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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침소리

by 정다훈

어릴 적에나 들어보았던 아날로그시계의 초침 소리가 들려온다. 째깍째깍 울려 퍼지는 소리로 시간의 흐름이 몸소 느껴지는 순간. 정말 단 한순간도 쉬지 못하는 초침. 시침과 분침의 나태함이 질투 나지는 않을까.


흘러가는 시간은 매초마다 새로운 상황을 맞이하게 한다. 방금 전의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지만 시계와 눈이 마주치고 초침의 소리가 신경 쓰이기 시작한 지금은 저 소리가 너무도 신경 쓰인다. 어느 순간부터 천 원은 세지도 않고 만원이 작은 돈이 되어버린 것처럼 1분은 세지도 않고 1시간이 작은 시간이 되어버렸다. 지나온 작은 것들이 쌓이면 쌓일수록 그 속의 조각은 신경 쓰지 않게 되어버렸다.


숨 쉬는 한 멈추지 않고 영원히 흘러가는 일생의 타임라인 속에서 멈춰지는 순간이 있다. 분명히 초침은 열심히 일을 하고 있지만 그와 다르게 내 인생이 멈춰버리는 순간. 시간의 지속과는 달리 인생은 멈춰버린 듯한 기분이 드는 그 일순간, 인스턴트는 쌓여오던 것들이 무너져서가 아니라 쌓여온 것을 들여본 때에 찾아온다.


그저 오르막길이라고 생각했던 일생이 힘들지 않았던 이유는 가파름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오르고 오르다 한순간 느껴진 경사와 그 앞에 보이지 않는 고난이 주저앉게 만들고 다시금 뒤를 보게 만든다. 올라온 만큼 보이는 경치와 지나온 시간이 보람차게도 느껴지지만 정말 매 순간 의미 있었을까.


그동안 살아오면서 숨길 수밖에 없었던 것들이 잠시 주저앉은 때에 모조리 찾아오기 시작한다. 앞의 오르막을 오를 때는 나를 따라오지 못하던 것들이 기회를 노린 것 마냥 한 순간에 달려든다. 숨겨왔던 감정들이 떠오른다. 타인에게 솔직하지 못하고 사회적으로 감추어야 하는, 스스로를 컨트롤해야만 했던 시간에 감춰뒀던 감정들이 한 개씩 나를 덮쳐온다. 그 감정들이 물밀려 올 때면 항상 끊어졌던 관계가 떠오른다. 그때의 잘못이 혹은 받지 못한 사과가 분노와 슬픔을 일으키며 지금의 내게 주어진 관계에 새로운 긴장감을 넣는다. 항상 흐르기만 했던 시간 속에서 주고받아야 하는 관계에 나는 묵음을 택한다. 그리고 하염없이 반응을 기다린다. 이 관계가 단순하지 않기를 바라며, 나의 의미가 분명 타인에게도 존재할거란 기대감으로. 그런 기대감은 곧이어 후회와 자책으로 바뀌어 스스로를 성찰시킨다. 아마 이 순간이 지금까지 올라온 길에 새로운 의미를 불여 넣어줄 것이란 생각으로.


지금까지 올라온 길이 제일 가파를 수도 있을 것이고 제일 완만했을지도 모른다. 잠깐 멈춰 선 지금이 완전한 평지인지 나의 최저점인지 최고점인지도 모른다. 그저 길고 긴 길에서 잠시 앉은 김에 보이는 지나온 길을 보고 감상에 빠져 추억하는 것일지, 그동안 달려옴에 지쳐서 쓰러지자 앞으로 다시 달려갈 의미를 과거에 찾는지.


이 주저앉음은 초침의 소리를 꺼버렸다. 침묵. 나는 바람에, 어둠에, 강한 불에, 깊은 산속에 파묻혀있다. 이 인스턴가 정말 인생에서 일순간에 불과할지라도 현실에 쳐해 있는 지금, 멈춰버린 흐름에 혹시나 영원토록 이 순간이 유지되는 것은 아닐지 하는 두려움이 찾아온다. 내 삶의 모든 것은 암흑이었다. 그럼에도 계속해서 걸어왔던 것은 미래에 분명한 빛이 있으리란 기대감 때문. 어느 정도의 과거에서 시작된지 모를 이 침묵의 암흑이 어느 정도의 미래까지 지속될지 의문을 품게 된 순간, 나는 멈춰버린 것이다.


사람들은 각자의 어둠을 품에 안은 체로 째깍 소리에 몸을 맡긴다. 결국에는 멈춰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조차 흘러가버리는 시간의 지속성은 절대적이다. 그렇기에 다들 숨기는 것이 늘어간다. 늘면 늘수록 더욱더 많이 깨달아야 할 터인데 모르는 것만 늘어난다. 앞의 어둠이 두려워지는 순간 우리는 뒤의 빛을 보고 걷기도 하는 것이다.


가장 빛나는 별은 스스로를 더욱더 강하게 태워서 빛나게 만든다. 오르막길을 오르는 동안 헛되지 않게 이것저것 주워모은 것들을 애써 태워가며 앞을 나아갈 빛을 만들어보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지나간 사람들의 이정표가 하나 둘 보이기 시작한다. 평생 보지 못할 이정표의 개수가 보이는 것의 수억 배는 되겠지만 분명한 건 나는 나의 이정표를 하나 남길 거라는 것.


오름이 있으면 내림도 있으나 그 변화의 순간은 정말 엄청난 침묵이 찾아온다. 이 순간에 오늘의 아침을 뭘로 할 지하는 고민도 내 인생을 바꿔놓을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하면 또다시 째깍 거리는 매초가 신경 쓰이기 시작한다.


등락이 보이는 시기보다 횡보하는 시기가 긴 것은 당연하다. 나의 나아감은 시간의 흐름을 신경 쓸 수 없게 만들고 나의 쓰러짐은 시간 따위는 생각지 못하게 만든다. 허나 횡보의 순간은 매 순간이 일생일대의 타이밍과 같다. 오르막과 내리막보다 평지가 힘들다. 길면 길수록 더욱더.


변화가 필요하다. 인스턴트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그 계기가 무엇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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