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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다훈 Jan 11. 2024

잃어버렸다, 사랑을.

 손 하나 녹일 온기조차 찾아볼 수 없는 추운 날, 둘러본 이곳은 메마른 대지. 이곳에 콩을 심는다 한들 그것이 자라날 리 만무하다.

 

 따뜻했다. 햇살은 충분했고 땅도 촉촉했다. 무엇을 심어도 잘 자라나서 금세 전역을 뒤덮을 정도로 풍요로웠고 드넓어서 어떤 것이든 할 수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가. 분명 해는 남아있다. 하지만 따스함은 느끼지 못한다. 분명 물은 남아있다. 하지만 갈증을 해결해주진 못한다.


 아직까지 비옥함이 틀림없어 보인다. 이 땅에 남아있는 가능성과 발전은 무궁무진하다. 무엇이던 심고 키워서 얻어낼 수 있다.


 하지만 땅이 받아들이지 못한다. 이 땅은 스스로를 죽였다. 들어오는 씨앗을 뱉어내며 비추는 햇빛을 피하고 뿌리는 물을 마시지 않는다.


 아무것도 믿지 못한다.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무엇이던 그 속에 독을 품고 있고 겉과 다른 속을 가지고 있다 생각한다.


 이는 따스함이라 믿었던 빛에서 간사함을 봤음이요 정이라 믿었던 물에서 비웃음을 들었음이요 소망이라 믿었던 씨앗에서 절망을 맛보았음이다.


 우리가 잃어가는 것은 무엇인가. 끝없이 먹고 자라기 위해 부모의 사랑을 양분으로 삼는다. 그 보호란 태양처럼 영원하리라 믿음을 주는 거대함. 하지만 다가서면 다가설수록 작아지고 약해지는 고작 횃불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이를 언제까지고 받아낼 수 있으랴. 그들의 손과 발은 이미 얼어붙은 체로 나에게 모든 불씨를 내놓는다. 그 모습이 싫어 부모의 속을 빠져나온다. 벗어날 수 없음을 알고 있음에도.


 그래서 다른 사람들을 찾는다. 그래 이들이라면 나의 갈증을 해결해 줄 수 있으리라 믿고 보호를 받는 것이 아닌 동등한 위치에서 서로를 보듬어 주고 함께 시간에 몸을 뉘어 모든 것을 경험한다. 허나 개중에 썩은 물이 어떻게 단 한 방울도 섞이지 않으랴. 나에게 상처 주고 악함을 물들이는 이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점점 사람을 멀리하기 시작한다. 결국에 믿을 것은 나뿐이라고.


 그래서 노력한다. 자신의 재능을 꽃피워내어 얻어내는 부와 명예만큼은 나를 배신하지 않고 평생 곁에 남아주리라 믿고 본인을 주인공이라 생각하며 열심히 키워낸다. 그 속에 담긴 것은 무엇인가. 더욱더 크게 자라는 주변의 나무와 훨씬 달고 맛있는 과일을 맺는 타인의 모습에 자신의 나무가 한없이 초라해 보일 뿐이다. 대체 언제 자라나는 것인지 견디지 못한다. 그렇게 관리하기를 포기한 나무가 수십 그루, 더 이상은 크고 아름다운 나무도 맛있고 빛 좋은 과일도 원하지 않는다. 그저 몸을 기댈 수 있을 정도만을 바랄 뿐. 더 이상 씨앗의 종류는 의미가 없다.


 삶이 선택의 연속이라 한다. 선택은 무엇인가. 둘 중 하나를 얻기 위한 택인가? 아니다. 둘 중 하나를 버리기 위한 택이다. 우리는 둘 다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허나 세상은 시간이 지날수록 나에게 둘 다 가지지 못했음을 알려주며 개중에 하나라도 붙잡고 살아가보라 떠민다.


 그렇게 모든 것을 잃는다. 사랑은 어떠한가.


