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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밤일기 Dec 25. 2018

불타는 절벽, 바양 작으로 가다

바양 작으로 향하는 날의 아침엔 날씨가 좋았다. 전날과는 달리 맑게 갠 하늘이 나를 반겼고, 우리의 앞으로 보이는 고비 사막에는 이른 아침 햇살이 쏟아지고 있었다.


금가루를 뿌려 놓은 양 반짝이는 고비 사막. 마치 보물 찾기의 수수께끼 속 장소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에서 가장 큰 황금이 나타나는 시간과 위치, 뭐 그런 수수께끼 말이다. 그런 질문을 던지는 보물 지도를 발견한다면 나는 망설이지 않고 오전 7시의 고비 사막을 정답으로 꼽을 것이다.



사막 위로 구름의 그림자가 내렸다가 또 흩어지곤 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크고 아름다운 황금의 옆에 하루도 채 머무르지 못하고 떠나야 한다는 것이 아쉬웠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어린 왕자》의 장면 중 하나는 그가 파일럿에게 웃을 줄 아는 별들을 선물하는 것이었기에 아쉬움은 더 컸다. 맑은 날 밤이면 어김없이 들려오곤 하던 별들의 속살거림을 이곳에서도 들을 수 있으리라 기대했기 때문에 더더욱 아쉽기만 했다.


햇살에 황금빛으로 빛나던 사막이 자잘한 별빛에 잠기는 모습을 보지 못한 채 떠나야만 한다니. 다시 돌아오라는 하늘의 계시인 것일까.




아침을 먹고 오래간만에 만나는 듯한 햇살을 만끽하며 오늘의 목적지인 바양 작으로 이동했다. 여행이란 무릇 이동과 이동의 연속인 법이지만, 몽골 여행만큼 이동이 잦은 여행도 아직까진 만나보지 못했다. 


하루에 적게는 다섯 시간, 많게는 일곱 시간까지 차를 타고 달리다 보면 멀쩡한 사람도 멀미를 시작하곤 한다. 그럴 정도이니 애초에 멀미가 심한 나는 어느 정도였을까. 아니나 다를까, 나는 지난밤의 여파와 멀미의 습격으로 인해 반쯤 기절한 채 푸르공에 실려 계속해서 초원을 달렸다.


쓰러져 죽은 동물의 모습이 옆쪽으로 보여도, 잠깐 멈춘 푸르공 옆으로 슬금슬금 다가온 낙타가 창문을 통해 안을 구경하고 있어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이동하는 시간을 요령껏 잘 사용해보겠다는 다짐은 온 데 간 데 없이 오로지 취침만을 외치는 내 본능만이 남았다. 그렇게 자고, 자고, 또 자다가 한참의 시간이 지날 때쯤에서야 정신을 차렸다.



오랜만에 들른 마을에서 한국의 사람들과 잠깐 연락을 했다. 어느 모임에 나올 수 있느냐는 연락부터, 개인적인 안부까지 이런저런 소식들이 많았다. 물론 데이터는 개미가 마라톤 하는 속도로 터지곤 했기에 원활한 연락은 불가능했다. 잘 지내고 있노라고 대충 이야기해둔 후 다시 연락을 차단했다.


나는 이런 상황이 꽤 기꺼웠다. 한국에 있을 때면 끊임없는 연락에 스트레스를 받곤 했다. 그래서 나는 여행지에서는 늘 반쯤 고의로 휴대폰을 꺼 두었었고 그럴 때마다 약간의 해방감을 느꼈다. 보아도 못 본 척, 여행이 바빠 보지 못했다거나 하는 핑계는 충분히 있으니 지금은 오롯이 나만의 시간을 즐길 때였다. 여행지에 와서까지 그런 허례허식에 묶여 지내고 싶지는 않았다.


잘 지내는 척, 부럽지 않은 척, 바쁜 척, 어쩌면 기쁜 척까지. 온갖 것들을 흉내 내며 ‘잘 지내고 있는 나’를 뽐내기에 여념이 없었기에 여행지에서만큼은 그런 것들로부터 자유롭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종종 여행에 대한 욕구가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끓어오르곤 한다. 주로 도피를 위한 여행이 필요할 때 그렇다.


이번 여행은 도피를 위한 여행에 가까웠다. 개강이 다가온다는 사실, 관계로부터 비롯된 수많은 스트레스, 그리고 또 여행지가 사무치게 그리웠던 나의 마음으로부터 도피하기 위한 선택.


그렇게 떠난 곳에서 좋은 사람들을 만났다. 좋은 사람들과 함께 여행하며 웃고 떠드는 동안, 애써 잊으려 했던 것들을 자연스레 잊게 되었다. 도피를 위한 여행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란 고작 그런 것들에 불과했다. 그러나 고작 그런 것들이라 할지라도 잊게 된 순간만큼은 그 모든 것들로부터 자유로웠다. 


