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자가 7703km를 하루 걸려 날아간 사연

브리즈번에서 타우포까지 #1

by Dahl

*. 본 글은 <브리즈번에서 타우포까지> 시리즈로 연재 중입니다.

*. 전편


| 지금 아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현금이 필요하다면 브리즈번에 도착해 다시 환전을 하면 되겠지-라고 생각하곤 비행기에 올랐다. 그래도 뭔가 처음이 삐걱거렸단 생각에 불안함이 좁은 틈을 파고 들어왔지만 그것도 잠시, 곧 익숙한 비행 타임이 돌아왔다. 달릴 듯 말 듯 주위를 서성이던 비행기는 서서히 속도를 올렸고, 기체가 하늘에서 안정을 되찾자 어디선가 맛있는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비행기에서의 첫 끼. 커리 치킨도, 망고 무스도 맛있었다.


이내 앞으로 전달된 기내식을 디저트까지 음미해가며 잘 먹고, 영화도 한편 보고 있자니 어느새 비행기는 다시 지상으로 내려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영화가 너무 재밌어서 시간이 빨리 간 것처럼 느껴졌나? 했지만, 내가 내린 곳은 브리즈번이 아니었다.

타이페이였다.


기내가 너무 시끄러워 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던 탓에, 어쩔 수 없이 선택한 영어자막.


'드디어 간다, 호주로~!'를 외친 지 2시간 반 만에 영화 <범죄도시>를 보다 말고 비행기에서 내려야 했던 연유는 이렇다. 인천에서 브리즈번 직항은 총 10시간이 조금 안 걸리지만, 그즈음엔 주로 동남아만 여행했던지라 하늘에 10시간을 쭉 떠있다는 게 그다지 좋아 보이진 않았다. 그래서 '중간에 한 번 내렸다 가는 게 오히려 더 낫지 않나? 가격도 더 싸고!'라는 짧은 생각으로 결국 방콕을 경유하는 항공편을 예약했던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는 잘못된 선택이었다.


나름 국적기임을 감안해 타이항공으로 예약을 하려는데, 여정을 펼쳐보니 뭔가 이상한 구석이 있었다. 명 한 번만 경유하는 거였는데, 인천-방콕-브리즈번 사이에 착지가 하나 더 있었다. 인천에서 타이페이로 가 잠시 정차했다 다시 방콕으로 출발하는 트랜짓(transit)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때는 경험이 없던 터라 인터넷에서 주워들은 지식으로 그냥 비행기가 잠깐 내려와 있다 다시 올라가는 거 아냐?라고 단순하게 생각하곤 시원하게 '결제 고고~'를 외쳤다. (나중에 안 사실인데, 타이항공이 원래 방콕행 비행기에서 종종 트랜짓을 하는 항공사 중 하나라고 한다.)


트랜짓(TRANSIT) : 중간지에서 손님을 더 태우거나, 급유, 식수/기내식 준비, 승무원 교대 등을 위해 하는 것으로, 환승(Transfer)과 달리 동일한 비행기를 계속 이용하며 별도의 출입국 심사가 없다.


그러나 실상은 생각했던 달랐다. 기내 수하물로 실었던 커다란 백팩을 들고 비행기에서 내려야 했고, 판기 몇 개가 전부인 대합실에 앉아 한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가방에 든 노트북이 신경 쓰여 화장실도 못 가고, 그저 가방 옆에 찰싹 붙어서는 하릴없이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현지에서 유심을 구입할 예정이었기에 잡힐 듯 말듯한 공항 와이파이만이 유일한 길이었는데, 녀석도 끝내 잡히질 않아 멍 때리는 것 빼곤 할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꽤 오랜 시간을 그러고 있는데(아마 실제는 그보단 금방이었겠지만) 옆에 앉아있던 남녀가 얘기하는 소리가 들렸다. 원랜 일행이 아닌 듯했으나 남자가 먼저 말을 걸었고, 여자는 핸드폰으로 메시지를 보내던 손을 멈추고 웃으며 그의 말해 응했다. 어디까지 가냐는 둥, 얼마나 있을 거냐는 둥 뭐 그런 흔한 대화였지만 그 순간 그들이 너무 부러웠다. 그들은 나처럼 커다란 짐도 갖고 있지 않았고(아마 25인치 캐리어만 수하물로 부쳤겠지), 인터넷을 하든 메신저를 보내든 뭐든 할 수 있는 핸드폰이 있었고, 무엇보다 그로 인한 여유가 있어 보였기 때문이다.


다른 나라를 여행하며 짊어져야 하는 것들, 여권은 물론이고 카메라며 지갑이며 온갖 잡동사니들이 '혹시 몰라서'란 이유로 들어가 있는 무거운 가방, 그리고 유심이든 와이파이든 그 나라에서 인터넷을 사용 가능케 하는 뭔가가 없으면 '사진 찍기' 정도로 그 쓸모가 대폭 줄어드는 핸드폰이 거추장스럽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한국에 있었다면 신분증이 필요한 데는 다음에 가면 되고, 뭔가 살 일이 있어도 스마트 페이를 쓰면 되니 지갑 없이 핸드폰만 들고 나오면 됐을 텐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야말로 내가 한국이 아닌 외국에 나와 있다는 얘기였고, 이미 여행이 시작됐다는 뜻이었다. 그렇게 이것도 여행의 일부라 생각하니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 두 번째, 그리고 세 번째 비행

기다림은 언젠간 끝이 온다고 했던가,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시간이 지나고 다시 비행기에 올랐다. 조금 있으니 커튼 너머로 분주한 승무원들의 기척이 느껴졌고, 배가 고픈지 안 고픈지 모르겠는 상태에서 두 번째 쟁반을 받아 들었다. , 리오와 함께 태국 3대 맥주 중 하나인 싱하를 받아 들고 솜땀을 안주처럼 집어먹다 보니, 내가 태국에 가고 있는 건지 호주에 가고 있는 건지 짝 혼란스러웠지만(ㅎㅎ) 역시 태국 음식은 맛있었다.


