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우리집>을 보고
*. 잠깐! 본 콘텐츠에는 영화 <우리집>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볼 게 없어도 너무 없었다. 5월엔 <기생충>, 6월엔 <알라딘>, 7월엔 <스파이더맨>으로 숨 가쁜 달을 보냈는데... 8월 말, 남은 통신사 혜택을 소진하려니 볼 영화가 없었다. 그러다 간간이 SNS에서 인증숏으로 마주한 <우리집>이 생각났다. 평소 좋아하는 액션 영화도 아니고, 여기저기서 쉴 새 없이 들리는 소문도 없었지만, 아는 사람들만 아는 잔잔한 물결이 있는 듯했다.
이미 개봉한 지가 좀 되선지 상영관이 많지 않았지만, 다행히 토요일 적당한 시간 압구정 CGV에 두 자리를 예매할 수 있었다. 압구정이라면 여름 내내 가고 싶어 했던 평양냉면집이 있는 곳이었다. 덕분에 평소엔 갈 일 없는 압구정까지 영화를 보러 가는 발걸음이 조금은 가벼워졌다. 좋아, 자연스러웠어!
하나는 요리를 좋아하는 12살 소녀다. 가족들이 다 같이 앉아 밥을 먹는 게, 하나가 바라는 유일한 소원이다. 어느 순간부터 아빠, 엄마, 오빠, 그리고 하나, 이렇게 넷이 한자리에 앉는 일이 없어졌다. 부모님은 각자 일에 바빠 사이가 멀어졌고, 여자 친구에게 줄 선물을 준비하는 오빠는 방으로 찾아온 동생이 달갑지 않다.
남부럽지 않은 집에 회사원 부부와 중학생 아들, 그리고 초등학생 딸. 겉으론 평범해 보이는 네 가족은 저녁 한 끼 같이 하는 일이 없다. 어린 하나도 언젠가 그 간극을 체감하고 그걸 메꾸기 위해 매일같이 밥을 차린다. 하지만 차려놓은 밥상엔 아무도 나타나질 않는다.
그러다 여느 때와 같이 요리 재료를 사기 위해 들른 마트에서 유미, 유진 자매를 만나고, 하나가 체한 유진의 손을 따주며 셋은 금세 가까워진다. 이제 하나는 유미와 유진 자매를 위한 요리를 한다. 셋은 동그란 반상에 둘러앉아 밥을 나누며, 끼니를 함께 먹는 식구(食口)가 된다.
유미네 집에도 위기가 닥친다. 부모님이 일을 하러 멀리 떠난 사이, 집주인 아주머니와 부동산 업자가 들이닥친다. 집을 내놨단 말은 듣지도 못했는데, 다짜고짜 '너네 이사가~'라며 집 구하는 사람들을 데려오는 아주머니. 하필 이럴 때 아빠는 전화를 받지 않는다.
이에 하나는 부모님을 찾아가 직접 말하자며 유미, 유진을 데리고 길을 나선다. "내가 지킬 거야, 우리 집. 너네 집도"하고 호기롭게 떠난 여행은 곧 위기를 맞는다. 버스는 잘 못 타고, 핸드폰은 잊어버린다. 지칠 대로 지친 아이들은 서로 날을 세우고, 하나는 급기야 그간 박스를 이어 붙이고 색칠해 정성스레 만든 '우리 집'을 마구 부순다. 유미와 유진도 동참한다. 터놓고 말하지 못한 것에 대한 답답함, 부모님에 대한 원망, 그저 지치고 힘든 마음을 부순다.
길을 잃은 아이들 뒤로 어둠이 깔리지만, 다행히 해변에 덩그러니 남은 텐트에서 하룻밤을 묵게 된다. 누울 자리가 생기니 괜스레 마음이 편안해진다. 매일같이 싸우는 아빠와 엄마 없이, 자꾸 문을 두드리는 아주머니 없이, 그저 이렇게 셋이 같이 지내면 좋을 것 같다.
여기서 살자 우리. 우리끼리만
여행이 끝났다. 유미와 유진을 데려다주고 돌아서려는데, 유미가 하나를 불러 묻는다. "언니, 언니는 계속 우리 언니 해줄 거지?" 유미도 더는 다가올 이별을 피할 수 없다는 걸 안다.
집으로 돌아온 하나는 여느 때와 같이 밥을 안치고, 계란을 톡 터뜨려 요리를 시작한다. 아무도 없는 집에 지글거리는 소리만이 공간을 가득 메운다. 이윽고 하나를 찾으러 나갔던 가족들의 탄성 소리에 집안이 다시 시끌벅적해진다. 모두 하나만 바라보고 서 있는데, 하나는 홀로 태연하다. 비로소 진짜 여행을 떠날 준비가 된 것이다. 하나는 가족들을 모두 식탁에 앉히고 밥그릇을 하나씩 놓고는 말한다.
밥 먹자, 든든히 먹고 진짜 여행 준비하자
이제 유미와 유진은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가야 하고, 하나는 아빠와 헤어져 엄마와 독일로 떠나야 한다. 피하려 했지만 할 수 없었던 진짜 여행을 떠나, 각자 앞에 닥친 변화를 받아들여야만 한다.
애매한 시간에 가도 항상 줄을 서야 한다는 그 냉면집엔 사람이 없었다. 냉면 하나에 비빔면 하나, 그리고 만알못도 반했다는 만두 반 접시를 시켰다. 생애 처음으로 극호와 불호를 오간다는 평양냉면을 마주하니 긴장이 됐다. 일단 국물을 한 수저 맛봤다. '오, 괜찮은데? 나 평냉 체질이었나 봐!'라는 생각에, 얼른 면을 풀어 허겁지겁 먹었다.
이상했다. 국물은 참 맛있었는데, 면은 맛이 없었다. 삼삼한 맛이란 게 뭔진 알겠는데, 먹다 보니 앞 두통이 올 것만 같았다. 결국 면을 잔뜩 남기고 일어났다. 하지만 돌아서는 순간부터 지금까지 잊히지가 않는다. 다음엔 불고기를 먹어볼까, 어복쟁반을 먹어볼까-하며, 자꾸 다시 그곳에 가는 상상을 한다.
영화를 보며 옆에 앉은 남자 친구가 자는 건 아닌가 자꾸만 돌아보게 됐다. 확실히 심심한 영화였고, 아이들의 연기는 풋풋 하단 말로 감싸기엔 꽤 어색했다. 웬일인지 한숨도 자지 않은 그가 영화관을 나오며 물었다. "이거 글로 쓸 거야?" 난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돌아서는 순간부터 지금까지 자꾸 영화 속 대사들이 머리를 맴돈다. 평양냉면과 우리집이 자꾸만 겹친다. 다음엔 전작 <우리들>을 봐야겠다.
*. 표지 사진 : 네이버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