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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눈동자와 까만 혀

눈에서 마음이, 입에서 생각이

by 정다훈

처음 만났을 때의 기억에 남아있는 모든 분위기. 무더운 여름에 휴식처가 되어주는 시원한 음료와 에어컨이 반겨주는 카페에서 친구를 통해 만난 너, 첫눈에 반한다는 말이 뭔지 모르는 내게는 그냥 예쁜 사람이구나 싶었던 게 끝이었지만 자리까지 걸어오는 걸음걸이, 의자를 소리 나지 않게 조심스레 빼서 앉으며 귀 뒤로 머리를 넘기는 손, 정중히 인사하며 눈웃음을 지어 보이던 네 모습에 설렜다.


통하는 대화주제도 많았다. 서로 맞지 않는 음식 취향이 있음에도 능청스레 농담을 건넬 정도로 쉬이 가까워졌고 예민하게 굴지 않았다. 좋아하는 영화를 노래를 음식을 음료를 취미를 말하며 졸지에 소개팅을 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이렇게 얘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에게 지금은 이 사람과 얘기하기 위해 존재하는 듯했다. 친하게 지냈으면 좋겠다는 말을 하며 번호 교환을 성공했을 때 무덤덤한 척했지만 무척이나 기뻤다.


그날 이후에 소소한 연락을 주고받다가 전에 말하던 여러 취향 중에 겹치던 좋아하는 음료가 신상이 나와 용기를 내어 같이 가자고 물었다. 떨리는 손으로 겨우 보낸 다음에 핸드폰을 던져놓고 숨어서 언제 연락이 오려나 하며 발을 구르다 정작 울린 알람에는 손이 떨려서 확인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제발 거절이 아니길 빌면서 실눈으로 확인한 답장에 당장이라도 같이 갈 듯한 말들이 와 있었고 나는 순간 꿈인가 싶어 답장을 잊을 정도였다. 서둘러 답을 보내고 급히 챙기기 시작했다. 피부에 뭐 좀 바르고 관리하라는 말을 들을 걸 하는 생각으로 괜히 거울을 보는 시간이 걸렸고 머리도 평소보다 더욱 오래 만지다 드라이기에 손을 데는 줄 알았다. 평소에 아무렇지 않게 입고 다니던 옷들이 모두 허름해 보이고 괜히 향수도 평소보다 한 두 번 더 뿌린 체로 집을 나설 때의 발걸음. 행운이었다.


만나서 역시 맛이 없을 수가 없는 맛있는 음료를 마시며 행복한 미소를 짓는 너. 나에겐 이제 이런 음료의 맛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너의 생각이 중요할 뿐. 오랜만에 만난 김에 시답잖은 얘기나 늘여놓으며 떠들고 있었다. 그러던 중 갑자기 울린 그녀의 전화기. 밝은 목소리로 전화를 받으며 ‘오빠‘라는 말과 함께 밖으로 나가 전화를 받으려 걸어가는 뒷모습에서 알 수 없는 불쾌함이 느껴졌다. 이것이 질투인 걸까.


돌아온 너에게 어색한 웃음소리와 함께 썸 타는 사람이야?-라며 장난스레 물었다. 속으로는 제발 아니길 빌면서 빨대를 모두 부숴버릴 듯이 잘근잘근 씹으면서 말이다. 잡고 있던 컵이 너무 차가워서 손이 얼어버릴 듯했던 순간 그냥 친한 선배라는 말에 그게 뭐라고 그렇게 안심을 했다. 요즘 외롭다고 말하면서 이렇게 물어보는 너는 어떤 거 없냐고 묻는 너, 순간 잘해보고 싶은 사람은 있지라고 말을 뱉었고 그게 누구냐는 말에 입술이 모두 굳어버린 듯이 열리지 않았다. 대답하기 싫으면 안 해도 괜찮다고 멋쩍게 웃으며 나를 배려하는 모습에 입을 떼었다. 눈치챘으면서-라고. 이렇게 떨리면서 말해야 할 일인가 싶지만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이건 분명 최고의 용기였다.


