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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다훈 Oct 23. 2023

이 글마저도 가면임을

거짓말

 오늘은 꾸밈없는 얘기를 하기 위해서 괜히 글 양식 설정도 하나도 만지지 않았다. 그래봐야 정렬의 차이일 뿐이지만 말이다. 얘기의 앞뒤도 평소보다 더 중구난방일 것이다. 오늘 하고 싶은 얘기가 가면이란 것에 대한 것이니까. 나는 나쁜 의미가 아닌 좋은(?) 의미로 주변에서 다중인격이란 소리를 많이 들었다. 평소에 생활할 때, 다 함께 놀 때, 혼자 작업을 할 때 나오는 생각과 면모가 너무 다르게 느껴져서 마치 다른 사람처럼 느껴진다고 하더라. 특히 즐겁게 노는 친구들은 내 글을 한 번씩 읽을 때마다 ‘어색하다.’ 혹은 ‘너 아닌 것 같다.’라는 반응을 들려주기도 했다. 그렇다면 이는 내 의도대로 흘러가는 것이다. 나는 매 순간 가면을 갈아 끼우며 연기하는 삶을 살고 있으니.


 최근에 가장 좋아했던 애니메이션이 있다. 얘기 자체의 흥미도와 감동도 괜찮지만 중간중간 나오는 대사의 속뜻이 마음에 들었다. 개중에 거짓말을 잘하는 것은 대중에게 사랑받을 줄 아는 것이라는 뜻을 담았던 내용과 불특정다수에게 노출이 되는 자신을 꼭 온전한 자신의 모습이 아닌 다른 모습을 연기해서 보여주는 것이 자신을 덜 상처 입히는 좋은 방법이라는 말에서 큰 동감이 일었다. 나는 내 온전한 모습이 무엇인지 헷갈릴 정도로 마주치는 모두에게 연기를 한다. 기분이 좋지 않아도 자리를 즐기는 척을 하며 몸상태가 안 좋아도 아무렇지 않은 척 분위기를 지키고 충분히 기분 나쁜 장난임에도 대수롭지 않게 받아치며 재미를 선사한다. 때로는 타인의 기분을 눈치채고 불안감을 안정감 있게 해 주기 위해 노력하며 옳지 않아 보이는 신념에 대놓고 반박하기도 하고 공감과 조언을 자유롭게 번갈아가며 타인의 선택지를 만들어주기 위해 노력한다. 이는 부모님에게도 마찬가지다. 부모님이 바라는 모습은 아닐지라도 나를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에 따라 그에 맞는 모습을 보여드리려고 하는 편이다. 타인의 행복에 슬픔에 공감하면서 자신의 감정은 내놓지 못하는 사람이 바로 나다. 뭐 딱히 알아주기를 바란다거나 굳이 이렇게 사는 것에 불편함을 느끼진 않는다. 이는 타인에게 호감적인 모습을 줌과 동시에 공격을 당할만한 약점은 내놓지 않는 것이다. 나는 나를 좋은 사람으로 포장하고 단단한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다. 내 고민과 힘듦은 스스로 삭여내고 이겨내는 것이 제일 효율적이라는 것을 너무 어릴 때 알아버렸다.


 때론 비난받는다. 솔직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 것에 대해서 묘한 벽이 느껴지게 하는 방어적인 모습에 대해 터놓을 생각이 없냐고. 그럴 때마다 속으로는 ‘굳이?’라는 생각이 먼저 든다. 사실 나는 가까이 있는 사람들을 굉장히 아끼지만 그와 동시에 가장 경계한다. 성 밖의 수만 명의 적보다 성 안의 열 명의 적이 더 무섭다. 나를 보다 더 알고 싶어 하는 깊이 모든 것을 나누고 싶어 하는 이들이 있을 수도 있으나 그들이 그만큼 나를 생각한다면 아마 그런 시도를 하지 않을 것이다. ‘이 친구는 저게 사는 방식이구나.’하고 이미 깊이 느꼈을 테니까. 타인의 모든 얘기를 궁금해해서 듣고 공감하고 위로하면서 자신을 얘기를 하지 않는 것에 서운함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스스로도 이것을 풀어놓는다면 서로 더욱 깊은 사이가 될 수 있겠지 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이내 혓바닥에 올라온 말을 삼켜낸다. 내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한 손에 꼽을 가장 가까운 친구들조차 나의 깊은 마음은 모두 알지 못한다. 단 한 번도 꺼낸 적이 없으니. 그렇지만 지금 당장 서로 함께 하는 것이 행복하다면 역시나 ‘굳이?’가 아닌가.


