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04. 그게 너였어?

4th day

by Dahi

From Pamplona

To Puente la reina


팜플로나에서의 아침도 여느 아침과 다르지는 않았어.

다만 숙소가 컸던 덕에 모두가 서로의 불빛에 의지하며 분주히 움직였지.

일어나 부랴부랴 준비를 한 뒤, 나가려고 침대 주위를 잠깐 서성였어.

그때, 수정언니 가방 위에서 조용히 바닥을 비추고 있는 빛이 보였는데

그 빛이 참 아늑하고 아득해 보였어.

오랫동안 간직하고 싶을 만큼 말이야.


그 닿지 않을 빛이 마치 우리의 인연 같아 보였어.

그래서 난 그 빛을 오랫동안 간직하고 싶었어.



팜플로나에서의 아침은 수정언니와 므라찌 그리고 세움이와 하은이가 함께 했지.

걷는 길에, 수정언니의 필름카메라가 바닥에 떨어져서 잠깐 멘붕이 왔지만

그래도 사진은 찍히는 것 같다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지.

도시가 조금 컸던 만큼 도시를 빠져나가는 시간도 길었어.


이것 또한 인연에 빗댈 수 있지.

인연이 크면 클수록 그 인연에서 벗어나는 것도 오랜 시간이 걸릴 거라고,

마음이 크면 클수록 그 마음이 옅어지는 것도 참 오랜 시간이 걸릴 거라고 말이야.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으면 누구든 시인이 되나 봐.

우리처럼 약간 야매 시인이라도 말이야.



걷다가 짚더미를 발견한 나와 하흥이는 또 신이 났던 것 같아.

아침 먹을 곳을 찾던 우리에게 정말 동화의 한 장면 같던 곳이었지.

한 끼라도 대충 먹어서는 안 되잖아.


모든 낭만이 대충 오지는 않는 것처럼.



짚더미에 앉아 지나가는 모든 이들에게 'Buenos Dias'를 외쳤어.

'Morning' 혹은 'Morgen'이라고도 말이야.


그때 우린 그렇게 한시도 외로웠던 적이 없었는데 말이야.

지금은 약간,

아니 솔직히 지금은 많이 외로워.

아무리 사람들이 북적이는 틈에 있어도

함께라는 생각이 잘 들지 않아서 인가 봐.


함께라는 건 뭘까.

함께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건 뭘까?


같은 공간일까? 목표일까?

웃으며 건네는 인사일까? 서로에 대한 호기심일까?

그도 아니면 그저 너 일까?



세움이는 말했어.

자기가 꿈꾸던 까미노길이 바로 이런 거였다고.

이곳에 오기 전엔 항상 넓디넓은 평야 속에서 끝도 없이 이어진 오솔길을 걷는 상상을 했었다고 말이야.

맞아.

내가 상상했던 길도 약간은 그런 느낌이었어.

구체적으로 생각해보지는 않았지만,

나는 그저 하흥이가 옆에서 걷고 있고, 그 발에 맞춰 걸으며 함께 웃는 상상을 했었지.

그러면 하나도 힘들지 않을 것 같았거든.

그래서 같이 가자고 했어.

그래서 온다고 했어.


이 날은 언덕이 조금 있던 날이었지.

그리고 오르막을 오르며 세움이는 앞서가기 시작했어.

우린 저 아래에서 세움이의 바게트를 보면서 참 부단히도 걸었지.


그 바게트, 우리에겐 참 긴 여운을 주었던 것 같아.

난 아직도 바게트를 보면 그 길이 생각 나.

세움이가 그 바게트를 꽂고 걷던 오르막길 말이야.

그래서 이곳에 돌아온 뒤로도 빵집 아저씨가 바게트를 썰어줄까 물어보면

괜찮다고 말해. 그냥 달라고 말해.


그러면 그 추억이 조금은 함께하는 것 같거든.

저 골목을 돌면, 세움이가 그 바게트를 꽂고 아직도 걷고 있을 것 같거든.



우리가 걷던 까미노는 날이 좋았어.

이 날도 푸른 하늘이 참 마음에 드는 날이었지.

언덕을 올라 이렇게 순례자 동상들이 서 있는 곳에 도착했지.

이름이 뭐였더라?

사실 이름은 크게 중요하지는 않아.

이름은 금방 잊혀도 추억은 그렇게 금방 잊히지는 않거든.

하흥이의 웃음소리와 살랑이던 바람, 흔들리는 풀잎이 보내는 그 내음은

쉽사리 잊히지 않으니까 말이야.



우리가 이렇게 한 명씩 동상 옆에서 사진을 찍고 있으니 한 아저씨가 다가왔어.

우리의 사진을 찍어주신다고 했지.

그리고 그 언덕에 올랐던 모든 이들은 우리를 향해 사람 좋은 웃음을 짓고 있었지.

우리가 참 귀여워 보였나 봐.


지금 생각하니 그렇다.

우리 참 귀여웠어.

우리 추억도 참 귀엽다.



추억에도 여러 종류가 있는 것 같아.

여러 종류라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수많은 종류의 추억이 있겠지만

지금 이렇게 추억을 다시 추억화시키는 작업 또한 추억의 한 부분이 되고 있으니

귀여운 추억이라는 말은 참 애틋하다.

