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덕이라도 괜찮아, 내 마음에 들어온 '광폭 베란다'

결혼 준비 최고봉, 집 구하기 #5

by Dah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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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역이 들어선다는 호재로 귀가 솔깃했던 곳부터, 초품아, 슬세권에 이르기까지 여러 아파트를 다녔다. 그 유명한 스드메며 가장 처음이었어야 할 상견례까지 '진짜' 결혼 준비는 전무한 상태로, 집을 보러 다니기 바빴던 여름이었다.


여러 집을 둘러보고 당시 집에 살고 있던 사람들을 보면서도, 우리가 그 안에서 살면 어떨지- 전혀 상상이 되지 않았다. 사람이 사는 공간이라기보단, 그저 경제 기사에 오르내리는 '아파트'라는 단어에 꼭 들어맞는 무언가로 느껴졌다.


그 집이 다 그 집 같고... 과연 우리 마음에 쏙 드는 데가 있을까? 싶었지만, 속단은 금물이었다. 우린 아직 대한민국, 아니 수지 아파트의 반의, 반의, 반의,....... 반도 못 본 상태였으니까. 그동안 가봤던 2-3년밖에 안된 신축에서 눈을 살-짝 돌리기로 했다. 40평이 기본인 대형 평수지만, 지은 지가 오래돼 30평대 신축보다 저렴한

구축 아파트에 가보기로 했다.



이전의 초품아, 슬세권과 출구만 다를 뿐인데, 지하철 역을 나와 조금 걸으니 언덕이 나왔다. 이제 다 끝났겠거니- 했더니 또 언덕이었다. 부동산 어플에서 언덕이라는 얘길 본 것 같긴 한데, 이 정도였다니- 한여름 예상 못한 고행에 임장 시작도 전에 땀이 났다.


아파트 초입에 위치한 부동산 중개소가 보였다. 세월의 흔적을 그대로 맞은 상가 건물 중개소 옆으로 어둑한 구멍가게와 조그만 세탁소가 있었고, 군데군데 페인트가 갈라진 벽면을 따라 올려 본 위층엔 학원이 몇 개 있었다. 슬세권의 쇼핑몰, 초품아의 브랜드 슈퍼마켓과 비할바가 못 되는 초라한 행색이 우리를 금방 20년 전으로 데리고 간 듯했다.


중개소로 들어가 인사를 나누고, 그동안 몇 번이나 나눴던 얘기를 또 반복했다. 곧 결혼해서 같이 살 집을 구하고 있으며, 예산은 얼마 정도를 생각하고 있고, 직장이 판교라 이 근처를 돌아보고 있단 얘기를. 그리곤 중개인 아주머니를 따라 미리 연락해둔 집을 보러 나섰다.



가는 길에 아주머니가 말하길, 너무 살기가 좋아 실거주가 많다 보니 매물이 잘 안 나온다고. 믿거나 말거나, 가장 작은 40평대에 매물로 나온 곳은 지금 가는 곳 딱 한 군데 뿐이라고 했다. 여기도 아직까지 남아있을 곳이 아닌데, 집주인이 그동안 집을 잘 안 보여줘서 그랬단 말을 들으며 마지막 언덕을 올랐다.


때맞춰 온 엘리베이터 안에서 더위를 식히다 보니 목적지에 도착했다. 그동안의 노하우를 살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마음속 리스트를 꺼내 바삐 체크를 하기 시작했다. 두 집에 한 엘리베이터면 적당하지. OK.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안 쪽으로 들어가야만 현관문이 보이는 구조. OK, 아주 좋다.


열린 문으로 들어가니 아주머니가 노련하게 설명을 시작하셨다. 전실이 있고(현관이 집의 얼굴인데, 넓은 건 좋은 거지), 신발장 외의 수납공간이 또 있다(수납공간이 많은 건 언제나 좋지)는 아주머니의 말에 귀를 기울이려 했지만, 일단 집에 들어서니 내 마음은 이미 거실로 가 있었다. 집의 정중앙에 서면 비로소 전체적인 분위기를 알 수 있거니와, 넓은 거실 창으로 보이는 바깥 풍경도 내겐 꽤 중요하기 때문이다.



다른 방들은 제쳐두고 먼저 거실로 나왔다. 과연, 일평생 살아본 적 없는 40평대 아파트는 참 여유로웠다. 곳곳에 수납장이며, 선반이며 물건들이 잔뜩 나와있는데도 역시 넓었다. 하지만 그보다 내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바로 거실 베란다였다. 이전에 부동산 공부를 한답시고, 인터넷을 들락거리다 본 단어.

광폭 베란다

구축 아파트의 좋은 점을 쥐어짜 낼 때 쓰이는 단어로만 생각했는데, 그게 바로 눈앞에 펼쳐져 있었고 마음에 쏙- 들었다.


Photo by Francesca Tosolini on Unsplash

포베이 구조라 거실과 같이 남향을 바라보는 세 개의 방을 모두 잇는 베란다는, 정말 길고 넓었다. 빈백을 세로로 놓고 기대, 밖을 바라볼 수 있을 정도였다. 베란다로 나가 그 넓이를 체감하며, 난 금세 따스한 햇살을 맞으며 느긋하게 여유를 즐기는 늦은 봄의 주말을 상상했다.

그곳에서 함께하는 우리의 모습이 그려졌다.


게다가 이 베란다는 평수에는 들어가 있지 않은 서비스 면적! 확장을 하면 방은 더 크게 쓸 수 있고, 이 모든 면적을 합치면 40평이 아니라 (조금 과장해) 50평은 될 것이었다. 앞 베란다만큼 넓진 않았지만 뒤편에도 아주 넉넉한 베란다 공간이 있기 때문이었다.




정남향에 딱-떨어지는 판상형 구조, 옛날 아파트라선지 동 간 거리도 넉넉하고, 무엇보다 넓은 베란다가 보존되어있는 집. 나무랄 데가 없는 곳이었다. 좀 오래되면 어때, 어차피 남이 살던 집이니 이번 기회에 싹- 뜯어고치면 되지! 그렇게 내 마음은 급격히 기울었다. 언덕이란 사실은 이미 기억에서 잊힌 뒤였다.




*. 표지 사진 : Photo by Luke Stackpoole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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