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브리즈번? 드디어 브리즈번!

브리즈번에서 타우포까지#2

by Dahl

*. 본 글은 <브리즈번에서 타우포까지> 시리즈로 연재 중입니다.

*. 이전 편



조금만 더, 약았더라면

24시간을 비행기만 타고 내리며 보내다 보니 몸이 너무 찌뿌둥했다. 게다가 꼬박 하루 동안 겨우 손만 가끔 씻은 터라, 평소엔 귀찮아서 그냥 하지 말까-했던 샤워가 너무 하고 싶었다. 다행히 내가 내 브리즈번 공항엔 샤워실이 있었고, 른 나가서 샤워를 할 생각으로 조그만 칸켄백을 등에 메고 캐리어를 끌며 서둘러 출구로 향했다.


그러나 내 앞엔 긴 줄이 있었고, 저- 앞을 보니 사람들이 두 갈래로 나뉘고 있었다. 내 손엔 수상한 물건을 들고 오지 않았다고 체크한 종이가 들려있었고, 나는 살짝 긴장했지만 짐짓 태연한 듯 그 종이를 제복을 입은 여자분께 드렸다. 그녀는 뭐라고 얘기하며 출구 쪽을 가리켰는데, 그쪽으로 쭉 나가면 됐을걸... 그 말을 정확히 알아듣지 못해 두리번거리는 바람에 다른 사람에게 잡혀 다른 줄로 빠지게 됐다.


정확하게 안내를 해주지 않은 여자분의 탓도, 긴 비행으로 정신없었던 내 상태도 원망해봤지만 이제 어쩔 수 없었다. 꼼짝없이 짐 검사를 당하게 된 것이다. 주변을 보니 다들 캐리어를 세네 개씩 올린 카트를 끌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달랑 캐리어 하나만 들고 있던 난, 순전히 어리바리한 탓에 그 줄에 동참하게 된 것 같았다.

조금만 눈치가 빨랐더라면,
조금만 약았더라면 피할 수 있었을 텐데...



다이(DIE)? 죽는다는 거야??

드디어 내 차례가 왔다. 를 담당한 직원은 잔뜩 긴장한 나를 보고, '괜찮아, 별 일 없을 거야'라며 '가방을 좀 열어서 검사해봐도 되겠지?'라고 점잖고 친근하게 물 나를 무장해제시켰다. 나는 다소 안심하며 2인 1조로 내 캐리어를 검사하는 걸 지켜봤다.


일단 캐리어를 위에 올리고 완전히 열고는 장갑을 낀 손으로 내 소지품들을 하나하나 꺼내보기 시작했다. 매일 먹어야 해서 넉넉히 가져온 약도 유심히 보고, 면세점에서 산 것들도 비닐봉지 너머로 열심히 살피며 용량은 얼마나 되는지, 가격은 얼마인지 등을 확인했다. 어찌나 치밀하던지 그러던 남자 직원은 급기야 여자 직원에게 노트와 펜을 갖다 달라고 하더니, 내가 면세점에서 산 것들의 가격을 하나하나 적어가며 합을 계산해냈다.


그러면서도 중간중간 내게 말을 걸었는데, 호주엔 무슨 일로 왔냐, 어디서 지낼 거냐, 내가 친척 오빠네 집에서 지낸다고 하니, 그 사람은 무슨 일 하는데? 뭐 이런 질문이 주였다. 얼핏 들으면 굉장히 가벼운 아이스 브레이킹급 질문으로 보이지만, 은근히 내 정보를 캐는 고도의 수법이었다. 그러다 말하길 How many dies... blah blah라고 하는 거다.

Dies? 죽어?

나는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뭐지? 내가 사람을 몇 명이나 죽였는지 물어보는 건가? 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 당황하다 답을 겨우 찾아내, 다시 그의 질문을 들었다. Sorry?


그는 내가 못 알아들은 걸 알고 이번엔 좀 더 발음을 신경 써서 물었다. 하우 매니 다애이스 유 윌 스테이 히어? 그랬다. 그는 내가 호주에 얼마나 묵을 건지를 물어봤던 거였다. 그러나 How many days you will stay here? 에서 days를 [다이스]로 발음한 탓에, 나는 그걸 dies로 듣고 온갖 망상을 했던 거였다. 취준 때도 경험하지 못했던 '호주식 발음'의 악명을 눈으로 확인한 순간이었다.



드디어, 브리즈번!

그 와중에도 그가 열심히 계산한 값은 다행히 허용범위 내로 나왔고, 그는 이제 됐다며 캐리어를 대충 정리해서 줬다. 디어, 끝인 줄 알았지만 끝이 아니었던, 험난했던 호주 여행기도착기가 끝난 것이다. 나는 얼른 검사가 끝난 캐리어를 들고 나와 공항 샤워장으로 향했다.


하지만 막상, 정말 브리즈번에 도착하니 이런저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어렸을 적엔 한 집에 살며 참 격의 없이 친하게 지냈는데, 서로 어른이 되며 멀어져 요 몇 년간은 거의 왕래가 없었기에 살짝 걱정도 됐다. 오빠랑 만나면 뭐라고 해야 할까, 몇 년 동안 연락도 없다가 대뜸 집에서 묵게 해 달라니 너무 뻔뻔한 건 아니었을까.


샤워를 마치고 나오니, 저 멀리서 오빠가 나를 발견하고 걸어왔다. 오빠는 오랜 기억 속의 그 환한 웃음과 다정한 태도로 나를 맞아주었고, 나는 금세 걱정일랑 잊고 안도할 수 있었다. 오랜만에 혼자 나선 여행길에 살짝 긴장하기도 했었는데, 제법 살이 찐 오빠의 모습은 마냥 듬직하게 느껴졌다.


공항에서 오빠네 집으로 가는 길, 탁 트인 도로를 보며 내가 한국을 떠나왔다는 걸 실감했다.




*. 다음 편

*. 표지 사진 : https://unsplash.com/@aliceduffield

매거진의 이전글제주도 뚜벅이 여행의 좋은 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