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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다훈 Dec 28. 2023

권태라는 신호

 평소와 똑같은 연락이었다. 아무렇지 않게 피곤하지 않느냐, 일 마치고 볼 수 있느냐. 원래라면 설레었을 것이다.


 아, 오늘이구나. 그럴 때가 있다. 말로 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무언가. 아마 우리는 오늘 이별을 할 것이다.


 아무렇지 않다. 오히려 굳이 만난다는 것이 불편할지도. 그냥 아무것도 모르는 척 답했다. 오늘의 만남에.


 연애를 시작하기 전의 나는 어떤 사람이었는가. 너의 연락 하나하나에 행복과 슬픔을 오고 가던 하찮은 사람이었을 뿐이다. 그런 너의 선택은 나에게 신의 은총과 같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어떤 상태여도 곧장 뛰쳐나가서 너를 보기 위해서, 너의 바람을 이뤄주기 위해서 무엇이든 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때의 넌 내 인생이었으니까.


 시간이 흘렀다. 너와 연애를 한다는 사실이 현실로 느껴질 때쯤이었다. 아직도 마냥 좋았다.


 이전처럼 너와 함께하는 모든 순간이 나를 선택받은 사람처럼 만들어주진 않았지만 남들 부럽지 않은 삶을 살아가고 너와의 만남, 약속, 대화가 매번 나에게 행복을 가져온다는 것은 분명했다.


 그래서 쉽게 말했다. 이건 사랑이라고.


 다투는 일이 생겼다. 너와 연애를 하는 동안에 처음으로 다툼이 생겼다. 그동안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고 헤아리며 맞추어가는 줄 알았던 우리는 속으로 참는 중이었다.


 쌓이고 쌓였던 것이 풀렸을 때 좋은 결과를 바라기란 쉽지 않았다. 이미 넘쳐흘러서 쏟아지는 감정의 파도에 실려가는데 그곳에서 중심을 잡아 너를 붙잡기란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서로의 사랑을 의심하지 않았기에 아직까지는 서로를 붙잡았다.


 그때부터였을까. 조금씩 서로의 모르는 점이 생겨났다. 괜히 '굳이'라는 말을 덧붙이는 상황이 늘었다. 너의 모든 것이 행복이라 말하던 나는 이제 너의 모든 것이 불편해졌다.


 너 없는 일상이 소중해졌다. 그렇다고 해서 너에게 거짓된 마음으로 다가서고 있지는 않다. 아마 너도 그러리라 믿고 있었다. 사실은 믿지 못했지만.


 이상하지. 분명 최근에 아무런 일도 없었다. 우리의 사랑에 문제들이 여럿 찾아왔던 것을 둘이서 힘을 합쳐 잘 무찌르고 나아왔다고 생각했다.


 헌데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너와의 만남에 설렘 따위는 기대도 되지 않고 행복도 바라기 어려웠다. 처음과 같은 설렘을 감정을 바라지는 않지만 정말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것을 사랑이라 말할 수 있는가.


 너의 연락에 훈련된 개처럼 달려들던 나는 찾을 수 없다. 네가 다가서려고 해도 멀어지는 내가 보인다. 너도 그랬을 것이다. 서로 다가가는 것을 멈췄고 다른 곳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그런 시간은 지나면 지날수록 내 현실에서 네 파이를 줄여나가기 시작했다.


 나는 느꼈다. 오늘의 만남에 대한 너의 질문이 가진 의미를. 그래서 말한 것이다. 오늘은 우리가 헤어질 날이라고.


 사랑했단 마음을 부정할 생각도 없고 지금도 너를 사랑하느냔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할 용기는 있다. 하지만 네 앞에서 너에게 사랑을 속삭일 자격은 없다.


 너는 나에게 사랑이란 감정이 있었는지 의심하겠지. 나도 그러하였듯이. 그래서 끝끝내 마지막을 뱉으며 나를 잡아달라고 청하겠지.


 하지만 나는 잡지 않을 것이다. 사랑했기에 헤어진다. 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스스로 실천하게 되었다.


 서로의 사랑이 아픔만 가져온다면 떠나가 새로움을 찾는 것이 더더욱 사랑하는 마음이라 생각했다. 고작 이런 변명으로 도망칠 핑계를 대고 있다.


 드디어 네 입에서 그 소리가 나온다. 나는 치사하다. 끝끝내 먼저 뱉어주지 않고 너의 말을 기다리고 있다. 이미 모든 결과를 알고 있으면서도 전개에서 빠져서 책임을 회피하려 든다.


 너는 불쌍한 애가 되었고 나는 나쁜 놈이 되었다. 오히려 다행이다. 연약한 네가 주변에서 손가락질을 받는 것보다는 위로받으며 눈물을 흘리는 것이 마음이 편하다. 그 편이 잊기도 더욱 쉬울 줄 알았다.


 내 감정 따위는 상관없었다. 아니 어차피 남아있지 않은 듯했다. 헤어진 다음 날, 이 모든 것을 실감하기 위해서 곧장 너와 있었던 흔적들을 모조리 지웠다.


 그 과정에서 망설임은 하나도 없었다. 나를 떠나가는 네가 좋다. 네가 때어진 내가 좋다. 서로를 잊자. 가슴속에도 묻어두지 말자.


 우리의 시간은 잠시 선택을 받았던 시기로 거슬러 올라갈 뿐이다. 우리가 사랑했단 얘기가 남지 않는 세상으로 떠나갈 뿐이다.


 너를 떠나보낸 것은 내 선택이고 나를 떠나가는 것은 네 선택이다. 무엇이 후회되고 망설여지는가. 우리는 사랑이란 이름을 달고 살아왔고 그 이름을 지울 용기를 냈을 뿐이다.


 그래, 분명 나는 아직 너를 사랑한다. 아마 너도 그러할 것이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우리의 사이에 생긴 것은 사랑이란 발돋움으로 뛰어넘기에는 너무 높아져버렸는데.


 그저 그 뒤에 아무런 세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으로 애써 외면할 수 밖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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