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초, 2월 혼자서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를 완독해 보겠다는 결심을 하고 1권을 펼쳤다가 1권 1부까지 읽고 다시 덮고 말았다. 완독 하고 싶다는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혼자서 그 길을 끝까지 가려는 게 너무 외로워서. 한 권당 500페이지가 넘는 책 세 권을 읽어야 하는 불량에서 압도를 느낀 것은 물론이거니와 소설에도 불구하고 대화문 보다 훨씬 빼곡한 지문을 읽는다는 게 버거운 일이 아니었다. 인물의 생각을 한 글자도 빠짐없이 옮겨놓은 것 같은 자세하고 세밀한 설명에 복잡하고 장황한 도스토옙스키의 문장들도 한몫했다. 혼자서는 읽기 어렵다는 핑계로 차일피일 미루고 있을 때 고맙게도 다시 기회가 찾아왔다. 이 책을 함께 읽은 벽돌 책 모임원들을 만났으니, 올해를 그냥 넘기지 말라는 신의 뜻이 있었나 보다.
이 소설은 친부 살해 사건으로 인해 범죄자가 누구인지 가려내는 추리 소설이다. 한번 책을 폈다 하면 범인이 누구인지가 궁금해서 결국 마지막 장까지 단번에 읽지 않으면 안 되는, 흥미진진한 소설은 아니다. 그러기에는 작가의 인물에 대한 묘사와 내면 심리의 탐구가 깊고 심오하다. 그래서 살인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 종교와 사상 이야기와 인물들의 성격과 심리를 이해하는데 꽤나 어려웠다. 게다가 등장인물도 많은데 하나같이 예민한 신경을 가진 사람처럼 복잡하고, 심경 변화의 이리저리 날뛰었다.
도스토옙스키 열강 팬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그가 집요하게 파고든 인간의 시끌벅적한 내면 이야기, 극강의 흥분 상태에서 발현되는 인간의 광기, 미치기 일보 직전처럼 보이는 미묘한 내면의 신경전을 읽으면서 희한하게도 많은 위로를 얻었다. 물론 읽는 중에는 숨이 턱턱 막혀 잠깐씩 쉬어가고, 남은 분량을 확인하느라 페이지를 왔다 갔다 하며 넘기기를 일쑤였지만.
그렇게 힘들게 읽으면서 광란 속에 널뛰는 인물의 밑바닥까지 엿보고 나면, 오히려 마음이 후련해졌달까? '너와 나의 고통이 동일하지는 않지만, 각자 다 힘들고 괴로운 법이야. 이게 삶이고, 삶은 고통이지.' 하며 소설이 내게 위안을 툭툭 건네는 것 같았다. 미챠와 이반의 괴로운 심경을 읽으며 내 고통에서 잠시 멀어질 수 있었다.
사랑과 욕정에서 시작된 질투와 복수심, 인간의 파멸적 모습, 후폭풍처럼 밀려오는 죄책감과 양심
인간에게 가장 괴롭고 무거운 것들만 다루겠다는 게 도스토옙스키가 소설을 읽는 독자에게 전하고 싶은 내용이었으리라.
하지만 소설이 이곳에서만 끝나지 않는다. 소설 마지막 장을 끝으로 (작가와 어울리지 않을 법한) 에필로그가 이어진다. 인간이 파멸하지 않으려면, 오로지 사랑만이 인간을 구원할 수 있다는 작은 종결부를 덧붙이고 소설이 끝이 난다. 사랑하는 자는 죽어서도 많은 열매를 맺게 된다는 새로울 것 없는 익숙한, 교훈적인 결말이지만, 이것이 유일한 진리임을 다시금 깨닫게 해 준다.
주제와 분량 면에서 누구에게나 쉽게 권할 수 있는 책은 아니다. 그렇지만 인간 내면에서 진흙땅을 밟다가 보석을 줍는 경험을 해보고 싶은 사람이라면 이 책을 꼭 읽어보라고 추천한다. 완독 성공률을 높이려면 혼자 읽기보다 여러 사람과 함께 읽기를 권장한다. 벽돌 책은 혼자 읽으면 너무 외롭다.
이런 분들 이 책 읽으셔라!
-인간의 정체성과 자기 인식은 어디서 비롯되는지 궁금하신 분들
-도스토옙스키, 도스토옙스키 하는데... 도대체 뭘 어떻게 썼길래 러시아 대문호로 칭송받는지 궁금하신 분들
-벽돌 책 독파하고 뭉근한 성취감 느껴보고 싶은 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