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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다훈 Apr 15. 2023

감정이 시들다

권태기

본래 권태기는 연인관계가 아니라 부부간에 생기는 시간의 흐름으로 인해 권태를 느끼는 것을 뜻했는데, 권태라는 뜻이 ‘어떤 일이나 상태에 시들해져서 생기는 게으름이나 싫증’이라는 뜻이라 좀 더 폭넓게 쓰이게 된 것 같다. 무엇보다 우리는 어릴 때 누구보다 가까이 있는 어른을 제일 닮고 싶어 했듯이 ‘어른들이 이런 경우에 이런 말을 쓰더라-’하는 영향이 있지 않았을까. 오늘 말하고 싶은 바는 이런 권태가 왜 찾아오는 것인가-에 대해서다. 그렇게 좋아해서 안절부절못하다 사소한 것 하나하나 신경 쓰며 조심스레 용기 내어 시작한 소중하디 소중한 관계가 시간이 조금 흘렀다고 해서 그렇게 익숙해지고 무신경해지게 되는 것인가. 그렇다면 진짜 사랑이 아닌 것일까? 시간이 지나 흔히 말하는 콩깍지가 벗겨져서 원래는 이렇네-하며 별로인 모습에 실망하는 것일까? 아니면 그냥 단순히 시간의 흐름에 따라 새로운 것이 익숙해져서 더 이상 신비롭고 소중히 여겨지지 않는 것일까. 사랑을 시작할 때 했던 평생을 지켜주겠단 사랑하겠단 말이 거짓이었을까. 절대 그건 아닐 터이다(만약 진실된 사랑이었다면). 예시로 많이들 새로 산 물건으로 드는데 내 생각으로는 부적절한 예시가 아닌가? 한다. 사람 대 사람의 관계를 사람 대 사물로 예시를 드는 것이 온전하긴 어렵다 생각한다. 차라리 반려 동물을 경우로 두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한데 적어도 데려온 강아지를 단순히 동물이 아니라 ’ 반려‘라고 생각한다면 보다 깊은 책임과 사랑을 동반하여 이 아이가 사고를 쳐도 수습하고 내쫓지 않을 것이며 매 순간이 사랑스럽게 느껴질 것이다. 한데 점점 포기하는 것이 늘어나고 그 속에서 자신의 것을 챙길 여력도 부족한 현세대에서는 연애는 과거에 비해 소중한 관계로 인식되지 않는다. 예전에 비해 못하다는 뜻이라기보다는 의미가 가벼워졌다. 이로 인해 연인관계를 크게 소중히 여기기보다는 그 속에서 자신이 어떤 형태로 있는 지를 더욱 생각하게 된 것이다. 두 명이서 맞추는 관계에서 자신의 모습을 우선시하여 생각한다면 맞춰질 수 없는 노릇이다. 축구에서 혼자 튀고 싶고 골을 많이 넣고 싶다고 해서 팀원들의 패스와 시팅을 부정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결국 혼자가 아닌 둘이 맞추는 관계는 흔히들 갑과 을을 나눌 정도로 개인적으로 변했다. 이런 상황에서 조금이라도 자신에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있다면 쉽게 놓아버릴 수 있으니 이를 그런 모습에 권태가 왔다는 핑계로 놓아버릴 수 있게 하는 변명으로 밖에 들리지 않는다. 물론 맞춤에 실패한 경우에 헤어지는 경우도 있겠다마는 이를 권태로 표현하는 경우는 못 봤으니 넘어가도록 하겠다.


