑계다.






결국 6월 중순, 학생의 어머니로부터 온 한 통의 문자를 받았다. 방학 때 영어.수학 공부량이 많아 영어 숙제 할 시간이 없다고 잠시 과외를 쉰단다. 단언컨데 나는 숙제를 2페이지 이상 내 준 적이 없다. 그런데 고작 4번 수업해놓고 수업을 쉰다니. 중간고사 기간에 3주이상 기다려준 것도 있기에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오늘 날짜는 11월 27일. 학생의 개학일이 한참 지난 지금도 아직 연락이 없다. 4주동안 정말 최선을 다해 수업했는데, 그들에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나 보다.



한번 쓰고 내다버리는 '일회용 부품'이 된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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