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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다희 Oct 21. 2023

미친 것처럼 계속 쓸 수밖에

저 왜 살아야 하죠? 저는 과연 필요한 존재일까요?라는 질문은 누구에게 물어볼 수 없었다. 이런 질문을 던지면, 다들 너 어디 아픈 것 아니냐, 좀 쉬어... 피곤해서 그래. 야! 술이나 마시고 기분 풀자라는 식의 답변만 돌아올 테니까. 


나 역시도 '그래, 살다 보면 언젠가 스스로 깨닫게 될 거야. 열심히 살다 보면 뭔가 얻어지는 게 있지 않겠어?' 하며 어려운 질문들을 피하기 일쑤였다. 그런데 말이다. 그 외면할 수 있는 허용범위의 지점에 거진 다다른 것이다. 무엇을 위해 일하는가와 나는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나는 누구인가 근원적인 질문들이 머릿속에 채워지는 순간 계속해서 떠올릴 수밖에 없게 된다. 틀린 답이라도 찾아야 할 것 같은 그렇지 않으면 더 큰 불안감에 휘둘릴 것 만 같은 위기감이 몰려왔다. 


책은 좋아하지만 읽지 않았다. 읽는다고 한들 빠르게 변하는 세상에 대해 먼저 깨달음을 얻은 지식인, 유명인들의 말을 흘겨 읽고 다 아는 얘기처럼 흉내 냈다. 깨진 독에 물 붓기처럼 지적 허영심이 가득한 나는 바닥이 드러날 까봐 조마조마했다. 남들은 눈치채지 못할지라도 내가 제일 잘 아는 내 모습을 느끼며 조금씩 무너져갔던 것 같다. 내가 과연 필요한 존재인가를 끝없이 묻기를 반복할 때, 나에게 손길을 내어 준 게 읽고 쓰기였다.


내 안에 울분이라도 있는 것인지 읽을수록 쓰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뭐라도 쓰면 마음이 편해졌다. 드러내기 부끄럽고, 어둡고, 날것들로 부유하는 감정을 글로 풀어내다 보면, 다시 그 감정을 다시 소중하게 어루만져 주고 싶어졌다. 어디서 비롯된 감정인지, 어떤 이유로 그때의 마음이 왜 그랬는지를 글로 쓰면 괴로웠던 일이 덜 괴롭게 느껴졌다. 말 대신 글로 나와 싸우는 과정이라고 할까? 다행스럽게도 마무리는 항상 화해하는 것으로 끝이 났다. 



읽고 쓰기 위한 영감 


신문을 읽다가 출판사 글항아리 이은혜 편집장님이 쓴 칼럼에 나의 눈길을 멈췄다. 독서와 개인 취향이라는 제목에 이끌려 읽은 짧은 글에서 나의 편심을 사로잡은 문장을 발견했다. 



“사실 독서란 세상의 온갖 움직임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안으로 집중하려는 의지의 행위다. 그것은 원거리에서 역사를 다시 들여다보게 하고, 각자의 생활 속 소음들을 숨죽이게 만들며, 우리가 한시바삐 붙쫓고 있는 가치들이 과연 그럴 만한 것인가 점검하게 하는 작업이다.”     



거리를 두고 안으로 집중하려는 의지의 행위, 

원거리에서 역사를 다시 들여다보게끔 하는 행위,

각자의 생활 속 소음을 숨죽이게 하는 작업,

한시바삐 붙쫓고 있는 가치들을 그럴 만한 것인가 점검하게 하는 작업.

독서 행위를 정의 내린 그녀의 문장을 읽고 한참 동안 그 문장 앞에 멈춰 섰다. 내가 책을 읽을 때 경험하는 나의 의식 세계를 원거리에서 바라보는 것 같았다. 이런 글, 문장을 보면 욕심이 생기고 훔치고 싶다. 



서점 글쓰기 코너에 책 한 권의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미친년처럼 글쓰기’ 완벽한 은유법이 성립한 제목이다. 너무나 강렬한 책 제목에 취해 마음속으로 '그래. 나도 오늘 밤 나는 미친년처럼 글을 써보자.'라고 결심했다가 머뭇했다.  


나는 어떤 종류의 미친년이 되어야 하는가에 대해 또 다른 고민을 하는 것이다.  작가도 아닌데 고민에 또 고민을 한다. 나는 무엇을 쓰고 싶은가 대해 끊임없이 떠올랐다가 멀어지는 나의 의식세계를 붙잡았다가 놓아주기를 반복한다. 대학원시절 작업에 대해 고뇌했던 때가 떠올랐다. 보물처럼 여기던 작업 노트에 그 시절 나를 붙잡았던 단어, 개념의 글귀를 몇 개 써놓고 계속 바라보기만 했다. 이 때는 공간에 내가 만들고 싶은 것들을 어떻게 구현해 내고 사물로 표현하느냐에 매달렸다.  


지금 내가 하고 싶은 글쓰기도 이와 비슷했다. 결과물의 방식에 차이가 일 뿐 그때나 지금의 작업 감정은 달라진 게 없었다. 개념 미술에 관심이 많았고, 온 가와라처럼 텍스트를 내 작업에 접목하고 싶었는데 사실 막막했다. 대학원을 다니면서도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몰랐다. 어느 수준 이상으로 작업 고민을 하면 계속 같은 자리에 맴도는 답답함을 못 견디어, 작업하는 게 좋으면서도 도망치고 싶었다. 이 불편한 마음을 들키고 싶지 않아서 인테리어 디자인을 공부했는지도 모른다. 


이 과거를 되풀이하고 싶지 않다. 그러니 무언가에 가로막혀 답답해서 그만할까를 생각할 게 아니다. 실패를 해도 못 쓰더라고 계속 써야 한다. 일단 뱉어내어 보고, 내 바닥이 어디까지인지를 한번 보기라도 해 보자. 그러려면 미친 것처럼 계속 쓸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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