변화된 연애에 대한 인식에 대해 얘기를 한 것은 이제부터 나올 내용에 대해 보다 상세한 설명을 넣어주고자 한 것이다. 본론으로 들어가 권태가 대체 왜 생기는 것일까-하는 것에 얘기를 하자면 연인관계에서 어느 순간 나의 관계로 넘어와버렸기 때문이다. 서로 맞춘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희생을 더욱 생각하게 되고 보다 나를 위해주길 바라다보니 안 해주는 것이 섭섭해지며 해주는 것이 귀찮아진다. 이러면 연인관계라고 칭하기엔 어려워 보이지 않는가. 필자는 연인관계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서로 간의 신뢰, 서로 간에 배려, 그리고 서로에 대한 책임감이라고 생각한다. 한데 앞에서의 경우는 이 모든 것이 사라졌다. 이건 더 이상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아니란 뜻이다. 단순히 서로에 대한 마음이 예전처럼 뜨겁지 않은 것이랑은 다르다. 마냥 서로가 좋아 죽는 연애가 언제까지고 지속될 수는 없으나 그 기간 동안 쌓아온 모든 것이 무너지지 않도록 지탱할 책임을 지고 행동해야 한다. 만약 당신이 정말 사랑을 한다면은. 가벼워진 인식은 이런 책임을 지기 버겁게 만들었다. 동물도 챙기지 못해 유기견, 묘가 엄청나게 많은데 어떻게 사람을 감당하려 하겠나. 마음이 가벼워짐에 따라 책임감이 상실되는 것은 당연한 절차였다. 한 연인이 있다. 이들도 서로의 감정을 잘 모른 체 마음에 들기 위해 노력하고 용기를 내어 이어진 소중한 관계로 시작했다. 믿기지 않던 순간들이 쌓이고 쌓이다 보니 점점 자신의 현실에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고 당연한 것은 어느새 새로운 것에 비해 뒤쳐지고 있다. 그렇게 자신의 마음속에서 뒤로 밀려난 감정이 어느 순간 서로에게 상처가 되었다. 점점 이해를 바라는 것이 늘었고 서로의 마음에 흠 가는 일이 늘었다. 그러다 문득 예전의 설레는 감정이 그리워진다. 한데 그 순간 마주한 현실은 단 하나의 설렘도 남아있지 않다. 관리하지 않은 불씨는 시간이 지나 따뜻함까지 잃었다. 그렇게 꺼져버린 불을 살리기 위한 노력은 처음에 했던 노력의 배를 들여야 다시금 지펴질 수 있지만 그렇게 노력을 투자하기 아까워졌다. 당연한 것에 시간과 노력을 쏟기 귀찮아진 것이다. 그때 느끼는 것은 ‘마음이 식었나? 이제 안 사랑하나?’ 같은 생각이다. 주체가 바뀌었다. 사랑을 시작하고 싶을 때는 ‘저 사람도 나에게 마음이 있을까? 나를 사랑할까?’하는 상대의 감정을 알기 위한 노력을 했다면 이젠 나의 감정을 챙기기 위해 타인의 감정을 지웠다. 이 순간을 벗어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은 다시금 상대를 생각하는 것이다. 익숙함에 속아 소중함을 잊지 말자는 말은 굉장히 뜻깊은 말이나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런 게 아니다. 어떻게 시간이 흐르고 쌓아온 것이 경험한 것이 늘어나는데 언제까지고 서로가 제일 소중할 수 있겠나. 결국 익숙해지고 당연해짐에 따라 다른 소중한 것에 밀려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순간 제일 소중해진 본인의 마음에 묻자. 사랑하는가. 그동안 지내온 시간이 아까워서 이제는 없다고 생각하기에 허전해서가 아니라 정말로 자신이 아직 사랑한다고 말할 자신이 있는 사람인가. 그렇지 못하면 헤어지는 것이 서로를 위함이다. 마음을 억지로 꾸미는 것은 자신에게 못할 짓이며 그런 마음을 주는 것은 상대에게 못할 짓이다. 만약 사랑한다면 과거의 모습을 그리워하고 찾지 말고 현재 눈앞에 있는 사람에게 말을 걸어라. 지금 느끼는 마음을 공유해야 할 의무가 있다. 다시 말하지만 연인관계에서 느껴지는 마음은 오직 너 자신만의 감정이 아니다. 서로가 같이 연결되어 있는 것임으로 그 상황에서 마음에 대한 깊은 얘기를 나누어야 하는 것은 너와 상대 단 둘뿐이다. 타인의 의견이 듣고 싶어서 주변사람에게 여럿 물어서 듣는 답은 너희의 관계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 모든 것은 본인이 받아들이는 것이며 정당화시키는 생각이 드는 순간, 너는 그 사람을 사랑한다 말할 자격은 없는 것이다. 단 둘만의 관계인만큼 서로에게 집중할 필요가 있지 않은가.


권태가 오는 것을 단순히 사랑하지 않게 됐다고 생각하지 말자. 권태를 벗어나려고 아등바등 노력하지도 왔다고 해서 쉬이 상대에게 이별을 통보하지도 말자. 그 순간에 서로의 관계에서 나온 권태라는 감정을 깊이 나누어보고 서로를 위한 선택을 하자. 사랑의 시작이 한쪽이었어도 관계는 둘이다. 그렇다면 이별을 하는 것도 둘인데 어떻게 혼자만의 생각으로 정리를 하려 하는가. 적어도 사랑했던 사람에 대한 책임감을 가져야 할 필요가 있다. 자신을 내려놓으라는 뜻이 아닌 타인도 소중한 사람임을 간과하지 말자는 뜻이며 적어도 솔직하고 서로를 생각할 줄 아는 사랑을 하자는 말이다. 이 모든 것은 나에게도 하고 싶은 말이며 사랑이란 감정에 대한 인식이 바뀌는 것에 큰 아쉬움을 느껴서 오랜만에 적게 된 글이다. 사랑에 대한 단편적인 글을 여럿 쓰면 쓸수록 줄어드는 감정의 크기가 너무나도 아프게 느껴지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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