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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다훈 Oct 27. 2022

나는 어머니를 미워할 수 없음이 밉다

말의 의미

어린 시절 어머니의 소원이 10분 정도만 조용히 해주는 것일 정도로 필자는 어린 시절 정말 말이 많았다. 주변에서는 남자아이가 저렇게 말이 많아서 어쩌냐, 말없이 심심하거나 반응과 호기심이 부족한 것보다는 낫다, 나중에 사춘기 들어서고 나면 원해도 말을 안 할 테니 많이 들어줘라 같은 여러 반응들이 있었단다. 이런 말들 중에 어머니의 마음속에서는 남자라면 조금 진중한 면모를 보여야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 지배적이었나 보다. 책을 좋아했으니 좀 더 많은 책을 쥐어주고 배려와 경청에 관련된 책을 정말 많이 읽게 하셨는데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생각하는 것과 경험한 것에 대해 말하는 것을 즐겼고 호기심 또한 왕성했으며 남에게 정보던 지침이던 무언가 전달해주는 것에 있어 자기만족을 느끼던 나의 말수를 줄이기에는 효과적이지 않았나 보다.


날이 흘러 조금씩 커져가도 말이 줄지 않자 주변에서도 사춘기가 지나도 말이 많을 것 같다, 그냥 그런 아이이니 그러려니 하고 말을 '잘' 하는 법을 알려주는 것이 차라리 나을 것 같다는 의견이 굉장히 많았고 그 이후에 내가 스스로 글을 쓰고 싶다는 말을 하자 글(말)의 깊이를 길러야 한다는 충고를 해주셨다. 사실 이전에도 어떠한 사건 이후로는 말의 깊이를 계속해서 기르고 있었던 사실이지만 확실히 지금 와 생각해보면 스스로 어른스럽게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나 스스로가 어렸던 것인지를 일깨워준다. 지금 와 돌아보면 어떻게 저렇게 생각했음에도 자신이 어른스럽고 이해심이 깊다고 생각했을까 싶을 정도의 발언도 많다. 지금조차도 하루하루 했던 말을 반성하고 고쳐 사는데 몇 년 전이야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말하는 것이, 남들과 대화하고 정보를 나누고 생각을 전달하며 소통하는 것에 대한 기쁨이 좋아서 줄어들지 않았다.


그러던 내가 이제는 말이 싫다. 말이 싫다는 것이 맞을까?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말의 의미를 잘 모르겠다. 뭐 정보전달이고 감정 공유니 하며 충고, 상담, 대화, 유머 등을 나누며 서로 간의 이해를 돕는다는 것이고 나발이고 하나도 모르겠다. 오히려 내 말을 줄이는 것이 나에게도 상대에게도 이롭고 상대의 이야기를 적게 듣는 것이 나에게 편안을 가져다준다. 우습다. 그렇게 노력하고 공들여서 만들어낸 인간관계가 쉬이 깨지는 것을 알았고 남들은 내 얘기에 크게 관심이 없으며 남들의 얘기가 나에게 필요하지도 않다는 것을 깨닫는 데에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렸어야만 했나. 사실 이전부터 알았다는 것을 느끼지만 그럼에도 그것을 놓지 못해 붙잡고 있었다면 나는 미련한 것인가 배려심이 넘치는 것인가. 남의 얘기를 주의 깊게 들어주는 것이 경청이라며 노력했고 타인의 감정을 위해 배려를 했다. 그러는 동안 타인에게 그런 경험을 얻은 적은 있는가. 나는 왜 스스로를 표현하려 하지 않았나.


필자의 mbti는 거의 다 반반으로 나온다. 좋게 풀어서 상황에 맞게 유연한 사고와 넘치는 융통성을 가진 것이나 뚜렷한 개성과 성격이 없다는 뜻이나 마찬가지다. 이것이 생긴 가장 큰 원인은 배려였다. 남들이 신나게 노는 것을 좋아하는 e라면 그에 맞춰 텐션을 높였고, 보다 조용히 시간을 보내는 것을 좋아하면 그에 맞춰 i를 보여줬다. 무엇보다 남들의 고민에 f식으로 크게 공감하고 반응해 줬으며 그에 이어 그들의 고민거리나 문제점을 해결해주기 위해 내 시간과 생각을 쏟아 t가 되어 조언하고 도움을 줬다. 나는 누구에게는 활발하고 즉흥적으로 행동하는 사람이지만 또 다른 사람에게는 조용하며 계획적인 삶을 사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나는 누구인가? 나는 왜 이제와 서야 내 성격이 무엇인지 고민하며 나를 챙겨주려 하는 것인가? 지나온 세월을 부정하고 싶은 것인가 앞으로의 내가 행복하고 싶은 것인가.


