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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밤일기 Dec 18. 2018

내 몽골 여행의 이유, 고비사막

마법 같은 순간이 아닌, 진짜 마법

“꿈을 꿀 수 있다는 건 좋은 거야.”


아마, 사막을 뒤에 두고 그런 이야기를 나누었던 것 같다. 나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주던 일행의 목소리가 귀에 선하다. 그래, 나는 아직 꿈을 꾸고 있구나. 노력한다면 언젠가, 무엇이든 이룰 수 있겠구나.


고비는 정말 높았다. 한참을 기어 올라가야 겨우 도착할 법한 높이 앞에 괜히 기가 죽었다. 까마득한 고비의 꼭대기를 바라보니 올라야겠다는 도전 정신보단 오를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을 담은 한숨이 튀어나왔다. 야트막한 아래쪽과는 달리 경사가 심한 위쪽에는 사족보행을 하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굳이 노력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저렇게 될 것이라고, 위로인 듯 위로 아닌 위로 같은 말들이 사방에서 쏟아졌다.



부드럽게만 보이는 사막 위에 두 발을 얹고 사막의 경사를 따라 난 사람들의 발자국을 잠깐 바라보았다. 작은 발자국들이 모여 하나의 길을 만든 것 같은 모양이었다.


사막을 오르는 건 힘든 일이었다. 한 발 내디디면 반 발 미끄러지는 탓에, 열심히 발을 놀려도 그 자리가 그 자리고, 저 자리가 저 자리일 뿐이었다. 어느 세월에 저기를 다 올라가나, 하고 고민하다가 결국 마음을 편하게 먹기로 했다.


몇 년 전 수능이 끝나고 찾았던 네팔에서 트레킹 할 적에 이와 비슷한 상황을 겪은 적이 있었다. 다른 점을 찾자면 그곳엔 모래가 아닌 눈이 잔뜩 쌓여 있었다는 것뿐. 오르면 다시 미끄러지던 그곳에서 눈보라와 함께 고산병을 맞이했다. 체력은 이미 떨어질 대로 떨어진 후였다. 심장이 쿵쾅대고 머리는 어지러웠지만 내려가다가 죽을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실제로 그렇게 위험하진 않았다) 다시 꼭대기를 바라보며 발을 옮겼던 날. 내 인생 처음으로 그런 고생을 해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힘겨운 도전이었다. 그때의 일들이 다시 새록새록 떠올랐다. 열 걸음 걷고 5분 쉬고, 열 걸음 걷고 또 5분 쉬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던 것, 죽을 만큼 힘들었지만 죽자 살자 올라간 곳에서 참 놀라울 만큼 아름다운 풍경을 보았던 것, 그리고 결국 최종 목적지를 앞에 두고 포기한 채 돌아서야만 했던 아쉬운 순간들까지. 마음 같아서는 “힘든 여행, 체력적으로 지치는 여행은 하지 않겠다”라고 외치며 다 때려치우고 퍼질러 앉고 싶었지만 그때를 생각하며 다시 기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다행히 앞서간 사람의 발자국이 남아 있었다. 미끄러운 모래 위에 사선으로 나 있던 발자국들에 내 발자국을 덧씌웠다.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의 시작은 더디고 힘든 법이다. 발자국을 남겨 준 누군가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며 남의 발자국을 따라 위로, 조금 더 위로. 점점 사막의 꼭대기가 가까워진다.




잔뜩 지친 얼굴로 기어 올라오는 나를 본 사람들이 셀카봉을 길게 뽑아 아래로 내려주었다. 마치 하늘에서 동아줄이 내려오는 기분이 들었다. 해와 달이 된 오누이처럼 셀카봉에 매달려 끙끙대는 내 모습에 사람들이 웃기 시작한다. 그러더니 힘을 주어 나를 끌어올렸고, 조금은 수월하게 목표했던 사막의 꼭대기에 도착했다. 그들은 나를 보고 계속해서 웃음을 흘렸다. 꼴이 조금은 우스웠나 보다. 괜히 머쓱해져 따라 웃곤 사방을 둘러보았다. 놀랍게도 일행 중 가장 먼저 꼭대기에 도착한 사람이 바로 나였다. 그제야 여유가 생겨 아래를 바라보며 신나게 외쳤다. 얼마 안 남았노라고. 조금만 더 힘내 보라고. 그 누구에게도 내 외침은 들리지 않는 것 같았지만, 그래도 몹시 신이 났다.



뒤쪽으론 황금색 물결이 너울댔다. 나는 오로지 이 풍경을 보기 위해 이곳에 왔다. 그래, 내 몽골 여행의 이유가 다른 무엇도 아닌 고비 사막임이 행복한 순간. 내가 사랑했던 풍경, 그리고 사랑하게 된 풍경.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풍경에 잠겨 내 주위로 잔뜩 흩어진 행복을 주워 담기 바빴다.