당황한 것인지 어떤 반응을 해야 할지 모르겠는 것인지 알 수 없는 미묘한 표정을 짓던 너는 장난기 섞인 표정으로 씩 웃었다. 이 정도로 용기 낼 거면 진작에 말해보지 그랬냐며 여기선 안 되겠다고 영화나 보러 가자했다. 강제로 이끌려 정신없이 영화를 보고 밥을 먹고 뽑기도 하면서 알찬 하루를 보냈다. 어두워진 밤, 집으로 데려다주려고 발걸음을 같이 옮기자 데려다줄 거냐고 묻는 네 모습에 당연히-라고 말했다. 너는 남자친구 아니면 자기 집을 데려다줄 수 없다며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아까 뽑았던 인형을 내 손에 돌려줬다. 이런 선물도 남자친구가 아니면 받을 수 없다면서. 순간 내가 싫다는 것인가-싶은 바보 같은 생각을 했지만 인형에서 눈을 떼고 너의 눈을 봤을 때 확실히 그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손에 있던 인형을 너에게 다시 건네면서 말했다. 이제부터 집에 데려다주게 해달라고. 이보다 기쁠 순 없었다.


이 모든 기쁨이 전부일 줄 알았던 내게 너는 더욱 큰 행복을 가져다주기 시작했다. 둘이서 걷기만 해도, 얼굴을 맞대고 얘기를 해도, 같이 카페에 앉아서 음료를 마시며 쉴 때에도 공원의 벤치에 앉아서 바람을 맞을 때도, 모든 취미를 너와 함께하고 매 순간을 서로를 생각하며 더 이상 사랑한다고 말하는 게 어색하지 않을 때쯤, 우리에게 상처가 생겼다. 이렇게 까지 커져버릴 줄 몰랐던 문제다. 단순한 생채기로 생각하고 무시했던 상처가 아물지 않고 계속해서 피를 흘리게 할 줄은 몰랐다. 다툼이 늘었다. 행복보다는 분노가 늘었다.


늘어난 분노에 더 이상 너는 나에게 빛나는 사람이 아니다. 빛나지 않다 해도 아직까지는 너의 모든 습관과 취향이 나에게 짙게 남아 빠지질 않았기에 행복이겠지 하며 넘겼다. 이때의 균열을 애써 무시하고 우리는 행복했다. 행복한 듯이 연기한 거였다. 너는 이미 뒤에서 슬픔을 삼키고 있었다. 내가 뒤에서 분노를 삼키는 만큼. 이 이상으로 넘긴다면 체해버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는지 너는 내 앞에서 눈물을 쏟았다. 너의 마음에 난 상처에서 흘러나왔다. 너는 나에게 이별을 말했다. 너의 머리에 새겨진 상처에서 흘러나왔다. 나는 이 감정이 진실되다 생각했다. 아프지 않았고 슬프지도 않았다.


시간이 흐른다. 아물고 흔적조차 없이 사라져 버린 상처임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가려워 왔다. 긁어도 낫질 않고 애써 무시해도 지워지지 않는다. 이미 다 묻어버린 시간들에 다가가서 묻기 시작했다. 왜 아픈 것인지- 질문을 처음 한 순간, 계속해서 빠져나오는 시간들이 나를 가뒀다. 내 시계는 그때 멈췄고 내 눈은 슬픔으로 가득 차 있다. 하지만 다행히도 내 입은 함부로 행동하지 않았다. 그렇게 포기했다.


느껴온 감정은 많지 않으나 셀 수 없다. 이 정도의 색깔들이라면 마음이 까매져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마주한 거울에 비친 내 눈동자는 하얀색이었다. 짙게 물들어 버린 것은 내 입이었다. 지나온 순간, 꺼낼 수 없는 얘기들이 남아 붙어 있다. 머리가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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