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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의 글체

by 정다훈

편지가 왔다. 일전에 그녀가 글을 쓰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고생이라곤 해보지 않았을 하얗고 맨들 한 손과 긴 손가락이 펜을 감싸 쥔 체 종이 위에서 천천히 움직였다. 글체만 봐도 이 여자는 섬세하겠거니-하는 생각이 들게끔 한 자, 한 자 신중히 써내려 오는 듯한 느낌이었다. 먼 곳에 있는 그녀가 이 추운 날에 감기 조심하라는 말을 이렇게 까지 길게 늘여 보낸 이유가 무엇일지는 나 또한 안다. 다시 찾아오지 못할 곳에 대한 미련일지도 모르지만 그보단 사죄가 맞을 것이다.


우체부가 급박했던 것인지 편지를 미처 함에 꽂아 두지 못하고 바닥에 떨어트린 체 계단을 우당탕 거리며 내려갔다. 저 사람도 자신만의 속도로 시간을 보내는 중이겠거니 하며 무릎을 굽혀 주웠다. 편지에 적힌 발신인에 적힌 그녀의 이름 석 자에는 예전만큼의 울림이 없다. 한 때는 이 이름 석 자에 미친 듯이 기뻐하고 날 뛰었으며 언제는 보기도 싫은 끔찍한 것처럼 여겼을 때도 있었다. 그런 경험들이 쌓여서일까, 다채로웠던 사람이 단순하게 느껴지기 시작한 것은. 편지 봉투를 뜯어 꺼낸 편지에는 아쉽게도 그녀의 글씨가 적혀있지 않았다. 혹여나 했지만 역시나였던 것에는 이제 실망보다는 수긍이 빨라졌다.


괜히 예전에 네가 쓰던 침실의 서랍장으로 가서 맨 밑에 들어있는 추억들을 꺼냈다. 네가 쓰던 향수, 화장품, 옷가지, 펜과 편지지, 함께 맞춘 추억의 물건들, 그리고 서로 주고받았던 편지들- 일전에 정리를 한 번 한 탓에 내가 적어준 편지는 대부분 꺼내져 있지만 네 것은 그대로 안에 두었다. 시간이 흐른 덕에 버린 물건도 많지만 아직까지 안에 들어있는 것들은 버리기 힘들지 않을까. 침대에 등을 기대고 앉아서 편지를 모두 꺼내어 읽기 시작했다. 글의 내용은 점점 깊어졌다가 천천히 얕아졌다. 결혼한 이후에 함께 지낼 때조차 아침에 집에서 나온 날 그리워하는 편지를 적어서 탁자에 두곤 나를 기다리던 너의 모습이 그리워질 때의 편지를 읽을 무렵에 난 눈물을 흘렸다. 혹여나 편지가 상할까 싶어 급히 내려놓고 침실에서 튀어나왔다. 결국 견디지 못하고 차를 끌고 나섰다.


이 자그마한 서랍 한 칸에 들어서 있는 너의 모습에 눈물을 흘리던 것은 옛 일이다. 최근 찾아오지 못한 미안함에 괜히 한 번이라도 더 닦아주고 가져온 새 꽃으로 바꿔두었다. 평소 깔끔한 것을 좋아했던 너이기에 여러 가지로 꾸며 두진 않았기에 남들보다 심심해 보였다. 앞에서 얘기를 시작했다. 항상 함께 하던 얘기를 주저리주저리 늘여놓는 데에 중천에 있던 해가 거의 다 넘어가 있었다. 네가 떠난 후의 얘기를 시작했다. 오늘 있었던 눈물을 흘릴 뻔한 일까지 능청스레 늘여놓는 데에 분침이 5번도 이동하지 못했다.


잠시 아무런 말없이 가만히 너를 들여다보다가 인사는 하지 않고 발걸음을 옮겼다. 다음에 다시 오겠단 말도, 보고 싶다는 말도, 잘 지내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눈물을 흘리지도 않았고 발걸음에 힘을 빼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너를 잊은 것은 아니다. 알겠지 아마.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너 없는 집이 익숙하지 않을 때쯤 한 번 다시 찾아오겠다는 생각으로 다시 혼자가 되려 집으로 돌아갔다. 오기 전에 편지 한 장이나 써놓고 올 걸 그랬나, 달라진 글체를 보여주고 싶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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