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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엽

by 정다훈

삭막한 아스팔트 위에 색깔이 입혀지는 계절, 가을이 왔다. 사브작, 한걸음. 사브작, 한걸음. 사브작 사브작. 정확하게 어떤 길인지 보이지도 않는 이 도로를, 괜히 낙엽을 즈려밟으며 걷는다. 처음에는 바스라지는 느낌이 좋아서, 그러다 왠지 불편하고 짜증 남에 강하게, 그러다 아무렇지 않게 한 발 한 발.


늦은 새벽과 이른 새벽 그 사이의 언저리에 집에서 나왔다. 이제 이 시간에는 한기가 맴돌아 숨을 크게 들이쉬기 두려울 정도의 공기로 가득 차 있다. 지금부터 해가 뜨기 시작해서 날을 밝혀오던 것이 불과 일 이주 전인데 아직까지 해는 옅은 빛만 보내주고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예전에는 이쯤 선선하다는 표현을 썼던 것 같은데 이제는 쌀랑한 느낌이 들어 또 하나의 계절이 사라졌다는 생각이 든다.


긴 시간 반팔을 입고 다니다 보니 두터운 옷을 입는 것이 불편해져서 끽해봐야 얇은 면티 위에 맨투맨을 하나 입고 나왔었다. 그리고 집에서 나와 밖으로 나온 순간 후회했다. 얇은 외투라도 하나 챙겨 올걸-하고. 그럼에도 걸음걸음에 더욱더 생기가 느껴진다. 제 역할을 다해 나무에서 떨어져 죽어버린 낙엽을 밟으면서 나의 생명력을 느낀다. 그래, 너희는 이제 죽었지만 난 살았기에 움직인다.


아름다운 사계절이 존재하던 나라는 이제 없다. 고작해야 일, 이주일 정도 유지되는 가을 날씨에 모두들 급하게 트렌치코트를 꺼내 입는 것이 밈이 된 지 오래다. 이 짧은 계절에 담겨 있던 가장 깊은 것은 감성이다. 사실 날씨와 온도의 변화는 사람의 심리에 큰 영향을 끼친다. 고작해야 하루 이틀 햇빛을 못 봐도 사람은 우울감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환경의 변화에 민감하다. 그럼 이 짙은 감성의 계절이 사라지자 사람들은 어떤 변화를 가졌는가. '여유, 낭만, 안정, 안주, 감성' 따위는 나약한 자들의 변명에 불과해졌다.


엄청난 수의 제철 음식들과 일 년의 수확물이 가장 활발히 나오는 이 시기, 천고마비의 계절은 여유가 넘치기에 사람들은 책도 읽고 산책을 하며 안정적인 삶을 즐긴다. 그리고 나아가 이 시기의 만족감에 안주하고 좀 더 본인의 삶을 매력적으로 만들기 위해 감성을 찾는다. 그렇게 감성을 찾기 위해 시작한 자신만의 모험은 언제나 낭만이 가득하다. 가을이 가져다주는 이런 감정들은 우리의 삶에 굉장한 영향을 끼친다. 알게 모르게 우리는 여름에 쌓여왔던 스트레스를 가을이 해소해 주는 시간의 흐름에 모든 것을 맡겨도 괜찮은 삶을 살아온 것이다.


이제 가을은 고작해야 더위에서 추위로 넘어가는 골목에 잠시 두터운 옷들과 포근한 이부자리를 준비할 시간을 주는 유예기간이다. 우리가 더위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다 잊어내기도 전에 추위는 사람을 생존에 맞닥뜨리게 한다. 생존에 관한 압박-이거는 생명체에게 굉장한 압박으로 다가온다. 나는 이미 각종 위기에 몰려서 살아가고 있었다. 날씨 따위에 신경 쓰지 않게 되었던 것은 아마 그때부터일 것이다. 시간과 날짜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오늘도 벼랑에서 떨어지지 않았다는 것, 매일매일이 생존을 위한 치킨게임이 되어버렸다는 것은 앞보다 뒤를 보게 만드는 법이다.


그래서 그런가 보다. 정말 짙은 새벽에 나와서 길을 치워주시는 환경미화원분들이나 그보다 조금 늦게 나와 앞을 쓸어놓는 여럿 분들이 모아놓은 낙엽더미를 정말 잘근잘근 밟았다. 나는 아직 살았다고, 어떻게든 살 것이라고 외치듯이 이미 꺼져버린 생명에게 한탄하고 있었다. 신발을 신고 있음에도 낙엽이 만들어내는 어색한 바닥의 감촉이 더욱더 흥분하게 만든다. 잠시 숨을 고르기 위해 옆의 벤치에 앉아서도 발은 가만히 있지 못하고 애꿎은 낙엽을 차고 있었다.


산책로에 접어들자 정해진 길 가변으로 낙엽들이 새로운 길을 만들었다. 무슨 생각이었는지 신발과 양말을 모두 벗고 양손에 든 체로 무작정 낙엽 위를 걸었다. 어떤 벌레가 있을지, 어떤 날카로운 물건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갑자기 그냥 그러고 싶었다. 낙엽이 많아서일까, 아까의 사브작 하던 소리와 달리 정말 바스라지는 소리가 났다. 한 걸음을 걸을 때마다 바사사삭 하는 소리가 울렸고 내 발은 지금 엄청난 파괴자가 되었다.


5분여를 걸었을 무렵 내디딘 발에서 따가운 느낌이 들었고 발바닥에 작은 나뭇가지에 긁힌 상처가 있었다. 붉은 단풍이 색이 빠져 바래졌는데 다시금 물들이기 위해서 나의 피를 가져가는 듯하다. 그래도 이내 더 걸을까 하다가 갑자기 몰려오는 공포감에 주변의 화장실에 가서 발을 닦고 다시 양말과 신발을 신었다. 충분히 느꼈던 것인지 아니면 꺼져가는 생명에 대해서 존중이 혹은 그 무서움이 나를 덮친 것인지 갑자기 원래의 삶으로 돌아갔다.


집으로 향하는 길, 이제 정말 해가 떠오르고 있다. 무언가를 밟고 지나가기에는 수많은 시선이 쏘아붙일 시간이 되었기에 더 이상 정해진 길에서 벗어나 꺼져버린 생명을 짓밟는 행동을 당당히 하기 어렵다. 다시금 길에서 벗어나지 않고 정도를 걸었다. 그렇게 돌아가는 중이다. 날씨의 변화 따위는 신경 쓰지 않을 수 있는 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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