 지나치게 수비적인 모습으로 변한 데에는 어릴 때의 성격이 한몫을 했다. 지독한 말썽꾸러기였던 나는 타인과의 사이가 쉬이 좋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 그런 시기를 거치다 보니 자연스럽게 나를 숨기는 것이 사회성으로는 훨씬 좋다는 생각이 들었고 하나하나 숨기기 시작했더니 웬만한 자리에서 다 나를 좋아하기 시작했다. 그럴 수밖에. 원하는 모습으로 갈아 끼워서 받아주니까. 이 글을 쓰는 와중에도 다른 깊은 얘기를 쓰고 지우고를 반복하고 있다. 차마 꺼내놓기엔 스스로의 모습을 너무 많이 내놓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에 지우고 있다. 우리 집은 어릴 적부터 다른 것은 무엇이든 용서가 가능했지만 거짓말만큼은 허용되지 않았다. 하나의 거짓말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서는 오백가지 이상의 거짓말이 필요하다며 이를 지켜내지 못할 것이라면 시도조차 하지 말라고 하셨다. 나는 거짓말을 천 번을 해도 들키지 않을 정도의 연기를 시작했다. 이 정도면 나는 거짓으로 이루어진 삶이 현실에 있는 것이니 어떻게 보면 진실일 수도 있지 않을까.


 가끔씩 너무 지치거나 힘든 날 타인의 감정이나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내 솔직함을 들어낼 때가 있다. 그럴 때면 논쟁이 생기거나 조금 속이 상하는 듯한 대화가 오갈 때도 있다. 나는 또다시 가면을 써서 그런 것이 아니라 ~~ 한 것이다-라는 말을 해서 타인의 속상한 부분을 정확히 짚어주고 나의 얘기를 지어내 해결한다. 분명 이런 내 대화방식을 눈치채는 이들도 있을 테지만 그들이 함부로 이를 지적하지는 않는다. 이런 대화에서 내 의도는 나쁜 것이 전혀 아닌 것만큼은 확실하기 때문에. 친구들과의 대화에서 주로 공격수로 보이는 성향의 대화패턴을 가지고 있지만 분명 나는 굉장히 수비적이다. 방패를 너무 잘 쓰는 나머지 공격적으로 보인다고 생각이 드는 것이다. 아마 대부분 이 방패를 부숴버리고 싶다고 생각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이 글을 쓰는 와중에도 친한 카페 사장님과의 대화에서 가면을 쓰고 있었다. 별로 좋아하지 않는 농에도 재밌다는 듯이 받아주며 되받아주기까지 하면서 재미를 이끌어 낸다. 나는 재밌지 않음에도. 언젠가 그런 사람이 생기기를 바라기도 한다. 정말 완전 순수한, 단 하나의 거짓도 존재하지 않는 나 자신을 모두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이 생겨나기를. 이는 친한 친구들 중에서는 절대로 나오지 않을 것이다. 차라리 새로운 사람이 그럴 수 있지 않을까. 이미 내 주변에는 내 거짓을 진실로 믿는 것이 한 개 이상씩은 있는 사람들뿐이다. 세상 모든 사람들은 무조건 자신만의 가면을 쓰고 산다. 나는 그 가면이 상당히 많은 것뿐이며 타인의 가면 너머를 보는 것을 즐길 뿐이다. 마치 경극처럼 내 가면 너머를 보아도 다시 보이는 것은 가면일 뿐인지라 타인은 내 가면 너머를 알지 못할 테지만 그 또한 나를 위한 것이다.


 나조차 내가 답답하다. 무엇이 그렇게 두려워서, 거짓 없는 모습을 들어내지 못하고 사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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