그렇게 자유로움을 만끽하다 보면 이 여행이 끝난 후 다시 마주해야 할 것들을 버텨낼 수 있는 유예 기간이 조금씩 늘어나곤 했다. 여행의 끝에서 또다시 내가 잊고자 했던 것들을 마주하게 될지라도 당분간은 그것들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렇게 살다가 또다시 힘겹다는 생각이 들 때면 그때 다시 훌쩍 여행을 떠나면 될 일이었다. 내 여행이 가지는 의의가 오직 그것뿐이라 하더라도 충분히 좋은 것 아니겠느냔 생각이 들었다.


이어지던 생각에 끝이 찾아올 무렵, 우리의 이동에도 끝이 찾아오고 있었다. 온통 붉은색으로 가득 찬 바양 작에 도착한 것이었다. 유명한 관광지임을 알리듯 곳곳에 작은 좌판이 보이고 그 뒤에는 그것보다도 훨씬 작은 아이들이 서서 기념품을 팔고 있었다.


아이들은 기념품들을 하나하나 가리키며 자기가 직접 만든 것이라고 외쳐댔다. 고사리 같은 손을 꼼지락대며 낙타 인형의 털을 쓰다듬고, 양 인형의 머리를 정리하는 모습이 참 예뻤다. 그 모습이 인상 깊어 너희의 사진을 찍어 주어도 되겠느냐고 물으니 지금까지 본 것 중 가장 환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일이 흔하지 않은 일 중 하나였는지 이내 호기심 가득한 아이들의 시선이 모이고, 그 뒤에는 수줍어하는 아이들을 부추기는 어른들의 모습도 보였다.


폴라로이드 사진을 뽑아 아이에게 건네니 아이의 엄마가 무어라 말을 건다.


“어린 동생들이 있대요. 사진을 찍어줄 수 있겠냐는대?”



“오브 코스(Of course)” 하고 외치니 기다렸다는 듯 어디론가 가서 동생들을 줄줄이 데리고 돌아왔다. 내 가슴께에 올까 말까 한 아이가 자기보다 어린 막냇동생을 익숙하게 품에 안고 나오는 것이 사뭇 낯설었다.


그러나 함부로 동정하진 말아야 하겠다.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나이기에 더더욱, 그들의 삶을 동정할 자격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지금 이 순간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을 하자. 그렇게 속으로 되뇌며 아이들을 더 정성 들여 카메라에 담았다. 인화된 사진을 다시 아이들에게 건네주며 그들의 삶이 행복하기를 바랐다.


그리고 다시 바양 작. 하늘은 푸르렀고 땅은 붉었다. 바닥에 굴러다니는 저 돌덩어리가 사실 화석일지도 모른다는 우스갯소리를 나누며 한참을 걸었다. 어디로 빠지거나, 혹은 돌아갈 필요 없이 평탄하고 아름다운 곳이었다. 이렇게 불타오르는 곳 너머로 지는 태양을 바라보는 것도 무척이나 멋있을 것임에 틀림이 없다. 어쩌면 황량해 보일 수도 있는 장소이기에 아름다움보단 외로움을 먼저 느낄 수도 있겠지만, 그것조차도 언젠가는 다시 아름다운 순간으로 기억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바닥 이곳저곳엔 볼 만한 것들이 꽤 있었지만 이제 나는 이런 것들에 놀라워하진 않는다. 어쩌면 이제 뭐가 튀어나와도 놀라지 않을 수 있을 정도로 마음이 단련된 것일지도 모른다. 몽골에서의 여행이 5일 차에 접어든 날의 오후였다.


광활한 풍경, 아름다운 초원, 황량한 몽골의 모습까지. 많은 것을 보고 느끼다 보니 도마뱀 정도야 모기보다 조금 덜 성가신 정도의 존재로 밖에 여겨지지 않았다. 행여나 걷다 밟게 되진 않을까 노심초사하게 되는 것만 제외하면 별로 거슬리지 조차 않는 것들. 너 또한 몽골이겠거니, 그런 생각을 하며 도마뱀을 저 멀리 쫓아냈다. 빠르기를 보아하니 걷다가 나도 모르는 새 밟을 일은 없겠다 싶었다.



우리는 바양 작에서 꽤 많은 사진을 찍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찍는 것을 그만두고 풍경을 보거나 혹은 다른 곳으로 걷기만을 반복했는데, 비슷한 풍경의 연속인 이곳이 왠지 모르게 마음을 편안하게 해 줬기 때문이다. 어디를 봐도 불타는 듯 붉은 바위들의 향연이 질릴 것 같으면서도 질리지 않았다. 질리지 않다고 말하기엔 사방에 죄다 비슷한 풍경들이었지만 질린다고 말하기엔 그 풍경이 내가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광활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바닥에 주저앉아 멀리 보이는 절벽을 바라보았고, 또 그렇게 앉아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일행들이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나는 그들이 바라보는 절벽을 향해 걸어보았다. 그렇게 우리는 모두 각자의 방법대로 바양 작을 담았다.


다시 돌아가는 길, 나는 결국 나를 유혹해 오던 기념품들의 매력에 굴복했다. 반짝반짝 예쁘게 빛나던 돌멩이와 작은 낙타 열쇠고리를 구입했다. 참 한심한 소비가 아닐 수 없다고 외치는 이성 따위 저 멀리 날려버린 채 예쁜 게 남는 것이라고 외치는 본능의 손을 번쩍 들어준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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