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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

by 정다훈

아픈 시간은 사라지지 않고 흉터가 되어 환상통을 불러온다.


잘난 구석은 없지만 그만큼 모난 부분도 없어서 마냥 둥글게 지내던 것이 우리 관계였다. 그렇기에 서로 이 이상도 바라지 않고 큰 노력을 기울일 필요도 없었다.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남자로서 여자의 더 큰 행복을 일으켜주지 못한 것이, 여자로서 남자의 더 큰 용기를 불어주지 않은 것이 죄라면 우리는 용서받을 수 없는 사랑을 했다.


싸울 일이라곤 거의 찾아볼 수 없었던 우리였지만 나에겐 정말 손에 꼽을 만큼의 안 좋은 기억들이 있다. 오랜만에 잡은 데이트 약속에 내가 설레서 한 번 제대로 보내보잔 생각으로 코스를 짜봤다. 평소에 그냥 할 때에는 별다른 실수가 없다가 제대로 해보려고 하면 나를 놀리듯이 뭔가가 어긋난다. 일찍 일어나 준비를 하고 옷도 전 날에 맞춰둔 깔끔한 복장으로 출발한 데이트, 갑작스러운 지하철의 연착으로 약속에 늦고 생각보다 너무 많은 사람이 몰려서 입장에 1시간이 걸린 전시회를 지나 예약해 둔 레스토랑으로 갔을 땐 다른 날짜에 예약, 해가 떨어져서 어두워진 거리에서 우리는 다툼이 일었다. 하루에 제대로 된 일이 하나 없었던 터라 서로 설레던 마음을 충족시키지 못해 예민하고 화가 났다. 처음에는 나를 위로하던 너도 쌓이던 게 있었는지 툴툴거리는 나에게 불만을 토로했다. 그렇게 오가던 언쟁도중 나의 노력을 몰라준 너에게 서운했고 너는 안 좋은 일이 있더라도 자신을 소중히 대해주지 않은 것에 짜증이 났나 보다. 그러다 뱉은 너의 말 한마디. "날 사랑하긴 해?"


어떤 말들보다 제일 그 말이 기억에 남았던 것은 왜일까. 내가 부족했던 걸까. 아니, 나만 부족했던 걸까. 내 노력을 알고 있음에도 이렇게 말하는 건 나의 자존심을 건들고 싶었던 걸까. 이런 상황에서도 부딪히는 것이 싫어서 혹여나 내가 더 큰 문제를 만들진 않을까 싶어서 사과했다. 내 아무렇지 않은 사과에 맥이 빠진 듯한 너는 그냥 집으로 돌아가버렸다. 이날 너와 싸움을 하지 않은 내 선택이 우리의 관계에서 제일 후회되는 일이 될 줄은 몰랐다.


평범한 연인마냥 서로의 사소한 부분에 미소 짓고 행복해하며 함께 울고 웃어주는 것이 그렇게 어려웠던 걸까. 고작해야 이런 게 전부였던 연애기간이 너무 질려버린 걸까. 발전을 바라지 않았음에도 진전 없는 관계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는 것은 어떤 심정이었을까. 그런 마음을 또다시 모르고 그저 숙이고 있던 내게 준 마지막 기억이 고작해야 바람이라는 결론이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엔 모든 것이 내 문제인 줄 알았다.


그렇게 후회하고 후회하는 시간이 쌓이면 쌓일수록 바람핀 너가 아니라 당한 내가 못난 놈이 되어버렸다. 너는 여전히 그때의 미소를 간직한 채로 다른 사람 앞에서 밝게 지내는데 그런 일을 당한 나는 울분에 못 이겨 쓰러져 있었다. 이런 나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 주는 사람이야 있었다마는 스스로 그 손을 잡을 용기가, 마음이 생기지 않아서 계속해서 숨어 들어가고 있었다.


이렇게 깊은 심연에 빠지게 된 이유가 오직 나에게 아픔을 준 너 때문일까-하는 생각을 해봤다. 너는 신경도 쓰지 않는데 혼자 이렇게 아픔에 빠져 있다면은 이건 내 탓이 아닐까. 이런 생각이 드는 순간 시선이 달라졌다. 단순히 너가 잘못했음을 떠나서 내가 잘못했음을 떠나서 이 관계의 종지부에 일어났던 일은 분명 너의 죄였고 그 과정이 일어나게 됐던 것은 나와 너의 서투름이었다. 선뜻 먼저 나서지 못한 것은 죄스러웠으나 이 그릇된 끝맺음으로 모든 죄를 지어야 하는 것은 너였다. 그런데 왜 내가 아파야 하는가.


나는 이때부터 나를 용서하기 시작했다. 그저 서툴렀을 뿐이라고 내가 잘못한 것이 없지는 않으나 스스로 주저앉을 만큼 큰 죄를 짓지는 않았기에 떳떳해도 된다고. 그저 앞으로 만나게 될 인연들에게 더 잘할 수 있는 가짐과 스스로를 아끼는 마음을 얻었을 뿐이다. 그러고 나서 너를 용서하기 시작했다. 나를 그렇게 까지 떠나고 싶었던 너의 심정을 이해하려 노력했고 그 끝의 방식이 잘못되었더라도 스스로의 사랑을 찾아 떠난 것이라 믿으며 내 기억에서 너의 죄도 지워갔다. 그렇게 나는 심연에서 빠져나왔다.


오랜만에 온 연락에서 느꼈다. 내가 빠져나온 심연을 이제서야 들어갔다는 것을. 너는 그 심연을 빠져나올 방법을 스스로 찾지 못해서 나에게서 찾으려 이렇게 비겁하게 도망친 것이다. 나는 너의 절절한 말에 흔들리지 않았다. 떠나간 너가 원망스러워서도 아니고 나를 이해 못 해준 게 미워서도 아니다. 그저 지나간 인연, 이제 나에게 사랑이란 단어로 생각할 수 없는 사람이 되었을 뿐이다. 너도 언젠가 깨닫겠지.


나는 너를 용서함으로써 나를 구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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