치킨 베이스의 밥과 위에 잘린 새우가 든 쏨땀
왜 비행기에선 항상 알코올이 당기는 걸까


그렇게 배를 두둑이 불리고 나니 또 잠이 왔다. 몇 시간 만에 양치질도 야무지게 하고 이제 좀 자볼까, 하고 보라색 담요를 어깨까지 덮었다. 그리고 얼마 후 잠이 얼핏 들었나 싶을 즈음... 나는 다시 비행기에서 내려야 했다. 이번엔 방콕이었고, 이어진 두 번째 환승은 첫 번째보다 수월했다.


처음보다 쉬웠던 두 번째 경유를 기념하며
가는 중 가장 별로였던 기내식


드디어 타이페이도, 방콕도 아닌 브리즈번으로 향하는 비행기를 탔고, 마지막으로 8시간이 넘는 비행이 기다리고 있었다. 어김없이 나온 기내식은 퉁퉁 불은 채 감긴 모양 그대로 굳어버린 듯한 면요리였고, 손댄 흔적이 거의 없는 쟁반을 대충 정리해놓은 채 모니터를 켰다.


먼저 와이너리 남매에 관한 이야기를 담은 영화 <부르고뉴, 와인에서 찾은 인생>을 봤다. 를 이어 와이너리를 운영하는 게 보통인 프랑스에서,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께 와인 수업을 함께 받던 남매가 어른이 돼 흩어져 살게 되고, 이후 부모님이 돌아가시고서야 다시 만나게 된다. 그러나 와이너리 경영권(또는 처분 여부)을 놓고 다투게 되고, 그 과정에서 서로를 더 잘 알아가게 되며 더불어 각자의 인생도 돌아보게 된다는 내용이었다. 요즘 와인에 관심이 많아 선택한 영화였는데, 어렸을 때부터 각종 와인을 맛보게 하고, 눈을 가린 채 맛 본 과일이 뭔지 맞추게 하는 교육법이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연이어 르네 마그리트에 관한 다큐를 봤다. 그의 대표작들은 초현실주의를 표방하는 것이 대부분이지만,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이미지의 배반>, <중산모를 쓴 남자> 등의 그림과 달리 그의 화풍은 주변 사람들의 영향을 받아 꽤 많은 변화가 있었단 걸 알게 됐다. 그래도 시간이 남아 다큐멘터리를 한편 더 봤다.(8시간 50분은 정말 긴 시간이었다.) 야생동물에 관한 다큐였는데, 다양한 동물의 모습을 볼 수 있어 흥미로웠다. 어쩔 수 없이 한 자리에 묶여있어야 하는 기내에서의 다큐멘터리 시청은 얼마나 탁월한 선택이었던가. 보고 싶다고 저장만 해놓고 몇 년째 보지 않은 다큐멘터리가 있다면, 여행 때 꼭 가져가서 보길 추천한다.


야생동물들에 관한 다큐였는데, 삯이 이렇게 귀여울 줄이야...!


마지막 영상을 다 보고선... 다시 술을 시켰던가? 아마 맥주나 와인을 시켰던 것 같다. 이젠 잠을 자야 할 시간이었으니까.


짧은 시간 꿀잠을 자고 일어나 보니 어느덧 날이 밝아 있었고, 기다렸다는 듯 나온 아침밥을 받아 들고 기쁜 마음으로 음미했다. 보들보들한 오므라이스와 따뜻한 크로와상이 실제로 맛있기도 했지만, 길었던 여정이 드디어 끝나가고 있단 생각에 마지막 기내식은 그간 먹었던 것 중 가장 맛있게 느껴졌다.


가는 중 가장 좋았던 기내식


드디어 도착이구나! 윙윙거리는 소음과 미세한 흔들림이 항시 함께했던 비행기에서 벗어나 땅을 밟은 것에 감격하느라, 짐을 찾으려 컨베이어 벨트 앞에서 기다리는 시간도 지루하지 않았다. 그러나 똑똑하게도 알아서 이미 브리즈번으로 시간대를 바꾼 핸드폰은 이미 11시 5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한국에서 떠나온 지 22 시간 하고도 14분이 지난 때였다. 아니, 우리보다 한 시간이 빠른 시차를 감안하면 23시간 14분, 거의 만 하루가 걸린 거였다.


직항으로 10시간이면 갈 거리를 하루로 늘리다니... 그렇게 본격적인 브리즈번 라이프를 시작하기도 전에 배움만 늘어났다. 첫째, 출국장에 들어가기 전에 환전한걸 꼭 찾을 것. 둘째,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직항을 이용할 것





*. 다음편

*. 표지 사진 : Photo by VanveenJF on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