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8시간 재택근무도 어제는 그렇게 눈이 시리더니만, 오늘은 머리가 빙빙 돌았다. 점심시간 틈을 타서 산책도 하고 간소하게나마 외부 활동도 했는데, 별 소용이 없었다. 옆에 동료라도 있었다면, 커피 타임도 보내며 일하는 중간 휴식시간도 가졌을 텐데, 이럴 때만큼은 대면 근무가 아쉽다. 환경 요인도 있지만, 근래 받은 스트레스 탓도 있을 것이다. 협상한 금액이지만, 나는 여전히 내가 받을 월급보다 그 이상 퀄리티와 많은 양의 업무를 한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앞으로 조율하거나, 인력이 추가되면 상황은 달리 되겠지만, 그건 그때가 돼봐야 아는 일이다.
돈보다는 일이 주는 의미와 가치를 놓고, 이 일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지난 몇 개월 동안 고민했고, 해볼 만한 일이라 판단했기에 이 일을 하기로 선택했었다. 그런데 정규직 전환 관련 보상에 관한 논의를 대표와 하던 중 그녀의 속마음을 알게 되었다. 회사의 입장과 기준만 명확히 알려 주면 될 것을 그녀의 입에서 쓸데없이 경단녀 비유를 하며 내 월급을 아까워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게 했다. 이분도 참 사람 다를 줄 모르는 신입 대표님이다.
이럴 때 무얼 해야 하나. 따끈한 구기차로 마음을 좀 진정시켜보려 하지만 별 소용없다. 오늘은 다시 일해야 해서 온종일 컴퓨터와 씨름을 했다. 오전 9시 3분 대표에게 걸려온 전화로 한 시간 통화 후 기분이 급하강으로 가라앉았다. 이대로는 일에 집중할 수 없어서, 커피를 핑계 삼아 잠시 집 앞 카페만 다녀왔을 뿐 계속 집에만 있었다. 오후 1시쯤 다시 대표에게 전화가 왔다. 지금 하는 업무 중에 가장 힘든 일이 무엇이냐는 묻는 말에, 가장 시간 걸리는 일이 무엇인지 조목조목 말해줬고, 그녀는 빨리할 수 있는 일은 빨리 쳐내야 한다고 잔소리를 해댔다.
대표와 내가 이쪽 경력이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우리가 잘해도 아마추어처럼 보일까 염려된다는 대표의 말은 나를 더 자극했고 곱씹을수록 황당했다. 이 점이 우려된다면 관련 경력자를 데려다가 일을 시키면 해결되는 자리다. 내가 왜 이런 얘기를 듣고 있어야 하는 건가. 안타깝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나와 맞지 않는 곳이라는 게 점점 확고해진다. 나를 지키며 일하는 방법에 대한 경험을 원했지, 예전처럼 압박받고 비교당하면서 일을 하려던 게 아니었다.
대표님, 저 직장 생활 13년 했어요. 프로젝트 매니징, 피엠 역할도 여러 번 했고요. 일머리 없이 일하는 사람처럼 취급하지 마세요. 업무가 어려운 것은 아니에요. 그런데, 무슨 굴착기로 업무 투척하시고, 당장 사흘 만에 업무 적응하고 베테랑 마냥 하기를 원하는 당신의 압박이 부담스러워요. 안타깝지만, 저는 대표가 아니라 직원입니다. 12시간 16시간씩 일을 하는 걸 자랑처럼 말하고 싶은 사람이 아닙니다. 최저비용으로 최고의 효율을 제게 뽑고 싶다는 그 마음, 대표의 마음을 모를 일을 없지만, 죄송하지만 당신이 원하는 사람으로 일을 할 수 없을 것 같네요. 죄송합니다.
근무 마지막 날 오후 6시. 회사 메일로 함께 일했던 동료들에게 보내는 마지막 인사 메일 예약 발송을 누르고, 업무용 메신저로 쓰던 슬랙 계정도 비활성화했다. 홀가분하면서도 찜찜한 이 기분은 퇴사 마지막 날에는 피할 수 없는 감정인가 보다.
친구에게 퇴사 소식을 전했다. 친구의 대답이 내 뒤통수를 친다. ‘한 번 하더니 자주 하네. 하하하…….’ 맞는 얘기다. 친구의 말에 나는 오랜만에 실컷 웃었다. 웃으니깐 무거웠던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그런 김에 더 가벼워지자. 대청소도 하고, 미용실에 가서 머리도 잘라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