츄리닝에 슬리퍼로 승부하는, 이 편한 '슬세권'

결혼 준비 최고봉, 집 구하기 #4

by Dahl

*. 이전 글


이건 이래서 별로고, 저건 저래서 별로고- 그렇게 마음에 쏙 드는 집을 못 찾고 2주가 흘렀다. 하지만,

수지엔 여전히 둘러볼 아파트가 많았다.


근처 다른 부동산에 약속을 잡고, 이번엔 초역세권의 신축 아파트로 임장을 가기로 했다. 아직 아이도, 아이 계획도 없는 뚜벅이 30대에겐 초품아보다 역과 연결되는 통로가 있다는 게 더 좋아 보였다.



더위가 가시지 않은 여름, 살짝 늦은 우리는 허겁지겁 아파트 앞으로 도착했다. 중개인은 한 손에 미니 선풍기, 다른 한 손엔 커다란 종이봉투를 들고 있었다. 짧은 인사를 마치고 여전히 더운 날씨 얘기를 주고받으며, 바로 첫 번째 동으로 들어갔다.


이제 막 입주를 시작한 아파트 엘리베이터는 아직 박스로 보강이 되어있는 상태였다. 입주 이사가 잦은 신축 아파트엔 당연한 처사였지만, 여기저기 먼지며, 덕지덕지 붙은 전단지가 가세해 어수선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현관에 들어서자 중개인이 들고 있던 커다란 종이봉투의 비밀이 풀렸다. 집을 둘러볼 때 신을 실내화가 든 봉투였다. 이미 누군가의 소유가 된 집이라 신발을 신고 들어가면 안 됐지만, 그렇다고 맨발로 들어가기엔 좀 지저분했기 때문이리라.



서너 군데쯤 둘러본 것 같은데, 하나같이 사람이 살았던 적 없는 새 집이라 별다른 특이점이 없었다. 그저 어느 곳은 남향이라 해가 잘 들고, 어느 곳은 구조가 잘 나와 집을 더 넓게 쓸 수 있고, 또 어느 곳은 세 집에 엘리베이터를 두 대 쓸 수 있어 좋다는- 사소한 장점이 있을 뿐이었다. (물론 그에 따라 집 값은 6천만 원 가까이 차이가 나긴 했지만.)


그래서 차이점보단 공통점이 더욱 기억에 남는다. 먼저, 신축이라선지 주변 인프라가 참 잘 되어있었다. 커뮤니티 시설과 아이들 놀이터는 물론이고, 무엇보다도 단지 내 오피스텔과 연결된 커다란 쇼핑몰이 압도적이었다.


앞서 말한 역과 연결되는 통로는 먼저 쇼핑몰과 이어져 있었고, 곧 쇼핑몰과 아파트 각 동을 이을 예정이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우산 없이 집에 있다 그대로 슬리퍼를 신고 나와, 옷을 사고 마트에서 장을 볼 수 있다는 뜻이었다. 그야말로 진정한 슬세권*이었다.



하지만 그 장점이 단점으로 작용한 걸까. 개인적으로 맘에 들지 않은 부분이 하나 있었다. 바로 주상복합이라선지 베란다가 없고, 창문이 여러 개로 구획되어있다는 것이었다. 베란다에 대한 로망을 실현할 수 없는 것도 문제였지만, 시야를 가리는 창문틀이 그 자체로 꽤 눈에 거슬렸다.


또 하나는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면 두 집의 문이 바로 보인다는 점이었다. 30층이 넘는 건물에서 수시로 이웃들을 마주할 텐데, 그들에게 내가 집에 들어서는 모습을 보인다는 게 싫었다. 정확히는 우리 집 문이 열리는 모습이랄까? 돈을 더 얹어 최고층을 사지 않는 한, 하루에도 몇 번씩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


마지막으로 단점이 하나 더 있었는데, 바로 동 간 거리가 너무 좁다는 것이었다. 후에 쭉 수지에 살던 사람의 말을 들으니, 거기에 아파트가 들어올 줄 몰랐다고 한다. 그만큼 크지 않은 공간인데, 그 안에 아파트를 욱여넣으려니 어쩔 수 없이 다닥다닥- 붙은 형세가 된 것이다.



아, 그리고 임장 병아리였던 우리에게 낯설었던 점이 하나 있는데, 바로 매매 가격을 호가가 아닌 피(fee)로 얘기한단 거였다.

우리 : 여긴 얼마예요?
중개인 : 아, 여긴 (피가) oo 억 oo 천이에요.
우리 : 아, 그럼... 얼마인 거죠?
중개인 : (계산기를 두드려보더니) oo 억 oo 천 oo만원이네요.


그렇게 십만 원 단위까지 결정된 아파트 가격은 어마어마했고, 우리는 그 돈을 주고 창문도 못 연 채 사는 게 맞을까-란 생각을 하며 세 번째 임장을 마쳤다.


처음 성남에서 임장을 시작했을 때와 비교하면, 이 곳은 마치 수지의 강남 같았다. 단지를 지나며 우리처럼 집을 보러 온 다른 무리들을 마주치기도 하고, 심지어 문 앞에서 앞선 팀이 집을 다 둘러볼 때까지 기다리기도 했다. 그만큼 당시 그곳은 핫플레이스였고, 사실... 지금도 여전하다.


누군가에겐 프라이버시만큼 중요한 것이 바로 슬세권인 모양이다.







*. 슬세권 : 슬리퍼를 신고 편의시설을 이용할 수 있는 곳

*. 표지 사진 : Photo by Patrick Reichboth on Unsplash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