 남아있는 돈과 명예가 없다면 어떻게 아름답고 행복한 삶을 꿈꾸며 타인과 함께하는 여생을 바라겠는가. 또한 절대 자신에게 맞는 아름답고 속이 깊은 사람을 만날 수 없는 세상에 놓아져 있으며 그 선택에서 혼자 있는 삶을 포기하기란 쉽지 않은 것이다.


 사랑의 힘이란 단어 따위로 이 모든 현실을 무시할 수 있는가. 사랑한다면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한다면 되게 해야 하는 것이다. 헌데 이미 수많은 것을 잃고 주저앉아 딱딱한 땅에서 앙상한 나무에 기대어 있는 나에게 진심으로 다가와주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다가온다 한들 어떻게 믿겠는가.


 지나온 삶의 시간에서 쌓여온 것은 불신과 아픔이다. 이미 겪어보았다.


 사랑한 사람을 만나서 바라던 이상형과 다른 모습에 실망하고 변하는 감정에 배신감을 느끼고 헤어지는 아픔에 견디지 못할 것 같은 시간을 보내던 것을. 함께한다는 것이 꼭 행복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수십 번 느낀다.


 우리가 잃은 것은 단순히 사랑이겠는가. 이제 곧 또다시 선택을 해야 할 것이다. 어떤 것을 포기해야 할 것인지. 삶이란 그런 것이니까.


 사랑을 단순히 득과 실 따위로 나눌 수 있겠는가. 분명 그러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어느샌가부터 사랑을 저울에 올려놓는다. 현실이라는 말 따위로 이 행동을 정당화하면서 자신이 타당한 요구를 한다고 생각한다. 나에게 도움이 되고 득이 되는 것만을 바라는 것이 언제부터 사랑이었는가.


 우리가 사랑에서 잃는, 실이 되는 것은 무엇인가. 시간을 잃는다, 돈을 잃는다, 나아가 자신을 잃는다. 이 세 가지는 어느 하나를 택하게 해주지 않는다. 서로의 꼬리를 물고 번갈아가며 자연스레 모든 것을 잃게 만든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자신의 시간을 쓰고, 그 시간 속에서 자신의 돈을 쓰며 그러다 자신은 없고 그 사람만을 위한 것이 생겨난다. 이 마음이 커지면 커질수록 더욱 많은 시간을, 돈을, 자신을 소비하게 된다.


 그럼 대체 어떤 득이 있길래 이런 실을 감안하고 모두는 사랑을 하는가. 사랑하는 사람의 존재가 가져오는 안정감, 그 사람과의 정서적 교감, 무한한 믿음, 이 모든 것은 사랑이라 부르기 충분한 것이다. 이는 분명 사랑에 자연스레 따라오는 것이 아니다. 당연시 여기게 되는 것들이 내 삶에 가져오는 영향은 굉장하다. 이를 잃었을 때의 상실감이 큰 것은 자신을 직접적으로 행복하게 하지 않더라도 그 행복을 지탱해 주는 바가 분명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헌데, 과연 이것들을 사랑에서 나오는 득과 실이라 말할 수 있는가?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이 동일한 것인가? 우리가 사랑을 시작하기 위해 재는 수많은 조건들은 사랑에 대한 조건인가 사랑하는 대상에 대한 조건인가. 여기서 새어 나오는 것이 사랑이라면 과연 득과 실을 결정하는 것은 사람인가 사랑인가.


 아직 목마를 것이다. 자신을 사랑해 주는 사람을 만나고 싶은 마음과 자신이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나고 싶은 마음이 깊이 공존할 것이다. 그럼에도 쉽게 사랑을 시도하지 못한다. 자신이 내세우는 조건들에 충족하는 사람을 찾지 못해서, 자신이 내세워진 조건들에 충족하는 사람이 되지 못해서. 이런저런 생각으로 놓아버릴 이유를 찾고 의미를 지운다. 이렇게 지나온 세월이 묻어난 생각은 사랑을 지워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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