언제 또 이렇게 귀여울 수 있을까?



이 표식 앞에서 일본에서 온 할아버지 두 분을 만났어.

참 해맑았던 두 분.

우리에게도 여기서 도장을 찍고 가라고 하셨찌.

나이가 들면 난 당연히 웃음은 서서히 잊히는 것인 줄 알았어.

하지만 두 분을 뵈면서

아, 나이가 든다는 것은 참 아름다운 것이구나.

젊은 날들, 행복했던 날들, 힘들었던 그 모든 날들을 담은 그 웃음이

난 너무나 부러웠어.

가끔은 그 웃음을 보면 눈물이 날 뻔한 적도 있었으니.


슬프면서도 행복한 웃음.



Puente la reina에 도착해서 숙소에 짐을 풀고 나서야 우린 늦은 점심을 먹었어.

엊그제 만났던 아저씨가 어떤 생선 통조림을 빵에 끼워먹고 계신 게 우린 내심 부러웠나 봐.

그래서 생선 통조림을 샀지.

아침도 점심도 온통 생선이었어.

생선 통조림이라니 말이야. 독일이었다면 이런 사치가 또 어디 있었을까 싶었지.

맛까지 있었으니 말이야.



숙소 뒤편에 기다랗게 진 그늘에 앉아 간단히 점심을 해결했어.

그리고 저녁거리를 사러 슈퍼메르까도를 찾아 나섰지.

하지만 실패였어.

쨍하니 내리쬐는 햇볕 아래에서 우리는 이곳저곳 많이 물으며 많이 걸었어.

하지만 결국은 문이 닫혀있는 슈퍼메르까도 밖에 찾지 못했지.



그래도 햇살이 좋으면 사진이 예쁜 법이지.

그리고 다리 너머로 보인 마을이 참 예뻐서 마음이 노골노골 해졌어.

세움이랑 므라찌랑 수정언니, 그리고 하흥이랑 다리 위에서 한가로이 시간을 보냈어.



여유로워 보이지만 사실은 햇볕이 너무 강해서 조금은 피해보려고 쭈꾸리고 앉아있었지.

하흥이는 그 틈을 참지 못하고 이렇게 여유로운 사진으로 찍어주었지만 말이야.


추억은 참 신기해.

덮이고 또 덮이지.

지금은 추억이 희미해져서 사진으로 덮이고 있는 것 같아.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어.

내 기억 속에 추억이 조금 더 선명했으면 좋겠어.

그래서 사진을 보면서 추억을 설명하기보다

추억을 보면서 사진을 설명했으면 좋겠어.



숙소로 돌아와 저녁을 먹었지.

시원한 맥주가 당겼어.

산미구엘을 필리핀에서보다 더 많이 마신 것 같아.

자판기에서 시원한 맥주를 두 캔 뽑아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야금야금 마셨지.

그러다 헤수스가 우리에게 멕시코 국기를 주었어.

좋은 사람이 있으면 주려고 가져왔다면서 말이야.

우리는 그에게 좋은 사람이었나 봐.

철은 없었어도 말이야.



우리 이때, 준이를 만났어.

그리고 아까 숙소에 돌아오며 스치듯 민들레도 만났지.

난 몰랐어.

그 잠깐 건네었던 미소가 우리를 이렇게도 웃겼다 울렸다 할 줄은 말이야.


준이는 1층 식당에 혼자 앉아있었어.

나는 생각했지. 아 누군가를 기다리나 보다.

그리고 곧 생각해 냈어.

바욘에서 어떤 여자와 함께 서있던 준이를 말이야.

그래서 난 당연히 그 여자를 기다리는구나 했지.


잠깐 눈인사를 건넸고, 라면을 끓여 먹으려던 준이는 우리 곁으로 와서 먹기 시작했어.

왜냐하면 한국에서 온 그 신라면 덕분에 1층 식당은 온통 매운 냄새로 가득했거든.

그래서 내 앞에 앉아 라면을 먹기 시작한 준이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지.


처음 나눈 대화를 아직도 기억해.

준이는 18살이라고 했어.

그리고 나에게는 누나는 대학생이냐고 물었지.

그래서 난 아니라고 했어.

그러자 곧 나에게 그럼 회사원이냐고 물었지.

그래서 난 다시 아니라고 했어.

준이는 대뜸


괜찮다고 했어.


갑자기? 하하

참 귀여운 아이구나 생각했지.

사실 잠깐 듬직하기도 했어.

괜찮다는 그 말이 고맙기도 했으니 말이야.


기다린다는 사람은 선생님이라고 했어.

선생님은 걸음이 느려서 걷는 중에 기타를 치기도 하면서 느긋하게 오신다고 했지.

그래서 매일 먼저 도착해서 선생님을 기다린다고 말이야.

나는 이제야 이해가 가기 시작했어.

아까 잠깐 인사를 건네었던 그분이 선생님이시구나.


기타를 메고 가던 조그맣고 까만 그분이 말이야.

그땐 몰랐어.

그 노래를 말이야. 그리고 우리가 함께 그 노래를 부르게 될 줄이야.


우리가 함께 걷게 될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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