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진영 <재난에 맞서는 과학>를 읽고
우리는 흔히 재난이라고 하면 자연재해를 떠올린다. 인간의 힘으로 어쩔 도리 없이 순식간에 벌어지는 일은 과히 폭발적이고 파괴적이다. 이런 일을 겪을 때마다 쉽게 종말을 떠올리는 이유다. 깊숙이 들여다보면 자연재해의 원인에 인간이 포함될지도 모른다. 환경오염과 기온 상승의 변화에 맞서 '창백한 푸른 점' 지구는 합당한 반응을 보여주고 있는 것일 테니까.
재난에는 이뿐 아니라 인간에 의한 참사, 사회적 재난 또한 존재한다는 것을 실감한다. 세월호 참사와 이태원 참사는 우리에게 뼈아픈 고통으로 기억되고 있지만, 참사의 원인과 책임 소지는 여전히 불확실성에 남아있고, 피해자의 보상과 처우도 적절히 이뤄지고 있는지 불분명하다. 이 책의 저자는 이런 사회적 재난을 연구하는 사람이다. 과학기술과 환경, 위험과 재난을 연구하는 일을 업으로 하는 한 연구자가 가습기 살균제 참사를 중점적으로 다룬다.
오래 전의 기억이다. 연약한 어린아이와 몸이 아픈 환자에게 도움이 되고자 사용했던 가습기는 오히려 또 다른 독성 물질이 됐다. 건강했던 아이에게 원인 불명의 병이 생기고, 없던 질병까지 생겨 결국 목숨까지 잃어 눈물을 흘리던 피해 가족들을 TV에서 봤다. 몸에 좋다는 광고를 철저히 믿고 산 소비자들만 온전히 피해자로 바뀐 상황에서, 이득 챙기기가 우선인 기업은 유해성 논란에 발을 빼며 책임을 회피했고, 피해 국민을 먼저 보살펴야 하는 정부는 원인을 찾는데 시간을 쏟으며 피해자들을 외면했다. 이 소식을 뉴스로만 접했던 나는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세세히 알 수 없었고, 기업이나 정부의 말에 신뢰하지 않았던 것 같다. 운이 나쁜 소비자들만 피해를 받고, 운이 좋은 (제품을 쓰지 않은) 소비자들만 피해를 면할 수 있었구나를 느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 책은 가습기살균제 참사를 1990년대에 처음 제품 개발을 준비하던 때부터 2023년 현재까지 이어지는 광범위하고 장기적인 재난으로 이해한다. 가습기살균제 사용자가 겪은 비가역적인 피해는 전문가의 조사를 통해 윤곽이 선명해졌다. 하지만 가습기살균제 피해가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정당한 보상을 받는 문제는 과학적 인과관계나 가해자 대 피해자라는 힘의 논리 어느 한쪽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가습기살균제 참사는 과학과 정치가 부딪치는 장이다. (p.17)
가습기 살균제 참사 피해 조사와 법정 판결을 2024년 지금도 진행 중인 현실이다. 그럼에도 이 책을 의미 있게 읽었던 이유는 참사의 현장을 원인과 결과, 가해자와 피해자, 두 잣대로 구분 지어 보지 않는다는 점이다. 연구자로서 저자는 여러 분야의 (질본과 역학, 약학, 독성학, 보건학, 임상의학) 전문가, 피해의 목소리를 끊임없이 알리려는 활동가, 숨죽여 있을 피해자, 기업과 정부 사이에서 참사 이후의 모습들을 묵묵히 지켜보며, 누구나 재난 피해자가 될 수 있는 우리 모두에게 재난의 맞설 방법을 알려준다.
과학적 불확실성을 근거로 책임 소지를 차일피일 미루고, 그에 따른 피해 복귀에 대한 시간을 흘려보낼 때, "피해자에게 떳떳한 과학자"(p.85)로 약자의 곁에 서는 학자를 소개한다. 과학자의 전문성이란 진리를 탐구하고 밝히는 데만 활용되는 게 아니라 전문가와 활동가의 경계를 넘나들며 연대의 시작점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실험실에 처박혀서 자신의 연구에만 몰두하고, 과학적으로 입증된 결괏값으로 만 오로지 답을 내리는, 소위 세상과 담을 쌓으며 진리를 연구하는 과학자들만 떠올리던 나의 편견을 깨는 지점이었다. 물론 순수 자연과학을 연구하는 학자도 있어야 할 테지만, 재난과 관계하는 과학에서는 과학적 입증에 우선 논리를 펼칠 게 아니라 재난 피해와 피해자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관점을 강조하는데 인상 깊었다.
과학기술학자 전치형은 재난의 핵심은 사건이 '뜻밖에' 발생한다는 예외성이 아니라 그것이 '누구에게나' 발생한다는 보편성에 있다고 짚는다. (...) 피해 사실을 확인하고 드러내는 것보다 사회적 관계를 만드는 길이 훨씬 어렵고 고통스럽다. 그러나 희망을 놓지 않을 때에만 반전의 기회를 노릴 수 있는 것도 사실이다. 가습기살균제 참사를 사회적으로 재고한 5년가의 과정은 괄목할 만한 승리를 얻어서가 아니라 우리 사회가 느리고 단단하게 성숙할 수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 시간이기에 더욱 소중하다(p.147)
누구나 겪고 싶지 않지만 누구에게 일어날 수 있는 재난의 보편성에 정신이 아득해진다. 내가 아닌 누군가의 피해가 안타까워서 가 아니라 당장 나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는 사실에 계속해서 관심을 가져야 할 필요가 있다. 관련 기사나 소식을 애써 찾아보지 않더라도 작은 틈바구니로 들려오는 그들의 끊임없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무엇이라도 할 수 있는 나'로서 힘을 보태야겠다.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 새로운 약속을 쓸 수 없다. 당장 눈에 띄는 변화가 없더라도 논의의 장을 열고 기회를 만드는 연대체를 보면, 무엇이라도 하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정치라는 것을 깨닫는다. 정치적 기회란 선거나 국회라는 구조나 시스템에서 시작될 수도 있지만 '나'에서 시작해 확장해 가며 열릴 수도 있다. (p.174)
이런 분들께 이 책을 권합니다
재난과 관계하는 과학적 연구가 궁금한 분
사회적 재난에 대처하는 힘을 기르고 싶은 분
느리지만 단단하게 나아지는 미래를 그리는 분
*사진: Unsplash의 Craig Whitehea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