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난다. 목적지는 모른다. 정처 없이 떠도는 여행, 결과는 중요치 않다. 지나가던 중 우연히 들른 곳에서 아름다운 풍경을 마주치는 것은 색다른 만족감을 가져온다. 바로 옆에 낮은 산인지 언덕인지 헷갈리는 것이 둘러싸고 있는 좁은 해안가. 여름이 다 가고 초가을이 된 탓에 바닷물이 차가워서 들어가는 이는 없다. 기껏해야 발이나 담그고 찰박거리며 물장구를 치는 사람 몇몇. 사람들이 걸어 다니며 재잘거리는 소리, 떠들고 웃으며 행복하다는 것을 표현하는 소리, 바닷물이 적당한 세기로 날아와 부딪히는 소리, 새들이 떠드는 소리, 그럼에도 나는 이 속에서 침묵을 느낀다. 모든 것이 나에게 하나의 풍경이 되어 귀가 아닌 눈으로 들어온다. 마치 이곳에서 해변에서 살짝 떨어진 곳에 서서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모든 것을 내려다보는 듯한 기분이 든다. 원래부터 존재하던 해변이 마치 내가 이곳에 옴으로서 만들어진 것 마냥.
침묵을 즐기던 도중 누군가 내가 신이 아니라는 듯, 세계를 뚫고 들어왔다. 갑작스레 자신의 사진을 찍어달라는 요청. 왜 굳이 자신의 일행에게 부탁하지 않고 멀리 떨어진 나에게 까지 와서 부탁하는가 싶어 주변을 둘러봤으나 이 여자도 나처럼 혼자 온 것 같았다. 그럼에도 나의 여행의 마무리에 잔잔함을 없애고 싶지 않아 사진을 잘 못 찍는다고 둘러 거절하려 애를 썼다. 하지만 해변과 좀 떨어진 이곳에 있는 사람은 나와 그 여자뿐인지라 여자는 딱 한 번만 부탁한다며 나의 침묵을 방해했고 어쩔 수 없이 빨리 보내기 위해서 부탁을 들어주었다. 잠시 세네 걸음 정도 뒤로 물러나서 아무런 포즈도 없이 그냥 어색하게 서있는 그녀는 그냥 열댓 장 아무렇게나 찍어달라고 말했다. 나는 사진에 여자가 잘 나오는 것보단 당장 화면에 갇힌 풍경들의 색다름에 매료되고 있었다. 분명 내 눈에 보이는 드넓은 해변에 비해 한없이 좁았으나 그 공간마다의 색다른 아름다움이 저장되고 있다. 사진을 다 찍고 돌려주었을 때 과연 여자가 만족할 수 있을까-싶을 정도로 피사체에 집중하지 않고 풍경을 만끽했으나 다행히 만족스러웠던 것인지 아니면 그냥 그러려니 하는 것인지 여자는 감사하단 인사와 나에게도 사진을 찍어줄까 했으나 거절했다.
좀 더 침묵을 즐기고 싶었으나 그 일 이후로 도통 집중이 되지 않아 집이란 목적지로 향했다. 목적지가 정해져 있어 설레지 않아도 집이란 곳이 주는 안정감은 상당한 것이다. 집에 가는 길, 마냥 조용히 가기보다는 내가 좋아하는 노래를 틀어놓고 흥얼거리며 분위기에 맞춰 핸들을 한 번씩 탁탁 치며 신나게 떠났다. 내 기억 속에 이 해변은 분명 아름다우나 다시 오기에는 침묵을 누리기 어려운 곳이란 생각에 한번 더 멈춰 서기는 힘들 것이다. 잊고 지내던 어느 날 오랜만에 맑은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그때 그녀를 찍어줄 때 봤던 화면 속의 풍경들이 눈에 아른거렸다. 그때 그녀가 베푸는 호의를 거절하지 말고 받아들였다면 사진에서나마 그날의 풍경을 확연히 떠올릴 수 있었을 것인데 아쉬움이 남았다. 목적지 없이 떠난 여행에서 다신 멈춰 설 일이 없을 것만 같던 곳은 이제 목적지가 되었다.
나는 떠났다. 다시 그곳의 풍경을 누리리란 생각으로. 혹여나 같은 사건이 찾아올까 하는 마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