마음속에 채우고 또 채워도 부족할 만큼 가슴 설렜던 고비, 오로지 모래뿐인 이 풍경에 잔뜩 벅차올랐던 나의 하루. 아주 고운 찰흙으로 빚어 둔 것 같은, 혹은 황금을 녹여 부은 것 같은 사막이 사방에 흘러내리고 있었다. 살짝 걷힌 구름 사이로 태양이 얼굴을 내밀고 온 세상이 햇빛을 받아 잔뜩 반짝였다.


그런 곳에서 먹는 주먹밥은 꿀맛이었다. 뒤이어 일행들이 도착하고, 가이드 언니에게서 아래에서 준비해 왔다는 주먹밥을 건네받았다. 차게 식은 밥을 입에 넣으면서 “베리 베리 굿!”을 외쳤던 우리는 이미 고비의 마법에 잔뜩 홀린 상태였을 것이다. 그 어떤 것을 보아도 기분 좋고, 그 어떤 것을 먹어도 맛있는 마법.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들뜨게 되었던 이상한 순간들.


이런 것들이 마법이 아닐 리가 없다. 이게 마법이 아니라면 내가 이렇게 행복하고 든든할 이유가 없다. 고생이란 고생은 사서 하고 있으면서, 지금 이 순간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은 바로 나일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리가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마법 같은 순간이 아닌 정말 마법이었음에 틀림이 없다.


사막 너머로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갔다. 햇빛 덕분에 고비는 여러 색깔로 물들어 변하곤 했는데, 그 모습이 자연스러워 더더욱 빠져들었다.



챙겨 온 스카프를 활짝 펼쳐 들고 사막의 해 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어린 왕자가 슬플 때면 늘 바라보곤 했다는 일몰이 내 눈앞에 펼쳐졌다. 나는 몽골에 와서야 어린 왕자가 본 것과 같은 풍경을 바라볼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언젠가는 꼭 사하라 사막에 가보고 싶다. 그곳에서 만나게 될 어린 왕자의 흔적이 더더욱 기대된다. 그 먼 곳에서부터 이곳까지 흘러들어온 그의 추억들을 조금이나마 함께 공유하며 나는 또다시 행복해졌다.

해가 사막에 걸릴 때쯤 모래는 빠르게 식어 내렸다. 뜨끈하던 것이 마치 거짓이었다는 듯 발에 닿는 모래가 순식간에 차가워진다. 흘러가는 시간이 아까워 아래로 내려간 해를 하염없이 바라봤지만 이미 땅과 만나버린 태양은 바쁘게 제 갈 길을 갈 뿐이었다.


우리는 실컷 뛰어놀았다. 구경을 하다가, 반대편 피크로 기어 올라가기도 하고 사진을 찍기도 했다. 온 사방으로 뛰어다니는 나와 친구를 옆에서 바라보던 일행들의 입가엔 미소가 가득했다. 이런 시선을 받아 본 것이 오랜만이라 새삼 신기했다. 마음속에 깃털이 들어온 듯 간질거렸다.


사방이 어두워질 무렵에서야 우리는 사막을 내려왔다. 올라가는 건 한참 걸렸는데 내려오는 건 금방이었다. 펄쩍펄쩍 점프를 하니 마치 스키를 타고 있는 것처럼 쑥쑥 잘도 미끄러진다. 신나게 소리 지르며 사막을 질주하는 길, 모든 것이 웃겨서 한참을 웃었다. 뭐가 그렇게 재미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온 세상에 즐겁지 않은 것이 없었다. 발가락 사이사이로 흘러 지나가는 모래알이, 어둠이 내린 사막이, 내 주변을 감싼 몽골의 공기가, 우리가 함께하는 이 모든 순간이 행복하기만 했다.


이미 어두워진 상태라 사막의 아래쪽엔 우리뿐이었다. 우리는 너 나 할 것 없이 가사도 음정도 엉망진창인 노래들을 불러댔다. 한 명이 노래를 시작하면 뒤에 내려오던 다른 사람이, 또 그다음에 내려오던 사람들이 함께 노래를 시작했다. 즉석으로 개구리 합창단을 결성한 양 열창을 하고 다시 깔깔거리기를 반복하던 날, 대체 왜 이런 행동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 채 그저 분위기에 잔뜩 잠겼던 우리. 언제 다시 이렇게 엉망으로 노래 불러볼 수 있을까.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친구와 나, 우리가 생각하는 각자의 미래. 여전히 생각할 것도, 고민할 것도 많은 우리였지만 고민할 수 있기에 다행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게르로 돌아와 늦은 저녁을 먹고, 일기를 쓰다 나도 모르게 잠들었다. 어렴풋이, 어린 왕자와 만나는 꿈을 꾸길 기도 하며 꿈속으로 잠겨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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