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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다훈 Jul 17. 2023

선택과 책임

싶다-와 겠다-의 차이점

 나는 고양이를 좋아한다. 핸드폰에 수많은 사진을 저장해두기도 하고 길에서 보이는 고양이을 보면 괜히 안녕-하고 인사하거나 사진을 찍어둔다. SNS에서 보이는 많은 고양이 사진들은 나를 만족시켜 준다. 분명 바라는 것은 고양이를 키우고 싶다-라는 것이다. 하지만 고양이를 키워야겠다-라는 생각을 가진 적은 아직 한 번도 없다. 우연찮은 기회로 어릴 적 아기 고양이를 한 달 정도 집에 데리고 있었다. 정말 귀여웠고 사람 손도 잘 타는 아이였다. 어릴 때라서 고양이의 발톱에 할퀴어지거나 물릴까 싶어 두려워했던 것도 있지만 그것을 감내할 만큼 귀여운 것은 분명했다. 고사리 손이었던 내 두 손을 쫙 피면 가려질 정도로 자그마한 생명체가 삐약 삐약 하며 울고 고르릉 거리는 소리를 내는 것을 볼 때면 이렇게 귀여운 존재가 어떻게 있을까-싶은 것이다. 그리고 조금의 시간이 더 흘러 친구네 고양이를 잠시 맡은 적이 있었다. 이번엔 좀 큰 샴 고양이었는데 온순하고 애교도 많았다. 이전에 친구네에서 몇 번 본 적도 있어서 어렵지 않게 친해졌다. 그때부터 나는 나중에 커서 꼭 고양이를 키우겠다-라는 다짐을 했다.


 그러다 왜 갑자기 키운다는 결정은 내리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어린 시절에 내가 본 고양이 케어는 간단했다. 조금 놀아주고 밥과 물을 잘 챙겨주고 화장실을 치워주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했다. 고양이에게 관심이 생긴 후에 알아보면 알아볼수록 생각이 짧았다고 느낀다. 고양이뿐만 아니라 반려동물을 키우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은 기본적으로만 쳐도 수십 가지다. 기본적인 케어 외에 또 해야 할 일은 정서적인 교감이다. 결국 생명체임을 생각한다면 감정적인 교류가 필요한 것. 서로 언어적으로 소통은 할 수 없지만 지내다 보면 결국 서로의 행동에 대해 빅데이터가 쌓이고 이해할 수 있지 않은가. 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그 생명체에 대한 애정이다. 그리고 제일 중요한 것. 책임이다. 우리는 살아감에 있어 순간순간이 선택의 연속이라는 얘기를 듣는다. 그 선택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은 본인이다. 성장함에 따라 우리는 선택에 대한 책임의 크기가 늘어난다. 성인이 된 이후에 우리의 모든 선택은 그만한 사이즈의 책임을 동반해서 찾아온다. 그렇기에 우리는 생각을 해야 하며 신중히 말을 꺼내야 하고 그에 걸맞은 행동을 해내야 되고 그에 따라오는 책임을 져야 한다. 한 생명체를 데려온다는 결정을 하는 순간, 그 생명체와의 만남부터 이별까지 모든 것을 온전히 떠맡아야 한다는 것. 이는 단순히 식사메뉴를 고르는 것 정도의 책임과는 무게가 다르다. 한 생명체의 일생을 맡는다는 책임. 말로만 들어도 얼마나 무거운지. 나는 그 무게를 아직 견뎌낼 자신이 없다. 더군다나 그렇게 애정을 들여 나의 수많은 선택과 책임들로 키워온 시간들이 한순간 찾아올 이별에 지워지는 것이 두렵다. 그 아이가 나를 떠나가는 것도 내가 더 이상 곁에 있을 수 없는 것도 두렵다. 나는 아마 고양이를 키우지 못할지도 모른다. 도전하지 않은 것에 대한 두려움이 늘어가는 나날인데 감히 생명체를 맡아 책임을 지고 이별을 감내해 낼 자신은 더더욱 없다. 하지만 그렇기에 고양이를 키우고 싶을지도 모른다.


 나는 이런 류의 글을 쓸 때 책임이라는 말을 정말 많이 사용한다. 이전에 적었던 글 들에도 책임이라는 단어는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어릴 적부터 이 '책임'이라는 짐에 대해서 살짝의 강박이 있다. 성격적으로 완벽주의자라는 글을 적었던 적이 있는데 그곳에서 찾아볼 수 있듯이 모든 상황에서 완벽함을 위해서 내가 희생하는 것을 어렵게 생각하지 않는 편이다. 더군다나 내가 하는 일들에 있어서 지나치게 책임을 과하게 느껴 함부로 끝맺음을 내지 못하는 것도 잦다. 나는 책임을 지는 것이 두렵다기보다는 내 책임을 다하지 못하는 것이 두렵다. 내가 책임감이 높은 사람이라기보다는 스스로 책임 앞에 낮은 사람이 되어 내 본분을 다해내지 못한다면 들어올 자책을 마주하는 것이 두려운 것이다. 이런 내가 고양이를 키우는 것에 있어 해내지 못하는 일들에 느낄 책임의 상실감이 어느 정도일지 상상이 되지 않는다. 이러면서 나의 아이는 보고 싶다 생각하는 것이 이기적일지도-. 그럼에도 나는 고양이를 키울 것이라는 다짐을 해낼 것이다. 이 모든 책임을 질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드는 때에, 나는 이 생명을 온전히 책임져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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