말을 하기 싫어지게 된 가장 큰 원인은 집이 아니었을까 싶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집을 휴식의 공간이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있을 수 있는 안전한 곳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현관에 들어서는 순간 타인의 간섭을 밖보다 직접적으로 받아야 하며 내 방에 들어와서는 스스로 글을 쓰고 그림을 그려 자신의 발전을 꾀해야 한다는 생각과 보다 깊은 생각을 위해 사둔 여러 철학책이 맞이하고 답답해서 물이나 한 잔 마시러 거실에 나오면 타인의 환경을 신경 써야 하는 처지라 생각한다. 이는 내가 가족이라는 소속감을 잊어버려서 인가 부모님이 불편해져서 인가. 그리고 타인과의 대화에서 가장 크게 의미를 잃게 한 것은 어머니다. 어머니는 자신의 의견 주장이 강력하신 편이라 타인의 의견에 확실성이 본인에게 납득이 될 만큼 인증되지 않는 이상 받아들이거나 서로의 대화를 하려 하지 않고 오직 자신의 주장을 내세우시는 편이다. 그런 불같은 어머니에게 나 또한 불로서 20여 년을 맞싸워 왔지만 그에 지쳤다. 내 말을 똑바로 들어주지 않는 자에게 말할 의미를 잃었고 그 속에서 주장하는 것이 상처를 줄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그렇다면 말을 하지 않는다면 내가 기분 나쁠 일이 없지 않겠나 하는 생각으로 점점 어머니 앞에서 말을 잃었다.


나는 어머니를 미워할 수 없음이 밉다.


내가 완전히 옳아서 더욱 강하게 주장해서 이겨낸다면 처음부터 믿어주지 않음에 원망하고 내 의견을 마냥 어린아이의 생각이라는 것처럼 치부해버리는 것, 자신의 의견을 전달하는 것에 있어서 내가 무언가를 하고 있어나 어떠한 상황인지 배려하지 않고 본인이 하고 싶은 대로 내뱉어 버리는 것,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이야기를 밖에서 하거나 나에게도 해줘야 할 얘기를 나에게는 숨기고 누나를 통해 듣게 만드는 것이 밉지만 그럼에도 내 얘기를 듣고 싶어 하고 나에게 먼저 말을 거는 것이 어머니라서, 미워하는 이유에 대해 반발하는 것이 어머니가 먼저 손 내미는 순간 내가 감히 어머니에게 그러는 못난 놈이 돼버린 것 같아서 도저히 내가 미워할 수 없는 존재로 있어서 나는 그런 어머니가 그런 내가 밉다. 아마 어머니는 내가 말이 줄어든 이유를 절대 알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이런 말을 어머니에게 내뱉을 수 없다. 어머니를 밉다고 말할 수 없다. 단순히 어머니라서 라는 이유가 아니다. 나는 그녀에게서 배려와 경청을 배웠고 삶과 행복을 배웠으며 사랑을 받았다. 그런 내가 어머니에게 사랑을 전하지는 못할 지라도 불행을 줘서는 안 될 노릇 아닌가. 타인에게 말하는 데에 세 번 생각하고 인내한다면 어머니에게는 세 번이 아니라 세 번의 삶도 참을 수 있다. 나는 그렇다. 허나 이를 몰라주는 어머니가 미우나 또 그럴 수 없음에 밉다. 언제쯤 나는 그녀에게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될까.


그렇게 나는 집에서 말을 잃었다. 한데 어찌 밖으로 나와 소리를 낼 수 있을까. 나는 휴식을 잃었다. 한데 어찌 힘을 내어 발전하고 나아갈 수 있을까. 지금 내가 되찾아야 할 것은 스스로 편안하다 느끼는 환경과 타인과의 만남이 행복할 수 있음이나, 그에 우선해 먼저 찾아야 할 것은 말이다. 아마 누군가 나에게 진심으로 다가와 나의 슬픔과 고민에 대해 물어보고 공감한다면 나는 눈물을 참을 자신이 없다. 허나 이를 바라기에 나는 그런 역할을 스스로 맡아 왔다. 그래, 결국 돌아보니 나를 감싸주는 이를 찾지 못했고 이제 더 이상 타인에게 그런 기대를 할 수 없는 사람이 됐다.


만약 오늘 꿈을 꾸게 된다면 꿈속에서 아이가 되어 누군가의 품에서 한껏 울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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