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임다희 Sep 15. 2023

흐린 날에는

필사하는 기쁨


손이 아파서 손 필사를 자주 하지는 않는데 가끔 의식적으로 하고 싶어 진다. 마음에 드는 문장을 구절을 책에서 고르고 조사하나 틀리지 않게 완벽하게 베껴 쓰는 작업. '필사하기'를 처음 접했을 때 나는 속으로 이런 생각을 했다. '바쁜 세상 속에서 저 느려터진 일을 왜 하는 거야? 쓸데없는 시간 낭비다. 따라 쓰는 시간에 차라리 한 글자라도 더 읽는 게 낫지.' 이제 와서 되돌아보면, 이때의 내가 안쓰럽게만 느껴진다. 앞만 보고 달리느라 잠시 멈춤의 시간을 그저 불필요하고 아까운 시간을 헛되게 보내는 줄로만 여겼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는 안다. 필사하기란 단순히 멈춤의 시간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눈으로 먼저 읽고, 마음으로 다시 읽고, 손으로 쓰며 또 읽는 과정은 마치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듯이 언어가 내 안을 구석구석 누볐다가 다시 제 갈 길을 떠나는 여정 같다.


마음이 평온한 상태로 컴퓨터 앞에 앉았다. 오늘은 왠지 나의 뇌가 덜 생각하는 날이 되었으면 좋겠다 싶은 날. 주섬주섬 책장에 꽂혀 있는 책 한 권을 뽑아 마음에 드는 문장을 찾았다. 


타이핑 필사도 하고 손 필사도 해야지. 좋아하는 문장을 읽고 또 읽으며 내 마음을 달래줘야지.




내가 두려워하는 내 삶의 어두운 물결도 일정한 규칙을 가지고 나를 찾아온다. 날짜나 숫자는 중요하지 않다. 내가 매일 빠짐없이 일기를 쓰는 것도 아니다. 인생의 주기적인 순환 관련 있는 숫자가 23인지 아니면 27인지 혹은 전혀 다른 숫자인지 궁금하지도 않고 알고 싶지도 않다. 다만 내가 아는 것은 내 머릿속에 가끔 아무런 이유 없이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진다는 것이다. 그것은 구름이 그늘을 만들어 세상을 가리는 것처럼 나의 세상을 가려 버린다. 기쁨은 가식으로 느껴지고, 음악은 맥없이 풀어진 것처럼 들린다. 무거운 마음을 짓누르고 사느니 차라리 죽고 싶은 생각이 들 때도 많다. (...)

나는 오늘 그런 하루를 경험한 후 시간을 보내고 있다. 이제는 편안한 휴식이 찾아올 것이다. 나는 세상이 무척 아름답다는 것, 다른 어떤 사람의 눈에 비치는 것보다 내게 훨씬 더 아름답게 보이고, 색깔이 더욱 달콤하게 느껴지고, 공기가 더욱 은혜롭게 흐르고, 햇빛이 더욱 부드럽게 비친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나는 내 삶이 도저히 감내할 수 없을 정도로 어렵게 느껴졌던 그 나날들로 지금 이 시간을 누릴 수 있는 값을 치렀다는 것도 안다. 

마음이 무거울 때 쓸 수 있는 좋은 방법이 있다. 노래를 부르고, 경건하게 행동하고, 술을 마시고, 음악을 연주하고, 시를 짓고, 산책을 나가는 거다. 그런 것들을 이용해 나는 은둔자가 경전을 읽으며 시간을 보내는 것처럼 살아가고 있다. 

헤르만 헤세 <삶을 견디는 기쁨> '흐린 하늘 (p.135-137)




매거진의 이전글 이야기하고 싶은 영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